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를 찾아보기 어려워진 올해도 어김없이 <씨네21>은 칸영화제 현장을 찾았다. 전 세계 영화인들과 언론인들이 모이는 칸에서는 공식 행사 외에도 다양한 일이 벌어진다. 올해는 칸 현지 소식을 좀더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지면보다 발 빠르게, 온라인에 칸영화제 소식을 먼저 전하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77회 칸영화제 기간 동안 <씨네21> 기자들의 일기장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예정이다. '77회 칸영화제 다이어리’는 영화제 개막부터 폐막까지 쭉 이어진다.
5월 11일 화요일 - 임수연 기자
다음 칸국제영화제 출장은 반년 전부터 준비하리라. 매년 <씨네21> 칸 숙소를 구할 때마다 거래하던 중개업자에게 영화제 석달 전에 연락을 취했다가 우리가 점찍어뒀던 집이 이미 나갔다는 답을 받았다. 다른 후보들을 추가로 요청했지만 여자 셋(나와 조현나 기자 그리고 개막 3일 뒤 합류하는 김혜리 선배까지)이 묵을 수 있으면서 영화제가 열리는 팔레 데 페스티벌(이하 팔레)과 너무 멀지 않고 적당한 가격대(물론 칸 물가 자체가 매우 높기 때문에 그나마 덜 높은 곳을 찾는 것에 가깝지만…)여야 한다는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올해는 처음으로 에어비앤비의 힘을 빌려 보았다. 칸국제영화제를 찾는 이들이 구하는 숙소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뉜다. 팔레를 등지고 봤을 때 왼쪽이 구시가지, 오른쪽이 신시가지에 해당한다. 2년 전 칸 출장을 왔을 때 머문 숙소는 현대적인 건축과 셀러브리티들이 묵는 5성급 호텔, 명품 숍이 늘어선 신시가지 끝 쪽에 있었던 반면 올해 구한 에어비앤비 숙소는 구시가지 해변가에 있다. 전통 시장과 노란 벽돌집이 매력적인 이곳은 스타들이 찾는 화려한 휴양지로서의 칸이 아닌 지방 해변 도시로서의 칸을 더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취향에 따라 후자를 더 좋아할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화란>으로 칸을 찾은 배우 송중기 역시 칸에 오면 반드시 가야 할 곳으로 ‘구시가지’를 꼽았다.
올해 칸국제영화제는 5월 14일부터 25일까지 열린다. 서울에서 인천, 인천에서 파리, 파리에서 니스, 니스에서 칸까지 이동 시간만 거의 하루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칸영화제를 찾는 기자나 수입사 관계자들은 대체로 개막 이틀 전 비행기를 탄다. 공식 초청작 감독과 배우, 관계자들은 첫 상영 및 기자회견, 언론 인터뷰 스케줄에 맞춰 칸에 들어온다. 하지만 칸에서 영화를 즐기고 싶다면 실질적인 일정은 그 이전부터 시작된다. 상영일 기준 4일 전 아침 7시에 열리는 온라인 예매 전쟁에 뛰어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님 효도를 위해 전국의 자식들이 참전한다는 임영웅 콘서트 예매는 저녁 8시에 열리지만, 체감 난이도가 비슷한 칸국제영화제는 매일 아침 7시에 이 짓(!)을 해야 한다. 파리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5월 15일 저녁 7시 뤼미에르 극장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되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예매에 장렬하게 실패했다. 10초 만에 표가 다 나가다니? 2000석 중에 내 자리 하나가 없다니? 평소 콘서트와 뮤지컬 티케팅으로 단련된 나와 조현나 기자는 지난해 칸에 온 송경원 현 편집장과 김소미 기자보다 훨씬 예매 전쟁에 단련된 이들이라 자부했거늘…. 눈물을 삼키며 2순위로 찍어둔 16일 아침 8시 30분 상영 회차를 노린다. 무엇보다 티케팅 때문에 고생하는 게 우리뿐만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했더니 은근히 위안(?)이 된다. 트위터에서는 온라인 예매로 풀리는 표가 애초에 너무 적은 게 아니냐고 투덜대는 기자,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메갈로폴리스> 티켓을 구하지 못해 초조해하고 있는 매체 편집장이 성토하는 글을 올리고 있었다. 다행히 <씨네21> 팀의 티케팅은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를 제외하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역시 인터넷에 강한 한국인!) 2년 전만 해도 예매 사이트 로그인 후 예매 완료까지 1시간 정도가 걸려서(매일 아침 7시에 이런다고 상상해 보시라) 전 세계 기자들의 원성을 샀지만 다행히 서버 개선 후 티케팅은 대체로 1분 안에 결판이 난다. 틈틈이 풀리는 취소 표도 운 좋게 확보하고 있다. 이제 칸에서 현장 수령할 배지 색깔만 ‘핑크’로 나오면 한결 마음이 놓일 것 같다.
