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편 연출작으로 각국의 영화제에 초청되는 영광을 누린 정지혜 감독은 “작았던 영화가 많은 관객의 공감을 흡수해 커진 상태에서 정식 개봉해 행복하다”고 전했다. <씨네21> 촬영 차 오랜만에 서울에 온 덕분에 그동안 서울 배급사에 있어 사진으로만 봤던 제17회 로마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트로피를 드디어 만져볼 수 있게 됐다며 기뻐하기도 했다. <정순>을 만들기 위해 차린 ‘시네마루’가 있는 부산에서, 정지혜 감독은 공동 운영자인 <정순>의 정진혁 촬영감독과 지역에서 영화 만드는 일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커진 영화만큼 부쩍 성장했을 90년대생 영화감독과 함께 첫 장편에 관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눴다.
- 고향인 경남 양산시에서 대부분 촬영했다고. 양산 신문에 자랑스럽게 실린 기사를 읽었다.
= 양산에 사시는 부모님과 지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완성하지 못했을 거다. 고등학생 때까지 살았던 익숙한 동네다 보니 적절한 장소를 누구보다 빠르게 찾아낼 수 있었다. (웃음) 양산이 산으로 둘러싸여서 폐쇄적인 동시에 안정감을 주는데 이야기적으로도 잘 어울렸고. 코로나19가 한창 심할 때라 촬영 1~2주 전까지 주 로케이션인 식품 공장이 섭외가 안돼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양산의 ‘부산 어묵’ 공장에서 촬영을 허락해준 덕분에 극적으로 일정대로 진행할 수 있었다.
- 실제 식품 공장에서 일한 경험과 디지털성범죄에 관한 논문을 읽은 기억을 토대로 <정순>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고 알고 있다. 혹시 정순(김금순)의 실존 인물이 있었나.
= 그렇진 않았다. 엄마가 일했던 공장에 나도 1년간 다녔다. 그곳에서 중년 여성 노동자들과 12시간씩 붙어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그 이모들과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단 마음이 먼저 생겼다. 그러던 차에 디지털성범죄에 관한 시나리오를 준비하던 대학 선배를 도울 기회가 있었다. 조사를 하면서 디지털성범죄의 가해자 중 중년 남성이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그동안 이 이슈를 왜 젊은 세대의 문제로만 여겼을까 하는 자각이 들었고 주변의 중년 세대에게도 자문을 구했는데 그들도 나와 같은 의견이었다. 이런 인식으로 인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중년의 피해자가 많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쯤 <정순>을 쓸 수 있었다.
- 정순의 피해 영상을 직접 노출하지도, 영상을 돌려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지도 않는다. 감독의 고민이 깊었을 거란 생각이 드는 연출이다.
=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정순의 피해 사실을 어떻게 보여줄지가 최대 난제였다.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은 노래였다. 영수(조현우)가 든 카메라 앞에서 노래 부르는 정순을 먼저 보여준다면 정순의 노랫소리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영상을 보여주는 효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인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관한 논의도 정진혁 촬영감독과 많이 했다. 유포 사전 전후로 극이 1, 2부로 나뉜다면 1부는 정순의 평범한 하루하루를 멀리서 지켜보는 느낌으로 진행하고, 2부부터는 흔들리는 정순에게 관객이 공감하고 감정이입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김금순 배우에게 바짝 다가가 핸드헬드로 찍었다.
- 그럼에도 2부에서 싱크대 앞에 선 정순이 “엄마”를 부르짖는 장면에선 거리를 두었다.
= 배우의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땐 그 흐름을 끊지 말자는 게 촬영감독과 세운 또 다른 계획이었다. 리딩 때부터 이 신이 감정적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해 잘 찍고 싶었는데 실제 슛 들어갔을 때 금순 배우의 표현이 뭐랄까, 정순만이 할 수 있는 무엇이었고 그 감정을 방해할 수 없어 정순을 멀찍이 지켜보던 딸 유진(윤금선아) 정도의 거리에서 롱테이크로 촬영했다. 여담으로 “엄마” 대사는 금순 배우의 애드리브였다. 정순이 딸 앞에서 처음으로 진심을 토해내는 그 순간의 정순에게 엄마가 필요할 것 같다는 의견을 금순 배우가 주었다. 다시 생각해도 나보다 정순을 더 잘 아는 배우가 완성한 신이다.
- 운전을 할 줄 알면 원하는 방향으로 직접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정순이 삶을 재건할 방법으로 운전을 선택하는 게 필연적으로 느껴졌다.
= 정순이 운전면허 실기시험을 보는 장면을 그래서 넣었다. 늘 유진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수동적으로 직장에 옮겨졌던 정순이 운전대를 잡고 주도적으로 자기 길을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더 먼 곳을 꿈꿀 줄 아는 정순을 내가 보고 싶기도 했고.
- 단편 <면도> <매혈기> <버티고> 때부터 <정순>까지 사회의 편견과 사각지대에 놓인 개인을 집중적으로 관찰하는 작업을 해왔다. 이러한 주제와 대상에 왜 관심을 두는지에 관해 생각해본 적 있는지.
= 시나리오 전공 수업에서 “아이러니를 항상 찾아야 한다”라는 교수님의 말씀이 뇌리에 박힌 뒤부터는 어울리지 않는 키워드를 조합해서 이야기를 쓰는 편이다. <면도>는 면도와 여자를, <정순>은 디지털성범죄와 중년을 붙여봤는데 두 단어가 부딪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내가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를 고민했다. 이 두 개념은 공존할 수 없다는, 사회가 정한 어떤 틀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자기반성적인 행동인지는 모르겠으나 사각지대에 놓인 개인들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연출자로서 해봐야겠다는 충동이 인다.
- 준비 중인 차기작과 올해 계획을 들려준다면.= 요즘 지적장애 부모를 둔 여중생의 이야기를 쓰는 일에 푹 빠져 있다. 소녀가 자기가 갈망하는 완전함에 이르려고 고군분투하는 일종의 성장담이다. <정순>과 달리 밝은 코미디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올해 안에 시나리오 작업을 끝낸 뒤 내년에는 촬영에 들어갔으면 싶다. 사적으로는 면허증을 손에 쥐는 게 목표다. 주인공에게 면허를 따게 해놓고 정작 난 겁이 많아 면허가 없다. (웃음) 차기작 초고를 완성할 즈음엔 운전대를 꼭 잡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