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늑대의 유혹> 이후 배우 이청아의 20년 ① - 깊은 목소리, 선명한 눈동자
2024-05-17
글 : 김소미
사진 : 최성열

배우라는 직업의 피할 수 없는 숙명 중에는 필모그래피가 쌓이는 만큼 바이오그래피의 궤적도 노출된다는 고충이 있다. 그마저도 감사하다고 표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혹자는 감수해야 할 대가라고도 말한다. 미디어 환경이 다변화되면서 대중은 해가 갈수록 작품 바깥에서 드러나는 배우의 사적 매력을 접하는 데 익숙하고 나아가 요구한다. 여기엔 스타의 진짜 삶을 궁금해하는 팬심만큼, 배우의 역능과 인간으로서의 깊이가 무관하지 않으리란 무의식적 바람도 깃들어 있다. 얼마큼 사실이거나 환상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배우 이청아의 사례로 말하자면, 제법 설득력 있는 이야기라고 잠정적으로 적어두고 싶어진다.

2002년 명동 한복판에서 길거리 캐스팅 당해 부지영 감독의 단편영화 <눈물>(2002)로 데뷔한 이청아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을 거쳐 <늑대의 유혹>(2004)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뉴 밀레니엄과 함께 선풍적 인기를 끈 인터넷소설을 영화화한 <늑대의 유혹> 이후 20년. 청춘 대 청춘으로 만난 관객과 함께 세월을 차분히 아로새긴 이 배우는 한층 낮고 부드러워진 목소리, 소녀다울 필요 없는 우아한 패션, 노련미가 돋보이는 전문직 캐릭터로 시청자들을 TV 앞에 유인한다. 곧잘 캔디형 여주인공이곤 했던 이청아의 과거를 기억하는 관객은 지금의 그를 보며 깊어졌다고 말하고 이청아의 현재가 가장 자연스러운 1020 시청자들은 그를 ‘멋있는 언니’로 따른다. 어느 쪽이든, 그를 향한 세간의 호감은 자기 앞의 여정을 거듭할수록 조금씩 선명하고 단단해져온 어느 배우의 다음 행로를 기대하게 만든다. 17년 만에 <씨네21> 스튜디오를 찾은 이청아는 변함없는 공간을 침착하게 둘러보며 말했다. 배우는 참 좋은 직업이라고. “내게 주어진 인물들이 아니었다면 살면서 영영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사람들이 훨씬 많았을지도 모른다. 배우 수업은 타인의 존재는 물론 삶에서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해주었다.” <천원짜리 변호사>(2022), <셀러브리티>(2023), <연인>(2023), <하이드>(2024)로 분주히 활동했고, 유튜브 채널로 인간적 매력도 다분히 내뿜고 있는 최신의 이청아를 만났다. 앞으로 우리에게 더 새로운 인식과 놀라움, 그리고 존중을 자아낼 배우 이청아, 인간 이청아의 페르소나를 모두 엿보길 희망하면서.

- 최근 드라마 <하이드>가 종영했다. 당분간 계획은 어떤가.

= 한동안 바쁘게 일했으니 조금 쉬어가는 일정을 잡았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촬영 이후 15년 만에 중국에 가는 건데 베이징은 처음이다. 얼마 전 넷플릭스 <삼체>를 봐서 그런지 중국행이 더 기대된다. 요즘 하고 싶은 건 하루에 딱 한번만, 꼭 필요한 연락을 위해 저녁에 몰아서 핸드폰을 확인하고 나머지 시간은 충분히 책 읽고 콘텐츠 보는 데 쓰는 것이다.

- 문영(이보영)의 이웃집 빌런인 <하이드>의 하연주 캐릭터는 이청아 커리어에서 드문 악역이었다.

