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차이콥스키의 아내’, 빛의 블로킹으로 소묘한 여인의 초상, 양처(良妻)를 욕망하다
2024-05-01
글 : 정재현

19세기 말 러시아 귀족 영양 안토니나 밀류코바(일리오나 미하일로바)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인 표트르 차이콥스키(오딘 런드 바이런)에게 반한다. 사랑에 빠진 안토니나는 포기를 모르고 차이콥스키에게 구애한다. 수차례 고백을 거절한 차이콥스키는 결국 “담담한 사랑, 형제의 우애 같은 사랑도 좋다면 결혼하자”며 안토니나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결혼식 이후 안토니나는 남편의 세계에 섞이지 못하고 겉돈다. 여성은 남성과 분리된 공간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고 투표권조차 가질 수 없던 성차별적 러시아 사회도 작용했지만, 차이콥스키는 언제나 안토니나를 방치한 채 어린 남성들 사이로 사라질 뿐이다. 차이콥스키가 작품 개발과 요양을 핑계로 집을 떠난 어느 날, 안토니나는 시누이 사샤(바르바라 시미코바)로부터 차이콥스키는 ‘여자가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안토니나는 차이콥스키로부터 끝내 이혼을 통보받는다. 그러나 안토니나는 남편과 절대로 헤어질 생각이 없다. 누가 뭐라 해도 영원히 차이콥스키를 추앙하는 아내로 남고자 한다.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시대적 한계로 인해 남성 예술가에 가려 아내, 누이 등으로 불릴 수밖에 없던 여성 예술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당시 여성들이 처한 사회적 제약이나 걸출한 예술을 감별하는 안토니나의 심미안이 영화 속에서 그려진다. 하지만 영화는 그보다 사랑을 보답받지 못하는 관계 속에서 점차 쇠약해가는 한 여성의 초상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안토니나의 불안은 여러 장치를 통해 영화적으로 표현된다. 열차 대합실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안토니나의 시공간을 블로킹과 편집을 통해 전환하거나, 안토니나가 수많은 남성 댄서들과 발레 음악에 맞춰 행위예술을 펼치는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안토니나의 정욕과 혼란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또 다른 요소는 조명이다. 무채색에 가까운 영화에서 유일하게 채도 높은 붉은색이 등장하는 몇 순간, 캐릭터의 심리에 따라 변하는 일조량 등이 안토니나의 심리와 맞물어 특히 세공된 듯한 인상이다. <스튜던트> <레토> 등으로 국내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신작이며 2022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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