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을 인간화하는 존재다. 영화라는 매체에 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 얼굴로서의 스크린, 눈으로서의 카메라와 같은 개별 비유만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와 영화를 통째로 부딪쳐 이론화한 시도도 있다. 토마스 엘제서와 말테 하게너에 의한 이러한 시도는 영화의 물질성이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현상이 영화와 신체가 맺어온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한 유보적 질문으로 끝맺는다. <로봇 드림>과 <가여운 것들>에서 두드러진, 질료로서의 몸을 마주하며 저자가 미완으로 남겨둔 질문을 이어보고 싶어졌다. <로봇 드림>에서 분해되고 재조립되는 고철의 몸과 <가여운 것들>의 두뇌 이식 수술 이후 퇴행한 성인 여성의 몸은 극단에서 서로를 향한다. 단단한 철을 표현했음이 분명하나 실제로는 점과 선으로 이뤄진 그림에 불과한 몸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에 가닿는 동안, 실존하는 배우의 몸은 로봇의 몸을 희구하며 인간으로부터 멀어지려는 것 같다.
훼손의 특권, <가여운 것들>
<가여운 것들>의 벨라 캐릭터를 묘사할 때, 종종 어린아이의 면모(송형국, <씨네21> 1450호 프런트 라인)이나 공백(홍수정, <씨네21> 1450호 크리틱)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것이 불만족스럽다. 캐릭터의 모든 특성이 사라진 뒤에도 특성 없는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만큼은 사라지지 않는다. 배우가 완전한 무의 상태를 재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캐릭터에 관해 논한다면 배우의 현존을 간과하는 것이 된다. 차라리 <가여운 것들>을 두고 에마 스톤의 캐릭터 쇼라거나 패션 화보라고 평하는 것이 더 영화의 본질을 건드리는 것 같다. 무엇보다 뇌 이식을 통해 다시 태어난 벨라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새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그는 부유한 의학자이자 교수인 백스터의 보호 속에서 풍족한 삶을 누리는 유산자다.
벨라는 백스터가 준 지참금은 물론, 덩컨의 돈까지 홀랑 날려버린 뒤에라야 만족한다. 그가 무언가를 잃었다는 건, 곧 무언가를 가진 상태였다는 뜻이다. 가진 것을 모두 잃은 탕진이 누군가에게는 추락이지만, 벨라에게는 선택이다. 그러므로 벨라의 여정을 ‘속박에서 자유’로 정리하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요약이다. 떠나겠다고 선언하는 벨라는 백스터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위협을 통해 기어코 허락을 받아내는 쪽이다. 벨라의 특성은 아이다운 천진함이라기보다는 난폭함과 포악함에 더 가깝다. 행동 특성을 놓고 볼 때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캐릭터 중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의 앤 여왕이 벨라와 가장 유사하다. ‘오소리 같다’는 사라의 놀림에 어린아이처럼 훌쩍이거나, 통풍의 고통으로 울어대며, 애꿎은 문지기에게 시비를 거는 앤의 철없는 모습이 요르고스 란티모스식 아이다움의 실체다. 무엇보다 벨라와 앤은 마음대로 해도 처벌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존재다.
덩컨과 결별하고 지닌 돈을 모두 날린 벨라가 프랑스의 사창가로 흘러드는 서사의 흐름은 그에 대한 처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팜므파탈 처벌 서사를 패러디한다. 재현물 속에서 팜므파탈은 대개 유혹과 쟁취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때 처벌은 죽음이나 타락으로 귀결된다. 사창가는 타락을 표시하는 주된 재현 장소다. 무산자에게 사창가는 덩컨의 말처럼 타락한 여자가 갈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이지만 벨라에게는 그렇지 않다. 첫 번째 성매매 이후 눈을 빛내며 경험의 중요성을 말하는 벨라에게 성매매는 노동이 아니라 체험이다. ‘여자들이 손님을 선택하게 하자’는 주장은 기발하기는 해도 벨라가 특수한 인간임을 증명할 뿐 보편적인 가치를 설파한다고 보긴 힘들다. 이를 두고 페미니즘을 말한다면 그것은 영화가 교묘히 은폐한 계급에 관해 눈감는 꼴이 된다. 어쩌면 요르고스 란티모스조차 페미니즘이 언급되는 현상에 관해 겸연쩍어하거나 우스꽝스럽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벨라의 캐릭터를 논할 때 이상하리만큼 언급되지 않지만 중요해 보이는 지점은 그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뇌사태에서 제대로 걷거나 말하는 기능을 상실한 채 깨어난다. 벨라가 아이의 상태로 퇴행한 뒤 다시 자라는 과정은 재활치료 과정에 가깝다.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영화에서 행한 것은 단순히 신체를 훼손하거나 자른다기보다는 절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한 장애의 전환적 활용이 그의 영화 세계가 은밀히 추구해온 목적처럼 보인다. 그가 훼손한 것은 신체라기보다는 장애가 가진 무거움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는 누군가 일부러 선택하지 않는 장애를 선택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하나의 패션처럼 몸에 휘두른다. 장애는 몰개성 시대에 개성의 징표로서 가진 자들의 악취미로 거듭난다. 돼지의 얼굴과 새의 몸을 결합한 기형적인 형태의 동물들은 잔인한 실험의 결과물이기보다 개성을 구하는 사회에 대한 패러디에 가깝다. 물론 장애는 재현의 영역에서조차 대부분 한정되거나 전형적인 방식으로만 활용되어왔기에 이러한 시도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이를 현실에서의 장애인 권리와 연관 짓는다면 난센스일 것이다. 다만 획일화된 사회에서 부를 축적한 자들이 개성을 위해 나아가는 하나의 자리로서 장애가 호명된다는 것은 당장의 가치판단을 요구하기보다는 더 지켜봐야 할 징후적 현상처럼 보인다.
