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연속 기획① - 2024년 한국영화계 구조 진단, ‘홀드백 법제화’ 이슈의 이면
2024-03-21
글 : 이우빈

<파묘>가 극장 비수기에도 800만 관객을 돌파하고, <웡카> 등이 선전하며 2~3월 극장가는 어느 정도 순항 중이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2023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서 ‘우리는 어두운 터널의 끝을 향하고 있을까’라며 조심스러운 기대를 내비쳤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영진위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기준, 2023년에 투자가 결정된 한국 상업영화는 12~13개로 추정돼 2017~19년 평균 제작 편수의 1/4 수준이었고, 투자금은 2017~19년 평균 대비 38% 수준에 불과했다. 한국 영화시장이 완전히 얼어붙었단 의미다. 한 영화계 관계자의 말처럼 “멀티플렉스 3사가 언제 철수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위기감”이 업계 전반에 팽배해 있으며, 한국영화의 질을 높였던 영화제들은 하나둘 문을 닫고 있다. 이러한 위기들을 극복하기 위해 영진위 및 영화계 인사들은 해법을 찾고 있다. 그중 하나가 지난해 말부터 본격적으로 화두에 오른 ‘홀드백 법제화 이슈’다. 극장산업을 부흥시키고자 한 이 대책은 3월이 지난 지금에도 별다른 경과를 보이지 않고 있다. <씨네21>은 홀드백 법제화의 더딤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 살펴봤다. 이어서 4월엔 홀드백 및 객단가 이슈의 경과, 영화제 지원금 삭감 등에 대한 ‘2024년 한국영화 구조 진단’ 연속 기획을 펼칠 예정이다.

“이런 기사도 이제 효용이 없지 않을까요?” 홀드백 이슈에 대한 취재 중 제작자 A씨가 꺼낸 말이다. 마땅한 지적이다. 지난해부터 홀드백에 관한 수많은 기사와 정부 발표가 있었다. 지난해 12월8일 국회에서는 여야 의원과 영화산업계 주요 인사들이 참여한 ‘한국 영화산업 선순환 질서 복원을 위한 홀드백 법제화 도입 방안 토론회’가 열렸다. 일부 참석자들은 홀드백 법제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홀드백이란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된 후 IPTV, OTT 등 다른 창구에 공개되는 데 걸리는 유예기간을 뜻한다. 이 기간을 지금의 업계 관행보다 길게 규제하여 영화의 극장 상영일수를 늘리면 침체한 영화산업을 살릴 수 있다는 주장이 도입 찬성측의 요지다.

2월에는 영진위가 주요 출자자로 이름을 올린 650억원 규모의 ‘모태펀드 2024 1차 정시 출자사업’이 공고됐다. “영화 분야 투자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정한 홀드백 조건을 준수해야 한다”라는 문구가 포함됐다.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는 2월 내로 홀드백 규제 대상 영화의 제작비 규모, 홀드백 기간 등의 구체적인 조건을 공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껏 관련 공지는 없다. 당장 사태를 해결할 순 없더라도 그동안의 경과를 정리한 후 왜 홀드백 규제가 매듭지어지지 않고 있는지 따져볼 시점으로 보인다. 홀드백 이슈의 난점은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적 어려움과 복합적으로 연관돼 있다.

‘한국 영화산업 위기 극복 정책 협의회’의 난항

문체부와 영진위는 지난해 9월부터 한국 영화산업 위기 극복 정책 협의회(이하 협의회)를 운영하며 홀드백 이슈를 포함한 티켓 객단가, 스크린쿼터제 안건 등을 논의했다. 하지만 “논쟁만 이어지고 원활하게 해결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라는 것이 협의회 관계자 B씨의 후문이다.

협의회 참가자는 크게 네 진영으로 분류됐다. 영화 제작자·프로듀서, 영화 투자배급사, 극장 업계, IPTV 협회였다. 협의회의 목표는 홀드백을 포함한 영화 정책 전반에 대해 참석자들이 자율적인 개선안 협약을 맺는 것이었다. 다만 “어떤 쪽은 고정 참가자가 없어 참석하는 분이 종종 달랐고, 분야마다 가장 원하는 정책이 다르다 보니 좀처럼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B씨). 한자리에 모인 참가자들의 자율 협약 타결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올해 1월부턴 각 이해관계자를 문체부·영진위 차원에서 따로 만나기 시작”(B씨)했다.

