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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패스트 라이브즈>와 <파묘>에서 호명되는 ‘한국(인)’에 관하여
2024-03-27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장면 하나.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한 여자는 일본어로 안내하는 승무원에게 짧게 대답하고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장면 둘. 유년기를 한국에서 보내고 미국에 이민 간 여자는 24년 만에 재회한 친구를 두고 “그 사람은 진짜 한국인(Korean-Korean)”이라는 표현을 쓴다. 한쪽에서는 일본어로, 다른 한쪽에선 영어로 한국인을 호명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한국 사람과 진짜 한국인. 서로 다른 영화에서 흘러나온 두 장면은 의미심장하게 굴절된 거울상을 형성한다. 누군가는 자신을 ‘한국인’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한국인’이라고 불린다. 어떤 연관성도 없는 두 영화의 인물들은 이렇게 뜻밖의 장면에서 같은 단어를 공유한다. 그런데 그들이 공유하는 단어가 같은 의미를 전하고 있는 걸까?

‘한국인’을 가리키는 두 편의 영화가 한국 안팎에서 나란히 도착했다. 한 영화는 천만 관객을 눈앞에 두며 극장가에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고, 다른 한 영화는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얻은 호의적인 평가를 거쳐 비영어권 영화로는 드물게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장재현의 <파묘>와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는 얼핏 별다른 접점이 없는 것 같지만, 한국이라는 매개를 내세워 각각 국내와 세계시장에서 기념비적인 성취를 만들어 낸 사례들이다. 나는 두 영화가 조금도 훌륭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영화들은 국제적으로 급격히 부상하는 한국영화와 그 안에서 재현되는 한국인이라는 영화적 모델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한 문제를 드러낸다. 창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두 영화는, 내부적 질서를 유지하지 못해 어떤 식으로든 외부와 접합할 수밖에 없는 한국영화의 분열적 ‘증상’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패스트 라이브즈>, 평범함과 특별함

한 사람의 개체이자 보편적 종족으로서의 한국인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패스트 라이브즈>가 묘사하는 ‘한국인’의 표상은 평범함과 특별함이 모순적으로 교차한다. 먼저 평범함. <패스트 라이브즈>의 인물들은 평범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뉴욕에 온 해성은 여자친구와 결혼을 망설이는 이유를 설명하다가 문득 “난 너무 평범하거든”이라고 읊조린다. 집에 돌아온 노라는 그 말을 이어받아 해성이 “평범한 직업에 평범한 삶”을 산다고 전한다. 다채로운 선택지로 충만하던 우리 삶은 고작 눈앞에 주어진 단일한 세계에 도착해 있다. 눈앞에 있는 단 하나뿐인 삶이 평범해져 버렸다는 자각은 이때부터 인물의 내면에 증식한다. 그날 밤 노라는 침대에 누워 자신을 “한국에서 온 평범한 여자”라고 규정한다. 그 말은 해성을 만나고 나서 전해진 증식의 결과물이다. 한국인의 내면은 평범하다. 너무나 평범한 나머지 그 어떤 시간의 축적도 느껴지지 않는 ‘인연’의 텅 빈 재료로 느껴질 만큼.