머리의 특권, <로봇 드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벨라가 거침없는 선택을 해나가는 동안, 로봇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한다. 도그의 반려 로봇으로 안락한 생활을 누리던 로봇은 도그와 함께 물놀이를 즐긴 직후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게 된다. 이미 날이 저물고 모두가 떠나버린 상태에서 홀로 애쓰던 도그는 다음날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며 로봇을 남겨두고 떠난다. 그러나 그날 이후 해수욕장이 곧바로 폐장에 들어가며 둘은 영영 이별하게 된다. 해변에 홀로 남겨진 로봇은 점점 자신이 가진 것을 잃어간다. 토끼 무리에 의해 한쪽 다리가 잘리고, 고물상에 팔려 산산이 분해된다. 몸을 잃은 얼굴은 서서히 눈감으며 정지된다. 이후 새로운 주인 라스칼을 만나 재조립되어 다시 깨어나지만, 그 순간과 이후에도 로봇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없다.
하지만 <로봇 드림>은 의심의 여지없는 선택의 영화다. 로봇은 선택한다. 생각으로, 상상으로, 꿈꾸기로. 움직일 수 없는 가운데 로봇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이동한다. 그의 이동은 도그와 함께 살던 집으로, 도그와 함께 봤던 영화 속으로, 그리고 마침내 도그에게로 향해간다. 이 모든 순간은 무언가가 부서지고 깨어지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실현되지 않는 선택들은 감정의 매개로 응축된다. 불구의 신체는 영화관에 붙박인 관객을 반영하는 의미가 있기에 영화가 즐겨 묘사한 이미지이며, 해변에 홀로 남겨진 로봇의 외로움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자도 영화관의 관객이다. <로봇 드림>에서 로봇이 스크린 바깥으로 탈출하는 시퀀스는 불구의 신체로 영화적 탈출구를 상상하며 관객과 동화된다.
로봇에 감정적으로 동화되는 데 있어 무엇보다 얼굴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로봇이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존재임을 믿게 만드는 건 바로 얼굴이다. 세상과 작별을 앞둔 이의 몸이 수의로 가려진 뒤에도 얼굴만은 마지막까지 작별을 위해 남겨지듯, 얼굴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존재를 상상하고 증명하는 기본적인 토대다. 로봇의 얼굴은 몸이 분해되고 재조립되는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고 남겨진다. 얼굴이 보존되는 한, 다른 몸에 덧붙여지더라도 그는 바로 그 로봇일 수 있다. 해변에서 팔과 다리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도 그의 얼굴만은 살아, 눈의 언어와 입술의 날갯짓으로 소통한다.
얼굴의 보존을 통한 로봇의 동일성은 재조립 이전과 이후의 삶을 나란히 견주어볼 수 있는 토대다. 도그의 반려 로봇일 때 그는 하나의 상품이자 귀한 선물이었다. 반면 라스칼에게 발견되었을 때 그는 버려진 고철 더미에 불과했다. 상품 가치의 하락은 그가 마주하는 주인의 계급성으로 표출된다. 라스칼은 반려 로봇 회사의 예상 소비자 목록에서 누락되었을 것 같은, 생계를 위해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는 전방위의 노동자다. (영화에는 마치 운명처럼 라스칼이 지하철 계단에 내려가기 직전 도그와 함께 있는 로봇을 돌아보는 장면을 부감으로 짧게 삽입해놓았다.) 로봇을 작동시키기 위해 도그가 ‘조립’을 했다면, 라스칼은 ‘수리’를 한다. 라스칼은 쓸 만한 것을 구하기 위해 쓰레기통 근처를 드나들거나, 물건을 고치고, 건물 내부를 페인트로 칠하는 등의 일을 한다. 반면 도그가 여가 활동과 가사 외에 노동하는 모습은 한 차례도 그려지지 않는다. 도그는 로봇과 함께, 혹은 다른 친구들과 롤러스케이트, 눈썰매타기, 연날리기 등 다양한 실외 여가 활동을 한다. 그에 따라 도그와 함께일 때 로봇은 곁에서 함께 여가 생활을 즐기면 그만이었지만 라스칼과 함께 있을 때는 노동을 거들기도 한다.