5월 14일 화요일 - 조현나 기자
아침 6시 50분. 알람이 울리자마자 일어나 오늘 예매해야 할 4일 뒤 상영작 목록을 다시 확인한다. 아침 7시. 예매창이 열리자마자 빠르게 클릭하고 단톡방에 공유한다. “노에미 메를랑 감독 영화,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 영화, 코랄리 파르쟈 감독 영화 예매했습니다!” “코랄리 파르쟈는 10시 영화?” “저는 9시 반 영화입니다.” 칸 예매 전쟁 참전 5일차. 눈은 감겨도 손은 자동으로 움직인다.
고대하던 개막일을 흩뿌리듯 내리는 비와 함께 시작했다. 바다를 따라 걷다 보면 올해 칸영화제 포스터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8월의 광시곡> 현수막이 걸린 뤼미에르 극장이 나타난다. 극장 앞길로 기자를 비롯한 영화제 관계자들이 분주히 오가고, <할리우드 리포터> <데드라인> <스크린데일리> 등에서 잡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오늘의 첫 미션은 배지를 받는 것. <할리우드 리포터>의 표현에 따르면 칸영화제에는 “영국령 인도 제국 시절의 인도 농민들처럼 일종의 계층 구조”가 있었다. 가장 아래 등급인 “옐로우부터 블루, 핑크, 노란 점이 찍힌 핑크, 그리고 상위 1%인 화이트 배지”까지. 임수연 기자와 내가 받아든 배지에는 “중산층 소시민 계급”인 핑크색이 찍혀있었다. 높은 등급의 배지를 가진 기자일수록 기자회견장에 먼저 출입할 수 있다. 사진, 취재, 배급 등의 분야별 구별이 아닌 매체별 차등을 둔다는 게 충격이었지만 선착순으로 자리를 맡을 수 있기에 기자 입장에선 윗등급의 배지가 필요하다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선배 기자들에 따르면 배지별 대기 줄도 따로 설 만큼 훨씬 보수적인 시절이 있었지만 온라인 예매 시스템이 구축된 후에는 계급성이 완화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njoy your festival!” 배지 담당자의 환한 웃음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 웃음을 마주하면서 축제가 시작됐다는 게 비로소 실감이 났고, 가슴이 뛰었다.
“영화는 나에게 신성하다. 이 모든 영화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를 고대한다.”(그레타 거윅) 제77회 칸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은 그레타 거윅, 명예황금종려상 수상자는 메릴 스트립이다. 개막식 행사에서 칸영화제는 그레타 거윅의 출연작과 연출작, 메릴 스트립의 출연작 편집본을 상영하며 이들을 환영했다. 감격해 화답하는 그레타 거윅, 명예황금종려상을 건네던 줄리엔 비노쉬가 “당신은 영화계가 여성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꿨다”며 보낸 찬사, 그런 줄리엣 비노쉬를 껴안아준 메릴 스트립. 80년대생의 젊은 심사위원장과 근 50년간 활발히 커리어를 이어온 배우에게 박수를 보내며 나 역시 벅차올랐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 영광의 자리가 백인 여성들로 한정됐다는 사실이 일말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개막작인 <더 세컨드 액트>는 감독 캉탱 뒤피외가 쓰고 연출했으며 레아 세이두, 뱅상 랭동, 루이 가렐, 라파엘 퀴나르가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영화는 딸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남자친구를 소개하는 과정을 그리는데, 이는 정확히는 ‘영화 속 영화’의 줄거리다. <더 세컨드 액트>에서 배우들은 ‘부녀와 딸의 남자친구, 남자친구의 친구가 식당에 모인다’는 설정의 작품을 촬영 중이다. 이들은 종종 영화의 벽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배우로서의 각자의 현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의도된 것이라 할지라도 성소수자, 장애인을 유머 소재로 활용한 몇몇 장면과 이에 웃음이 터지던 객석 반응에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흐린다는 형식적 실험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점에서는 영화제의 문을 여는 작품으로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무리지어 의견을 나누는 인파를 뚫고 나오며 칸영화제의 첫날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