그런데 그녀 옆자리에 누운 남편 아서는 거꾸로 ‘평범한’ 한국인들의 이야기에서 ‘특별함’을 발견한다. 유태인 극작가인 아서의 관점에서, 노라와 해성은 어린 시절 헤어진 연인이 24년 만에 재회해 운명적인 인연을 깨닫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주고받은 서사적 깊이에 비하면, 작가 레지던시에서 우연히 만나 월세를 아끼기 위해 동거를 선택하고 영주권 때문에 계획보다 일찍 결혼한 ‘미국인’들의 드라마야말로 평범하기 짝이 없다. 여기서 <패스트 라이브즈>의 주인공은 특별한 이야기의 당사자인 한국인 ‘나영’과 극작가로 활동하며 평범한 부부생활을 보내는 한국계 미국인 ‘노라’로 갈라진다. 그런데 또 다른 관점에서 그녀는 한국에서 온 평범한 여자이면서, 두 차례나 이민을 선택한 특수한 이방인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정체성과 관점의 두 남자(해성, 아서)가 개입하자 그녀 삶에 새겨진 모순적 조건이 드러난다. 삶을 서사의 단위로 변환하는 상상적인 힘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시점으로 펼쳐진다. 침실에서 아서를 바라보는 노라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거기서 흔들리는 것은 ‘평범한 여자’와 ‘특별한 이방인’을, 그리고 ‘특별한 한국인’과 ‘평범한 미국인’ 사이를 혼란스럽게 오가는 그녀의 정체다. 그 흔들리는 눈동자에 나란히 누운 아서와 인연으로 연결된 해성이 번갈아 비친다.

노라와 아서가 침대에서 나누는 대화는 국제적으로 유통 중인 ‘한국인’의 재현을 받아들이는 미국적 시각을 의도치 않게 폭로한다. 아서에게 미국의 서사는 지루하고 진부하다. 그와 노라가 공유하는 삶의 궤적은 ‘나’라는 개인의 특수성이 사라지더라도 성립할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이다. 지나치게 보편적인 이야기는 ‘나’를 덮치는 불안으로 다가온다. 내가 아니었어도 당신은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결혼하지 않았을까? 우연의 연속으로 형성된 우리의 관계는 언제든 쉽게 무너질 수 있지 않을까? 이는 한국인이라면 자연스럽게 체화하는 ‘인연’의 서사적 감수성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의 뒤집힌 열망이다.

미국인의 일상은 지루하고 한국인의 내러티브는 매혹적이다. 아서는 “진짜 한국인”의 멜로드라마에 접근한다. 구체적인 계기가 생략된 채 뉴욕에 찾아온 해성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24년에 걸친 인연을 결산하려는 나영의 백일몽처럼 보이기도 하지만(그러므로 두 사람이 나누는 한국어 대화는 그녀의 잠꼬대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인의 내러티브에 지루함을 느끼고, 한국계 미국인 아내가 잠꼬대로 말하는 언어를 궁금해하며, 인연으로 연결되는 한국인들의 서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아서를 영화가 구축한 ‘특별한 이야기’ 안으로 끌어당기는 무의식적 충동이기도 하다. 이때 “진짜 한국인”으로 그들 앞에 도착한 해성은 20여 년 만에 재회한 한국계 미국인 여성에게도, 그녀의 백인 남편에게도 흥미로운 자극을 전달하는 투명한 매개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 기능을 전달하지 못했다면 해성은 <패스트 라이브즈>라는 ‘미국영화’에서 “진짜 한국인”으로 인식되지 않았을 것이다.

