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지킬 건 환상만 남은 세대의 반짝이는 비명, <모르는 이야기>
2024-05-15
글 : 김신

얼마 전까지 나는 한 대입 학원에서 자율학습을 감독하는 일을 했다. 한국 입시 산업의 핵심에 위치한 그곳에서 나는 매시간 학생들의 핸드폰 제출 여부를 체크했고, 학생이 자습실에서 졸거나 인터넷강의 이외의 용도로 태블릿을 사용하면 경고 조치를 취했다. 그곳은 남녀의 자습실이 구분된 것은 물론 식당에서도 이성간의 대화를 방지하도록 구역이 분할돼 있다. 흥미로운 점은 공부를 제외한 일체의 교류가 금기시된 그곳의 매뉴얼을 학생들이 반기는 것은 물론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커뮤니케이션의 부담 또한 내게 위탁된다는 점이었다. 가령 자습실에서 대화가 금지돼 있으므로 학생들은 옆자리 학생이 소음을 내도 직접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는 대신, 내게 주의를 주라고 요청했다. 그외의 상황에서도 학생은 오직 공부에 충실한다는 자기계발의 윤리를 체화한 채 여타의 모든 사회적 관계가 유발하는 부담과 책임으로부터 면책됐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 <모르는 이야기>를 논하는 지면을 다소 뜬금없는 얘기로 시작한 이유는 일터에 대한 개인적 불만 때문은 아니다. 서로 분리된 채 꿈속에서 모호한 신호만을 주고받는 두 남녀(기은과 기언)를 담은 이 영화에 배어든 기류가 내가 느끼기에 한국의 학생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결여할 수밖에 없는 측면을 투영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육제도는 타자와의 관계에 책임을 지는 공동체의 윤리를 배양하는 대신, 소통의 부담을 사회적 계층 상승에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 사소화하거나 자본의 기능에 위탁할 것을 장려하는 환경을 조성해왔다. 그런 환경이 소통의 부족주의적 파편화와 익명화를 심화한 디지털과 공모하며 부각된 상황 중 하나는, 타인과 직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라기보다 애초부터 그런 갈등과 대화 자체가 회피되는 방어적인 사회적 공기다.