협의회의 구성 방식에도 허점이 있었다. 영화산업 정책 논의에 방점을 두다 보니 OTT 업계와 독립·예술영화계 구성원이 없었다. 홀드백 규제의 당사자라 할 OTT 업계의 구성원이 없기에 논의가 지연되는 일은 당연했다. 지난해 9월 공개된 영진위의 ‘2023년 제15차 위원회 정기회의 회의록’(이하 제15차 회의록)엔 이에 대한 영진위 내부의 우려가 담겨 있다. “(협의회에 OTT 인사가 빠진 상황에서 홀드백) 자율 이행 협약을 중요 플레이어들이 모두 동의하는 전제하에 12월로 계획”한다면 “너무 무리한 계획을 보고하는 것 아닌지”(김선아 영진위 부위원장)란 걱정이 현실이 된 셈이다.

이에 문체부는 홀드백 법제화 이슈에 관한 기사가 터져나왔던 2월경부터 국내·글로벌 OTT 업계 인사를 차례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전영문 영진위 공정환경조성센터장은 “3월 말~4월 초에는 홀드백을 포함한 객단가, 스크린 상한제, 최소 상영 보장, 변칙 개봉 방지를 위한 방책 등에 대한 자율 협약의 가시적 성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2014년에 마련된 ‘영화상영기본계약서’의 개정 논의도 함께 추진될 예정이다.

이해당사자들의 이견들

“영화관, 배급사, 제작사 등을 중심으로 한 영화업계는 대체로 홀드백 의무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라는 논지가 여러 기사에서 중론처럼 다뤄지고 있으나 그렇지만도 않다. 홀드백 조정을 통해 극장산업이 부활해야 한다는 큰 방향성엔 대개 공감하는 것이 맞다. 제작자 A씨는 “영화 생태계가 건강하게 회복되기 위해선 홀드백 관련 협약이 잘되고 6개월로 홀드백 기간이 잡히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다만 “그런데 이것도 바람일 뿐이다. 워낙 상황이 복잡하니 의견을 더 낸다고 해도 무의미해 보인다”라고 덧붙이며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했다. “정책으로 홀드백을 규제하는 것은 단순하게만 볼 일이 아니다.”(천만 영화 제작자 C씨)라며 신중론을 펼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중소 규모의 영화는 상영관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고, <서울의 봄>처럼 흥행한 대작 영화는 극장과 IPTV에서 동시 공개돼야 되레 더 비싼 값으로 팔 수도 있다”라는 게 제작사 C씨의 설명이다. 영화로 수익을 내는 방식은 상황마다 천차만별인데 홀드백 기간을 4~6개월 등 일괄적으로 규제하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논지다.

배급 업계의 논리도 비슷하다. 지난해 12월 국회 토론회에서 이현정 쇼박스 영화사업본부장은 “배급사 수익의 70~80%가 극장 수입이니 홀드백 조정으로 극장이 잘돼야 한다는 점엔 당연히 동의”했다. 동시에 홀드백 법제화로 극장이 유일한 수익 창구가 되는 점은 우려했다. 중소 규모 영화를 만들고 극장 외 창구로 유연하게 수입을 내기 어려워진다면 “투자배급사가 <서울의 봄> 같은 대작만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익 창출의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라도 극장을 지켜야 한다면 정부가 펀드 조성 등의 투자 혜택을 주면 좋겠다”(이현정 본부장)라는 게 배급 업계의 절충안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문체부와 영진위는 올해 2월 ‘모태펀드 2024 1차 정시 출자사업’을 공시했다. “펀드가 조성된 후엔 개별 지원 여부를 영진위가 일일이 개입할 수 없을 것”(‘제15차 회의록’ 중 김선아 부위원장)이므로 배급사는 홀드백 규제에 타협할 여지가 적어진 셈이다. 홀드백 규제의 수혜자로 여겨지는 제작·배급·투자사 일부가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니 협의회의 자율 협약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홀드백 법제화는 어렵다

문체부는 “협의회는 애초부터 홀드백의 법제화가 아닌 자율 협약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라고 꾸준히 밝히고 있다. ‘홀드백 법제화’란 단어는 지난해 12월 한국영화관산업협회가 국회 토론회를 주최하며 퍼진 새 의제였다. 그렇다면 영진위는 업계 관계자들의 극심한 이견을 감수하면서도 왜 법제화가 아닌 자율 협약 체제를 고수하고 있을까. 홀드백 법제화의 부작용에 관해 기존 기사들은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단통법) 등을 빗대고 있다. 하지만 홀드백 법제화가 어려운 이유를 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선 한국의 독특한 영화산업 구조를 살펴봐야 한다.

