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48년 무렵 제주도에선 4·3 사건이라 불리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념 투쟁이란 명목 아래 수만명의 무고한 제주 도민들이 공권력에 학살당한 사건이었다. 역사적으로도 유례없는 정부의 민간인 학살이었음에도 여전히 그 진상은 곳곳에 숨겨져 있다. 이에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4·3 사건 당시 전국 각지의 수형소로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겪었던 다섯 할머니의 증언을 기록한다. 아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76년 전 어릴 적의 일을 회고하는 것인데도 그들은 당시의 아픔과 치욕들을 생생하게 내뱉는다. 영화는 그들의 음성을 별다른 기교 없이 똑바로 보고 듣더니 종종 제주의 자연에 눈을 돌린다. 해저 동굴, 눈 내린 설원, 푸르른 녹음이 장면에 스친다. 그러나 이 자연을 눈여겨본다면 이것들이 일제의 탄압으로 만들어진 인공 동굴이라거나 4·3 사건 피해자들이 몇주를 굶으며 버틴 산 중턱임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아픈 역사가 새겨진 제주의 시공간이 천천히 스크린을 뒤덮는다.
2000년대 초중반부터 한국 독립다큐멘터리 진영의 한축을 맡아온 다큐멘터리스트 김경만 감독의 신작이다. 장편 <미국의 바람과 불> <지나가는 사람들>을 비롯해 <바보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각하의 만수무강> 등의 단편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한국의 역사에 천착하고 있던 그가 제주 4·3 사건에 눈을 돌려 9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그의 작업 궤적에서도 눈에 띄는 결과물이다. 그간의 장편에선 아카이브 푸티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편찬다큐멘터리의 형식미를 강조했고, 단편에선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찍는 직관적인 방식도 구사했다. 이번엔 실존 인물들의 음성과 현재의 풍경을 교차하며 과거를 상상하게 만든다. 실제 4·3 당시의 영상이 펼쳐지지 않을지라도 관객은 적극적인 상상력을 통해 역사의 한복판에 참여하게 된다. 표면적으론 전작들보다 한층 차분해 보이지만, 관객의 내면은 여전히 바삐 돌아가야 하는 뜨거운 다큐멘터리다.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수상했고 제18회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청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