혼종적인 장르와 시공간을 산만하게 조합한 <모르는 이야기>는 그런 방어적 징후와 무력감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이를테면 이 영화의 여러 시공간을 일관되게 관류하는 공통점은 그 모든 곳에 유의미한 대화나 리액션이 소거되어 있다는 점이다. 치과에 간 기은은 자아를 찾기 전까지 진료실에 입실할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순종적 자세로 병원을 나선다. 다큐멘터리적 질감을 수혈한 트럭 운전사의 인터뷰 장면에서 감독은 인터뷰이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못하고 측면에서만 담더니, 이내 대상의 구체적인 정체성을 파고들어야 할 타이밍에 이르자 라디오를 재생하는 기교나 부리며 다른 시공간으로 도망간다. 교실 장면에서 이런저런 가르침을 늘어놓는 초등학교 선생의 대사가 잊어버려도 될 법한 감흥만 주는 이유는 교실 안에 선생에게 반응할 학생의 신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도입부의 영화 촬영 현장에서 여러 조연이 상대역이 부재한 상태에서 우스꽝스러운 표정 연기를 하는 장면은 <모르는 이야기>를 집약하는 이미지로 특기할 수 있겠다. 타인과 세계에 관한 리액션이 근본적으로 불능에 처한 세계. 이 영화가 여러 장면과 형식을 오간다는 표면적인 이유만으로 연대나 상상력을 심화한다고 해석될 수 없는 이유는 시퀀스의 도약이 타자와의 관계와 인식을 심화하는 대신, 반응을 회피하거나 중단하는 방식으로만 삽입돼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르는 이야기>를 섣불리 평가절하할 수 없게 만드는 장면이 있다. 바로 꿈속에서 분홍 가발을 쓴 예술가 기언이 전시회 도중 찾아온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이다. 기언은 꿈속을 찾아온 어머니에게 말한다. “엄마, 뭐해? 여기 내 꿈이야. 빨리 나가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눌변의 화가가 꺼내놓은 이 대사는, 마치 정돈된 이야기를 구축하는 데 실패한 감독 본인의 복화술적 항변으로 들려온다. ‘내가 이 작품을 통해 내 직관을 객관화된 방식으로 구조화하는 데 실패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의 존엄성을 지탱하는 이 미적 세계를 섣불리 침범하고 평가하지 말라’라는 경고(양근영 감독의 첫 단편 연출작 제목도 <왜냐고 묻지 마세요>다). 그 메시지의 수신인이기도 한 한명의 평자로서 이 메시지를 섣불리 외면할 수 없었다. 예술적 창조가 기성세대의 억압으로부터 자신의 존엄성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라는 감독의 전언에는 수긍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의 사회는 공과 사라는 선명하게 분할된 영역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개인은 언제나 사회 이전에 그의 내밀한 존엄성을 지탱하는 2인칭적 영역에 속한다. 친구, 연인, 가족처럼 완전히 객관적이지도, 완전히 사적이지도 않은 중간자적인 관계들. 그것은 완전히 이념적이지도, 완전히 사적이지도 않은 세계를 다루는 이야기가 관여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한국은 그 중간자적 공동체를 지속적으로 파괴해온 사회다. 이 영화가 담아낸 청년세대로서 내 기억을 떠올리자면 한때 아이들의 문화는 어른이 간섭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으로 존중됐지만 언제부턴가 아파트 평수, 명품 구매력이 비교 놀이의 대상이 되며 또래 문화는 세습 자본의 경연장으로 변질됐다. 가족 또한 안식의 공간이 아니라 입시라는 재테크를 위한 억압의 장소다. 꿈속에서 부모에게 나가라고 말하는 기언의 대사가 아프게 들린 이유는 현실이 아닌 미적 상상의 영역만큼은 기성세대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공간으로 남겨두고 싶다는 소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편 <모르는 이야기>는 꿈속조차 온전한 안식처가 될 수 없다는 자각 또한 내보인다. 관련해서 똑같이 꿈의 세계를 피안의 표상으로 제시한 크리스 마커의 <환송대>를 참조하며 두 가지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환송대>에서 주인공이 연인과 접촉하는 몽상 세계는 고위 관료에게 감시당하지만 <모르는 이야기>에서 꿈을 침범하는 것은 거대한 권력자가 아닌 부모다. 이 점은 한국에서 부모라는 2인칭적 타인이 얼마나 억압적으로 상상되는지 절감하게 한다. 둘째, <환송대>에서 주인공은 꿈속 연인과 소스라치도록 아름다운 사랑을 공유했지만 시종 병렬적으로 배치된 <모르는 이야기>의 남녀는 꿈에서도 어정쩡하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며 서정적 결합에 이르지 못한다. 기은은 현실에서만 <챌린저스>의 타시처럼 성적 쾌락을 능동적으로 향유하지 못하는 수준을 넘어 몽상에서도 성적 결합에 이르지 못한다. 그는 종막에 이르러 사냥꾼의 복장으로 각자도생의 윤리를 내뱉는다.

여기서 양근영 감독의 개인사를 파고드는 무례를 범하려는 건 아니지만 텍스트 외부의 공동체적 조건이 창작에 끼치는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모르는 이야기>는 내게 픽사의 <인사이드 아웃>을 떠올리게 했다. 얼마 전 감상했던 <인사이드 아웃>의 메이킹영상이 사적으로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감독들이 지속적으로 딸과 교류하는 장면 때문이었다. 피트 닥터와 공동 감독 로니 델카르멘은 딸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주인공 라일리의 일상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고 시종 말한다. 제작진간에도 가족간의 화기한 소통이 이뤄진다. 창작자의 역량 또한 가족이라는 중간자적 공동체의 온기 안에서 빛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는 픽사의 가치관 때문일까. 곧 속편 개봉을 앞둔 <인사이드 아웃>은 대놓고 판타지를 표방하면서도 시종 미려한 일상적 감정과 디테일로 반짝이는 영화다. 반강제적으로 도피한 환상에서조차 억압적 타자를 의식하며 편히 몽상하지 못하는 <모르는 이야기>의 고요한 비명이 더 버겁게 들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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