홀드백 법제화의 찬성측은 프랑스의 홀드백 법제화 예시를 들며 한국에서의 입법을 주장하고 있으나 프랑스와 한국의 영화산업 및 미디어산업 구조는 완전히 다르다. 국회 토론회에 참석했던 황승흠 국민대학교 법학과 교수에 따르면 “프랑스는 애초부터 민간 방송사 위주의 시장이 형성된 관계로 방송·영화 산업계의 논의와 미디어 홀드백이 수월하게 진행”됐지만 “국영방송 위주의 시장으로 출발해 통신사 기반의 IPTV와 OTT가 강세인 한국에선 미디어업계 전반의 이권 경쟁”이 훨씬 거셀 수밖에 없다. OTT를 규제할 법안마저도 없다. 이에 홀드백 법제화를 추진하기 위해선 영진위뿐 아니라 방송통신위원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이 개입해야 하며 이로써 “걷잡을 수 없는 미디어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범위를 좁혀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만 보더라도 홀드백 법제화엔 난점이 많다. 프랑스와 달리 영화산업의 수직계열화가 공고화된 한국에서는 대작 영화의 스크린독과점 행태가 고질적인 문제로 꼽히고 있다. “스크린상한제가 없는 이상 다양한 영화를 길게 틀어 수익을 내고자 하는 홀드백 전략이 한국의 영화 배급·상영 형태와 원론적으로 맞지 않을 수”(황승흠 교수)도 있다. 홀드백 문제의 해결을 위해선 스크린독과점과 스크린상한제 등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 전반을 건드려야 하는 셈이다. 홀드백 법제화가 급하게 이뤄진다면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OTT로 직행하는 경우가 생기는 등 궁극적으론 극장마저 손해를 볼 수” 있기에 “느슨한 자율 협약을 통해 4~5년의 안정 기간을 거쳐야 한다”라는 것이 황승흠 교수의 분석이다.

누구만의 잘못도, 누구만의 몫도 아니다

홀드백의 자율 협약과 법제화 모두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영화계가 바라보는 곳은 영진위다. 한국은 프랑스처럼 민간 산업 기구가 제대로 구성돼 있지도 않고, 일본처럼 제작위원회가 개별 작품마다 홀드백 기간을 유연하게 설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영화의 투자, 제작, 배급 단계를 총괄할 민간 논의체가 없으니 독립·예술영화에 개별적으로 예외를 적용하는 등의 핀포인트 전략을 펼치기도 어렵다. 이에 지난해 국회 토론회에서 정상진 엣나인필름 대표는 “대신 한국엔 영진위라는 독특한 기구가 있다”라며 영진위의 중재자 역할을 강조했다. 황승흠 교수 역시 “전세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자국의 흥행 데이터를 가진 영진위가 홀드백 기간에 대한 정확한 지침과 규제 모델을 더 적극적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전영문 센터장도 “업계간 이해관계가 첨예한 정책을 추진하는 데 영진위의 구심점 역할이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영진위에 모든 짐을 떠맡기기엔 무리란 목소리도 있다. 지난해 국회 토론회에서 최정화 당시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대표는 “지금의 개봉·배급 방식에 영화인들의 통렬한 반성이 필요함을 부정하진 않는다”라고 밝힌 바 있다. 홀드백 규제가 시급해질 정도로 한국의 영화산업이 어려워진 것은 한국영화계의 자충수란 뜻이다. 이전부터 홀드백 기간을 60~90일로 제한하는 업계 관행은 있었으나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거치며 모두 깨져버렸다. 2022년 여름에 <한산: 용의 출현>과 <비상선언>이 개봉 한달 만에 쿠팡플레이 독점 공개를 선택하면서 홀드백 기간의 암묵적 관행은 점차 유명무실해졌다. 전영문 센터장은 “한국의 영화산업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무너졌고 회복은 가장 더디다”라며 “영화산업 재구조화에 대한 활발한 논의와 정책이 없다면 구조적 위기는 심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리하자면 영화계 관계자들은 홀드백 등 영화산업의 어려움에 대해서 영진위의 주도적인 문제 해결을 바라고 있다. 한편 영진위와 문체부는 영화인들의 의견부터 수렴하기 위해 협의회를 구성했지만 자율 협약이 지연되며 난감함을 표하고 있다. 게다가 영진위는 기획재정부와 문체부 등 정부의 개입에 의해 완전히 자율적인 예산 편성이나 사업 진행을 추진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씨네21> 1424호, 예산은 줄고 말할 곳은 없다. 2024년도 영화진흥위원회 예산 논란). 한마디로 모두가 마땅한 타개책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올해는 “한국영화의 미래를 준비하는 중요한 분기점”(전영문 센터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오는 4월경은 특히 중요한 변곡점이 될 예정이다. 앞서 말했듯 홀드백 이슈를 포함해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적 문제 전반을 다룬 협의회 자율 협약 내용이 발표된다. 올해 영진위의 영화제 지원사업 결과가 공고되며 정부 정책에 대한 영화인들의 아쉬움이 증폭될 시기이기도 하다. 차후 문화산업 정책의 판도를 바꾸게 될 총선 역시 한발 앞으로 다가와 있다. 잠시 숨을 고르고 한달 뒤의 미래, 동시에 한국 영화산업의 먼 미래를 준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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