노라는 해성과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 ‘한국인 같지 않은 느낌’과 어떤 면에선 ‘더 한국인 같은 느낌’을 동시에 느꼈다고 말한다. 해성의 침입은 한국인, 이민자, 한국계 미국인의 범주를 모호하게 흩트려놓는다. 해성은 마침내 재회한 어린 시절의 친구에게 말한다. “너는 너이기 때문에 떠나야 했어.” 이 동어반복의 규정은 ‘한국인’과 ‘이방인’이라는 두 개의 보편적 범주에서 나영/노라를 떼어낸다. 그녀는 정해진 범주에 속하는 대신, “떠나는 사람”이라는 특수한 개인으로 도착한다. 이 말의 반대편에서 노라는 해성에게 전생의 인연을 이야기한다. 혹은 ‘전생의 인연’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한국인의 보편적 내러티브를 들려준다(“전생에 우린 누구였을까?”). 해성은 노라에게 필요한 특수성의 서사를, 노라는 해성이 받아들일 만한 보편성의 서사를 건네준다. 그들의 단순한 대화는 특수성의 숏과 보편성의 역숏으로 찢어진다. 해성과 노라는 집에서부터 택시를 기다리는 건널목까지 영화를 통틀어 가장 긴 길이의 수평 트래킹숏을 걸어간다. 그들은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수평 이동의 기나긴 시간에 들어온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두 사람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인연’이라는 영화적 알리바이에 복무하기 위해 정직하고 무기력하게 화면을 걷는다. 그들은 인연이라는 관념을 완수하기 위해 장면을 배회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인을 둘러싸고 있는 관념적 서사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그 대가로 영화적 표면을 구성하는 시청각적 자극의 활동성을 방치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인’과 우리가 규정하는 ‘한국인’ 사이에는 언제나 말끔히 해소되지 않는 간극이 존재한다. <패스트 라이브즈>가 구축하는 한국인의 정체성은 자율적으로 구성된 모델이 아니다. 이는 한국을 끌어들이려는 서구적 시선의 개입과 외부로 수출되고자 하는 한국적 서사의 욕망이 일으키는 협상으로 나타난다. “진짜 한국인”과 그 앞에서 ‘한국인 같지 않은 느낌’과 ‘더 한국인 같은 느낌’을 받는 이민자와 그들을 바라보며 “한국인”이 공유하는 내러티브에 매혹을 느끼는 백인이 결합된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 비정합적인 협상의 절차다.

<파묘>, 개인적인 것과 국가적인 것

산꼭대기에 있는 이름 없는 무덤. 휴전선으로 가로막힌 북한이 멀리 보이고, 땅 밑엔 일본 제국주의가 묻어둔 다이묘의 관이 있으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뒤 미국 국적을 획득한 친일파 집안의 후손들이 파묘를 위해 그곳을 찾는다. 무덤은 한국적 지형에 새겨진 특수한 서사를 허구적으로 부풀린 위도와 경도에 자리 잡고 있다. <파묘>는 바로 그 한반도의 지형, 일본과 미국이 차례로 개입하고 국토 한가운데 경계선이 그어진 역사적 결과로서의 공간을 조망한다. 장재현은 오컬트가 아니라 한반도를 다루는 영화감독이다. 오컬트는 한반도를 해석하기 위한 효과적 수단의 한 단면이다. 장재현이 천주교의 사제(<검은 사제들>)와 기독교와 불교의 교리(<사바하>)에 이어 무속신앙과 풍수지리(<파묘>)로 자유롭게 소재를 변경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영화가 구체적인 종교 현상에 깊이 천착하기보다는 한국이라는 영토에 뿌리 깊게 새겨진 믿음과 두려움을 해석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어떤 해석의 관점에서 돼지는 악마를 봉인하는 구마의식의 상징이지만, 다른 해석의 관점에서 돼지는 깨어난 오니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반복하자면 그는 오컬트가 아니라 한국인이 믿는 것, 한국인이 두려워하는 것을 관찰한다. 오컬트적 외형이 제시하는 믿음과 두려움이라는 문제는 상덕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에서 종교이자 과학”이다. 오컬트 장르가 요구하는 절차는 한반도에 새겨진 믿음과 두려움을 실물보다 크게 과장하는 돋보기다.

