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과 만질 수 없는 것’을 믿지 못하는 관객의 굳은 선입견을 점잖게 훈계하는 대사를 초반부에 배치하고 시작하는 <파묘>는 바로 그 전제에 고통받는 척하면서 뻔뻔스럽게 그 전제를 배반하고 심지어 거기에 고상한 명분을 칠하면서 영화적 자살과도 같은 과도한 장식의 전시로 나아가는데, 오컬트에 특화된 재능의 소유자로 주목받던 장재현 감독은 이로써 오컬트와 괴수물을 난폭하게 결합했는데도 상찬받으며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흥행 기록을 경신하는 영광의 월계수를 쓰게 되었다. 내게는 얼빠진 소리처럼 들리는 이 영화에 대한 온갖 고급한 비평적 담론과 SNS를 통해 넘쳐나는 진영 논리에 기반한 (좌파 반일영화라는 모 다큐멘터리 감독의 비난에 대한 대중의 응징이라는 투의) 찬가를 존중하면서도 이 영화에 대한 보다 담백한 접근이 필요한 건 아닐까라는 의문에서 이 글을 쓴다.
싸움의 비장한 명분
<파묘>는 변칙이라고 지적해도 무방한 과격한 서사의 뒤틀림을 통해 우리의 감각을 얼얼하게 만들고 반복해 보다 보면 실소가 나오는 감각의 불화를 야기하는 자극들로 가득 찬 구성을 펼친다. 무당 화림이 미국 LA에 사는 부유한 친일파 후손에게 의뢰를 받고 풍수사 상덕, 장의사 영근과 팀을 이뤄 나쁜 자리에 묻힌 친일파 조상의 묘를 파는 설정으로 전개되던 이 영화는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에 기초한 명작의 테두리를 근엄하게 유지하면서도 돌연 차근차근 쌓아가던 서사의 호흡을 포기하는데 친일파 조상의 관 밑에 이중으로 묻혀 있던 전국시대 다이묘 정령의 존재가 밝혀지고 누구 몸에 빙의하거나 하는 번거로운 절차 없이 당당하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이 일본 귀신과 주인공 일행이 대적해 싸우는 것이 후반부의 잔혹극을 이룬다.
한국의 원귀에서 오니라고 불리는 일본 귀신으로 대적해야 할 대상이 바뀌는 이 파격적인 전환은 그 생소함이 주는 충격으로 인해 당연히 품어야 할 서사적 질문을 뭉갠 채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가 내전에서 죽은 영주의 귀신이 화면에 그대로 드러나는 물리적 충격의 외설성을 지속적으로 반복해 전시하면서 화면의 긴장을 유지한다. 외설적이라는 사전적 정의 그대로 함부로 드러내어 추하고 더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이 귀신의 물리적 형상은 실소를 자아내는데 원한의 대상이 명확한 한국의 원귀와 달리 이 일본 귀신은 보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죽여 없애는 잔혹한 사건들을 일으키며 영화는 그 효과로 서사의 구멍을 메운다. 친일파 조상의 여동생인 고모할머니가 상덕 일행에게 묻는 질문, 왜 일본 음양사가 일본을 위해 충성한 한국 사람의 묘에 일본 귀신을 함께 매장했는지, 그로써 그 집안의 후손들이 고통받게 되었는지를 묻는 당연한 질문은 그 집안의 미래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 후손의 문제와 연결된 것이라는 가공할 무게의 화두로 비약한다. 그에 따라 풍수사 상덕은 이제 그만 포기하자는 장의사 영근의 말에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땅 운운하며 일본 귀신과의 싸움에 비장한 명분을 붙인다.