라스칼을 만난 뒤 로봇이 삶이 굴절되는 양상은 원작 그래픽노블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은 지점이다. 원작에서는 새로운 반려자와 전과 비슷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으로 표현될 뿐, 다리를 절룩이며 노동하는 모습을 보여준 컷은 없다. 로봇의 블루칼라 계급으로의 이동은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 꿈과 깨어남을 반복하는 이야기의 슬픔을 고조하는 장치일 수 있다. 그러나 라스칼과의 삶은 이동일 뿐 추락이 아니다. 로봇이 도그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던 중 목격한, 자동차 안에서 아이들로부터 괴롭힘당하는 로봇처럼 행복과 불행은 계급과는 무관하다. 라스칼의 최애곡의 제목처럼 그의 삶 역시 행복하다. 라스칼의 옥탑방은 야외 바비큐 파티를 원 없이 할 수 있는 곳임을 물론이고 무엇보다 커다란 불꽃놀이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명당이다.
교차계로서의 프랑켄슈타인
육체를 깁는 아날로그 방식의 고전적 프랑켄슈타인은 사고와 기억과 같은 다양한 차원에서 재조합을 상상케 하는 방식으로 이동했다. <가여운 것들>에서 기워진 흔적이 얼굴 전체를 뒤덮은 백스터가 고전적인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키는 가운데, 후세대 벨라의 경우 이식과 절합의 흔적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숨겨져 있다. 처음에는 뒤뚱거리며 걷는 모양새와 더듬거리는 언어, 막무가내의 행동과 같은 교정이 필요한 장애를 지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같은 특질이 모두 지워진 채 평범해진다. 반면 <로봇 드림>에서 로봇의 망가진 몸은 온전히 복구되거나 숨길 수 없다. 길이가 맞지 않던 다리를 꼭 맞는 길이의 다리로 교체한 뒤에도 완전히 같지 않음은 여전히 두드러진다.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가져온 몸은 본래의 몸보다 가로가 길어 몸의 균형에서 어긋나 보이기도 한다.
분리 접합된 몸의 흔적을 더듬는 데서 나아가 더 들여다보고 싶은 지점은 분기하는 시간을 통과한 몸의 반응이다. 로봇의 상상은 곧 실제의 몸과 상상의 몸 사이에서 일어난 분리와 접합이며, 그 가운데서도 로봇이 도그를 향해 달리는 마지막 질주는 상상으로 귀결된 다른 장면에 비해 유독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다른 장면들은 로봇이 실제로는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한 상상이었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로봇은 적어도 신체적 제약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그에게 달려가기를 망설인다. 여기에 이런저런 이유를 덧붙일 수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풀이하면 곧바로 초라해지는 것들이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도그와 로봇의 시간을 보여주는 몽타주는 시간과 정신의 차원에서 프랑켄슈타인의 현현을 표시한다. 둘은 서로 떨어진 자리에서 같은 춤을 춘다. 도그는 거리에서, 로봇은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집에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음악은 <September>에 맞춰 함께 춤을 추던 그 순간으로 데려간다. 영화는 서로를 볼 수 없지만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둘의 춤을 나란히 붙인다. 그 장면이 감동적인 것은 둘 사이를 수직으로 가르며 기워진 선 때문이다.
로봇은 인간의 특권에 가까웠던 늙고 병들고 소모되는 신체의 차원을 모방하는 동시에, 입력된 것을 반복 송출하는 데서 벗어나 입력된 것을 변형하거나 입력되지 않은 것을 상상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가여운 것들>에서 모든 대조적인 것의 혼종으로 벨라를 그리며 여자와 아이, 로봇과 인간, 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학자와 괴물 등을 사랑 없이 절합할 때, <로봇 드림>은 절합의 본질인 사랑을 되살리는 꿈과 깨어남의 반복을 보여준다. 토마스 엘제서와 말테 하게너가 디지털시네마의 전복을 말할 때 언급한, ‘꼬리가 개를 흔드는’이라는 표현처럼, 가능과 불가능 사이 분리된 선택과 시간이 전체로서의 감정을 견인한다. 그러므로 영화를 마주한 누구라도 사랑에 관해 말하기를 참을 수 없게 된다. 사랑했던 이와의 헤어짐은 중요한 부분 하나가 떨어져나감을 의미한다. 주요 부속품을 상실한 채 ‘나’임을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채로 남는 것. 새로운 누군가와의 만남은 새로운 부속품을 장착하게 됨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장애를 입은 채, 어색했던 부분이 익숙해질 때까지 벌어진 틈을 조금씩 기워나간다. 누군가를 사랑해본 이들은 모두 프랑켄슈타인이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이전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게 됨을 의미한다. 지난 이에 대한 죄책감을 애써 모른 척하며. 그래도 심장 한가운데에 언제라도 울려 퍼질 노래 하나쯤 남길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노래를 알아챌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