돋보기를 손에 쥔 장재현의 시선은 언제나 전체를 내려다보는 조감도의 관점을 취한다. <사바하>에서 남한 중부를 마름모꼴의 네 구역으로 나누던 것처럼, <파묘>는 한반도를 호랑이의 형상으로 간주하고 그 척추에 박힌 쇠말뚝을 내려다본다. 이처럼 장재현의 영화는 한반도에 적힌 두려움의 겉면을 지도 위에서 조망하는 작업이며, 공동체의 병리적 공포를 깊숙이 파고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억압된 역사적 무의식을 건드리는 호러가 아니라 공동체의 보편적 도덕성에 의존하는 히어로무비에 속한다. <파묘>는 한국이라는 지형, 한국인에게 깃든 정신 체계,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통합하는 서사의 기원적 관념을 노출한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뒤 냉전 질서의 이념 대립에 휘말려 전쟁과 분단을 경험한 국가.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사면이 가로막힌 영토 위에 미국적 정체성과 자본을 동경하고, 켜켜이 쌓인 과거를 외면하거나 과거에 종속돼버린 보편적 ‘한국인’이 출현한다. 이 영화는 실체로 붙잡히지 않는 그 ‘한국인’이라는 관념을 구체화한다. 그들의 믿음은 견고하다. 지상에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아파트가 부동산 자본의 기념비처럼 세워져 있고, 지면 아래엔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무덤에 덮여 있다(IMF와 더불어 <초록 물고기>가 제시한 한국영화의 공간적 지형학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덕이 말하듯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은 이제 국가의 “끝물”을 바라보고 있다. 영화 초반부에 그들은 일본과 미국이라는 바깥으로 향해 있다. 내부를 지탱하는 힘이 무너지는 단계에 다다랐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뉴욕으로 향하는 해성의 동기가 묘사되지 않는 것처럼, <파묘>의 상덕은 한반도의 척추에 꽂힌 쇠말뚝을 제거해야 할 내적 동기가 없다. 속물적 지관일 뿐인 상덕과 일제강점기에 박힌 쇠말뚝은 픽션의 범주 안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내적 동기의 부재가 밝혀진 자리에서 상덕은 무엇보다 손쉽게 ‘한국인’을 조직하는 서사에 호소한다. 절에서 발견한 자료와 풍수적 지식을 결합해 깨어난 다이묘를 무찌르자는 비장하고 음모론적인, 그러나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유혹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쇠말뚝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뽑아내면 모든 게 회복된다’). <파묘>의 클라이맥스는 풍수지리적 지식으로 무장한 상덕의 이야기가 물리적으로 실행되는 광경을 비춘다. <파묘>가 내려다보는 한반도의 지형은 그 안에 머무는 인물들의 심리에 깃들고, 이와 같은 심리 상태는 등장인물 개개인을 보편적 한국인으로 호명하며, 그 보편성이 화면 곳곳에 미시적으로 물든다(독립운동가에게서 빌린 주인공의 이름, 광복절과 삼일절에서 따온 차 번호, 동물에게 부여된 상징, 오행의 속성이 깃든 사물). 이런 장면들에서 <패스트 라이브즈>와 <파묘>는 스크린 바깥에 맴도는 ‘한국인’의 내러티브를 영화 내부의 논리로 끌어들인다. 상덕과 해성이라는 인격적 개체는, ‘항일’과 ‘인연’이라는 거대한 줄기에 복속된 보편적 종족으로 뒤바뀐다.

한국영화와 한국적인 것

두 영화의 오프닝은 모두 화면 바깥에서 주인공을 관찰하는 시각을 전제한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술집 손님들은 노라와 해성과 아서의 관계를 추측하고, <파묘>의 비행기 승무원은 화림을 일본인으로 착각한다. ‘한국인’으로 보이지 않던 그들은 천천히 ‘한국인’을 이루는 것들을 되찾는다. 그 과정에서 세공되는 ‘한국인’의 의미에는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경합이 있다. 보편적인 종족과 특수한 개인. 대립하는 두 영역은 서로 충돌하고 겹치고 스쳐 지나가다 끝내 한쪽을 잠식한다. 이처럼 오늘날의 한국영화는 우리에게 익숙하게 공유되던 보편적 내러티브와 이를 낯설게 바라보는 이질적 시각이 공존하면서 생기는 모순을 직면하고 있다. 이 불균질한 픽션의 무대에서 ‘한국인’이라는 종별 특수성을 호명하는 것은 ‘한국영화’라는 규정을 재정의하는 사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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