B 무비의 외설적 묘사가 갖는, 기성의 서사와 묘사의 표준을 마구 헤집음으로써 나아가는 해방적 가능성은 A급 프로덕션의 질감과 거창한 명분의 그물에 갇혀 허우적댄다. 급기야 무당 화림과 일본 귀신이 숲속의 거대한 고목나무 아래서 대결을 펼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는 힘이 부치는 화림의 뒤에 화림의 수호령인 할머니 귀신이 버티고 서서 일본 귀신을 물리치는, 엄숙하기 그지없는 장면이 나옴으로써 이 모든 설정이 해체와 파괴의 도전이라기보다는 일제의 무도한 기운이 한반도를 여전히 더럽히고 있다는 기성의 통념을 진지하게 옹호하는 것임을 드러낸다. 특이한 원귀의 이 물리적 형상의 재현이 주는 자극적인 느낌은 일본과 한국, 남자와 여자, 과거와 미래의 이분법을 도식적으로 강화하면서 수다한 과잉 관념의 미끼가 되어준다.
장재현 감독의 이전 영화들은 신의 존재와 의의를 집요하게 고찰하고 탐구하기 위해 악의 존재를 형상화했다. 영상원 졸업작품으로 만든 <검은 사제들>은 중편 분량의 스타 배우가 나오지 않는 역작으로서 그의 영화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기운을 뿜어내는 영화였는데 악마가 들린 존재를 대하면서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운데 불가지 영역을 방치하는 신의 뜻마저 알 수 없기에 더욱 두려움을 가중시켰다. 장편 상업영화로 개작한 <검은 사제들>은 공포의 강도 면에선 원작에 비해 훨씬 약해지고 말랑말랑해졌는데 강동원이라는 스타 배우가 영화 속에서 죽을 일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영화는 훨씬 친절해졌고 외부에서 온 악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밝혀준다. 서사 면에서 좀더 복잡한 <사바하>는 재앙을 몰고 오는 괴물의 존재와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구원자의 자리를 뒤바꾸는 결말을 통해 편재하는 악의 본질을 탐구해 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의 강도를 더 높였다.
외설적인, 너무도 외설적인
<파묘>는 거꾸로 간다. 타자의 공포의 기원을 일본의 식민지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 악귀의 형상을 매우 구체적으로 적시함으로써 구원과 부활의 개념을 투명하게 세속화시키며 저잣거리에서 벌어질 무한히 공전하고 회귀하는 진영 논리 싸움의 미끼를 자처하고 결과적으로 영리하게 관객의 만족감을 낚아챈다. 이 땅에서 살아갈 후손들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 일본 악귀들과 사명감에 가득 찬 투쟁을 벌이는 <파묘>의 주인공들은 존재의 불완전함과 구원에의 갈망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경외감과는 거리를 둔 채 구체적인 역사의 상흔을 극복한 늠름한 승리자 영웅으로 남는다.
장재현 감독은 본인이 관심을 가져온 고유한 시각을 단단하고 세련되게 다듬는 대신, 한일 양국을 망라한 오컬트 소재를 다양하게 전시하면서 수수께끼 같았던 불가지론의 영역을 한일 양국 귀신의 싸움이라는 명확한 경계로 구획 짓고 자극에 자극을 덧입히면서 뼈대는 더욱 앙상해진 영화를 만들어냈다. 화림의 조수인 봉길이 보국사라는 퇴락한 절의 창고에서 일본 귀신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을 묘사하는 영화 중반의 장면 같은 것은 악귀의 존재를 전면화해 서프라이즈 효과로 서사의 구멍을 밀봉하려는 이 영화의 성급하고 과장된 묘사의 일례일 뿐이다.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공포영화의 낡아빠진 개념에 저항이라도 하는 듯이 <파묘>는 원귀라는 괴물과 인간들의 미세한 상호작용이라는 두려움의 과정이 주는 매혹에는 관심 없이 모든 점에서 성큼성큼 먼저 충격 묘사를 깔고 인물의 대사로 수습하는 안전한 미봉책을 구사한다. 장재현 감독의 이전 작품들이 한국영화계에선 좀처럼 없는 악의 공포를 집중적으로 탐사하려는 작가적 의지의 발현이었다면 이 가공할 상업적, 비평적 성공을 거둔 그의 신작 <파묘>가 일시적인 정체 또는 탈선이기를 바란다. 정체 모를 도사가 국정 가이드를 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도는 한반도에서 일제의 원귀와 한국의 수호령이 대결을 벌이는 스크린의 풍경은 고차원의 담론으로 포장하기엔, 반복하지만 너무 외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