= 나는 나로만 사니까 역할의 의미를 분류해서 느끼진 못하는 편이다. 드라마 <뱀파이어 탐정>에서도 비릿한 느낌의 캐릭터였고 실질적인 첫악역은 <연인>이 아닐까 싶은데 막상 주변 반응을 보면 다르게 보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 <연인>의 각화는 악역이 아닌데!

= 맞다. (웃음) 그렇게 봐주시면 더 좋고. 안 그래도 얼마 전 친한 감독님이 <하이드> 방영 중에 연락 와서 “나 청아씨 이런 얼굴, 이렇게 소리 지르는 모습 처음 봐”라고 하더라. 로코물의 이청아로 기억하는 분들에겐 확실히 <하이드> 의 모습이 낯설었을 테다. 하지만 내 기준에 지금껏 연기한 인물 중 가장 상대하기 힘든 캐릭터는 웹드라마 <회사를 관두는 최고의 순간>의 직장 상사였다. 사회 초년생들이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그런 상사였거든. 그러고 보니 확실히 최근 몇 년 들어 빌런 캐릭터에도 나를 떠올려주는 작가, 연출자들이 늘긴 한 것 같다.

- 상무(<하이드>), 대위(<연평해전>), 변호사(<천 원짜리 변호사>), 백화점 VIP 전담팀 과장(<VIP>) 등 전문직 커리어 우먼에 특화돼 있기도 하다.

= 전문직 캐릭터가 확실히 많이 들어오긴 한다. 일단 대체로 직위가 높아서 재미있다. 최근에 느낀 게 기본적으로 이사급 이상이더라고, CEO도 있고! 직업적인 면이 부각되거나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늘어난 것은 무척 반갑다.

- 우정출연한 <이번 생은 처음이라>, 특별출연한 <천원짜리 변호사>의 사례도 유독 흥미로웠다. 적은 분량임에도 반응이 좋았는데, 시청자들이 캐릭터 너머로 배우 본연의 매력을 읽는 듯했다.

= <천원짜리 변호사>의 이주영 변호사는 내가 품은 나의 이상형과 닮은 여자라 그랬을 것이다. 내가 가진 제일 좋은 모습만을 넣어둔 인물이랄까? 그리고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극본을 쓴 윤난중 작가를 드라마 <꽃미남 라면가게>(2011)로 처음 만났고 이후 사적으로도 친해졌다. 어느날 “네가 잘할 수 있는 역할이야”라고 부탁하길래 대본을 읽지도 않고 하겠다고 했는데, 막상 받아보니 너무 멋있는 사람인 거다. 고민이 많았다. 마침 그 무렵이 데뷔하고 처음으로 작품을 길게 쉴 때였다. 염색을 안 해서 뿌리가 훌쩍 자란 머리, 다듬지 않아서 숱 많고 까만 눈썹 그대로 자연인 이청아의 모습으로 나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트렌드와는 거리가 먼 스타일 이니 주변에서 말린 것도 사실이지만, 단단한 내면을 가진 인물의 고집스러움을 내 모습 그대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가장 자유롭고 편안하게 나를 드러낸 작품은 처음이었다.

- 배우 이청아의 분위기가 깊어진 것을 대중도 알아차리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린다.

= 20대의 나는 자주 88만원 세대의 전형을 연기했다. 늘 직업이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켜야 하는 소녀가장형 캐릭터의 입장이었다. 극 중에서 부모님이 다 계시는 경우가 없었다. 32살쯤인가 처음으로 직업이 있는 역할을 연기했으니. 한번은 엄마와 투닥거리며 싸우고 난 직후에 반농담으로 이런 말도 들었다. “사람들이 이청아를 정말 모른다. 넌 언제 진짜 너처럼 잘난 척하고 재수 없는 역할을 해볼래?” 엄마는 항상 내가 좀더 나다운 역할을 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 했는데, 결국 못 보고 돌아가셨다. 요새 가끔씩 하늘 보고 찡긋 말을 건다. “엄마 잘 보고 있지?”

* 이청아의 인터뷰 ② ③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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