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에 묻힌 보물을 감지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남자, 아르투(조시 오코너)는 열차를 타고 이탈리아의 어딘가로 돌아온다. 아르투는 연인 베니아미나(일레 야라 비아넬로)를 찾는 중이다. 연인의 어머니인 플로라 부인(이사벨라 로셀리니)은 곧 베니아미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아르투를 다독이고, 그는 이내 보물을 찾기 위해 동료들과 만나 합류한다. 계절에 맞지 않는 얇은 흰옷을 입은 아르투는 외진 시골 공터의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에서 간신히 추위를 피하고 쪽잠을 잔다. <행복한 라짜로>에서 평온한 성자 라짜로에 가까운 인물인 아르투는 남루한 행색으로 안온과 안락과는 거리가 먼 고행자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네 번째 장편 <키메라>는 아르투의 여로를 통해 삶과 죽음을 아우르며 태양 아래의 지상과 지하 세계로 우리 손을 잡아 이끈다.
현대의 신화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영화에 깃든 모종의 신비를 이해하려면 그의 필모그래피를 짚어보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영화는 그저 신비롭다고 하기에는 그 세계 안에 현실의 부정(不正)이 있고, 그래서 냉랭하다고 하기에는 이상(理想)의 고결함이 있다. 누군가의 영화에서 격정적 대립을 불러올 수도 있는 양극단의 가치는 로르바케르의 영화 안에서 극적으로 치달아 충돌하지 않는다. 이 둘이 충돌하려야 충돌할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로르바케르의 영화에서 부정은 너무나 큰 세상을 뜻하기 때문이고 이상을 품은 마음은 너무도 작은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로르바케르는 속계의 저 구석에 웅크려 자리한 성스러움을 가져와 이야기를 만든다. <천상의 육체> <더 원더스> <행복한 라짜로>의 소녀들과 성자는 그렇게 카메라 앞으로 끌려나오지만 이들은 세상과 공동체의 억압에 거칠게 맞서는 자들이 아니다. 또 그의 영화에서 흉포한 세상도 뒤늦게 서서히 본모습을 드러낼지언정 그들을 세차게 덮쳐오지도 않는다. 그래서 한편의 영화 속에 억압과 고통의 잔잔한 공존, 어쩌면 조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법한 기현상은 로르바케르 영화 안에서 가능하다. 한줌의 환영도 없는 리얼리즘에 가까웠던 <천상의 육체>에서 <더 원더스>와 <행복한 라짜로>로 나아가며 그의 영화는 마술적 리얼리즘 양식으로 다가선다. 날것의 현실에서 환상으로 조금씩 발걸음을 옮길 때에도 노동 착취와 신분제 같은 부정한 체제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는 한자리에 놓일 수 있음을 예의 전작으로 드러내 보인다.
그러니 로르바케르의 영화 안에서 어느 하나와 또 다른 하나의 양립은 <키메라>에 이르러 갑자기 발현된 특성이 아니다. <키메라> 또한 세속과 낭만의 두 지대에 발을 걸치고 있는 영화다. 도굴꾼 무리인 톰바롤리를 이끌어 땅속에 묻힌 고대 유물을 찾아내는 아르투는 까마득하게 먼 과거의 시간과 교감하는 자로 그려진다. 그뿐 아니라 내리쬐는 햇볕에 물든 지상의 낮 동안에도 아르투는 죽은 자의 세계를 간절하게 그린다. 연인 베니아미나와 유물은 신성함으로 이루어진 낭만의 세계에 속해 있다. 베니아미나와 유물을 향한 순수한 사랑은 아르투의 배금주의와 굳게 결연한다면 세속은 자본의 논리 아래에서 무엇과도 교감하지 못하는 아둔함과 난폭함, 물질주의와 단단히 결속한다. 바다와 하늘에 발전소와 공사 장비가 끼어들어 혼탁해지고 만 풍경처럼 <키메라>는 낭만과 세속이 조용하게 뒤섞인 세계다.
<키메라>는 로르바케르가 의도한 신비의 의미를 열심히 설명하는 영화가 아니다. 다만 어느 성자의 비극을 잔혹한 동화로 전했던 <행복한 라짜로>와 동일 선상에서 <키메라>는 사랑과 고대의 시간을 따르는 한 남자를 통해 이야기를 전하려는 현대 신화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키메라>가 종래와 같이 진지하고 무거운 표정으로 영화를 이어갈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면 곤란하다.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필모그래피에서 가히 이례적으로 여겨질 만큼 이 영화에는 부드러운 유머와 장난스러운 몸짓, 따뜻한 사랑의 가능성이 끊임없이 물결치며 흐르고 있다.
사랑과 역사의 고고학
영화의 역사는 실증에서 시작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신화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상기하자. 그렇다면 <키메라>가 전하려는 세속을 초월한 순수한 사랑의 메타포로서 역사와 고고학은 그리 낯설지 않은 방식이다. 지하 깊숙이 묻힌 고대 유물과 그것을 감지하는 땅 위의 남자, 물질세계를 상징하는 지상과 영원을 상징하는 명부 세계는 여러 동물이 모여 한몸을 이룬 그리스신화 속 키메라의 상징을 경유하여 한데 접붙는다. 아르투가 경애해 마지않는 고대 에트루리아 벽화는 영화 속에서 현대의 사진술과도 빗대어 보인다. 영화의 초반에 두 아이가 뷰 마스터에 한쪽 눈을 대고 버튼을 짤깍댄다. 그럴 때마다 스크린에 드리워진 프레스코 벽화는 다음 벽화로 이어지며 오프닝크레딧을 장식한다.
또 이 영화에는 유물의 시점이 드러나는 장면이 나오면서 짙은 반향을 남기기도 하는데 <키메라>가 감추고 있는 현대 신화의 진정한 비극은 여기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돈에 현혹되지 않는 아르투의 담담한 행보, 어쩌면 시작할 수도 있었던 사랑, 달뜬 기분으로 맞았던 여름 저녁의 축제와 산들바람을 모조리 뒤로하고 로르바케르는 부드러움으로 둘러 감싼 비극을 건네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부정한 체제와 신비가 공존하는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현대 신화는 예정된 불안을 부추겨 못내 의심하도록 만든다. 저 아래 깊은 곳에 파묻힌 순수는 지상의 살아 있는 자들이 결코 마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한숨 섞인 믿음으로 말이다.
<키메라> 포스터 속 타로 카드 ‘매달린 남자’의 의미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서 <키메라>가 처음 공개됐을 당시에 영화 포스터는 타로 카드의 열두 번째 메이저 카드 ‘매달린 남자’를 모티프로 삼은 버전이었다. 정방향과 역방향을 구분하는 타로 카드에서 유일하게 정방향의 그림이 위아래가 뒤집힌 것처럼 보이는 ‘매달린 남자’는 스스로 거꾸로 매달려 고행하는 성자의 고통스러운 육체와 평온하게 빛나는 얼굴의 대비를 담은 카드다. 그 의미는 고통과 인내, 희생하는 사랑과 새로운 시각 등을 담고 있다.
영화 <키메라>의 포스터 속 거꾸로 매달린 남자는 아르투가 대신한다. 원래의 타로 카드와 달리 아르투는 영화에서와 꼭 같은 흰옷을 차려입고 또 다른 성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평온한 얼굴을 표현하던 빛 대신 포스터에는 금화 몇닢이 그려져 있고 다른 도굴꾼들인 톰바롤리가 그 금화를 탐하듯 바라본다. 아르투의 시선은 금화를 향해 있지 않다. 그의 발끝은 지상에 묶여 있지만 머리는 지하를 향해 있는 듯한 모습이다. 땅을 향한 머리는 그가 물질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숭고한 정신적 세계를 추구하는 자라는 뜻을 나타낸다.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이 일찍이 밝힌 것처럼 ‘매달린 남자’를 모티프로 삼은 이유는 그것이 상하가 역전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고대 유물이 잠든 장소에서 과거의 유산과 교감하는 아르투를 표현하기 위해 <키메라>에서는 상하가 반전된 장면이 여러 번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