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필요>에선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포착한 풍경 장면이 삽입된다. 한국에 거주하는 프랑스 여자 이리스(이자벨 위페르)가 하루 동안 서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짧은 연대기를 따라가면서 영화는 인물들이 헤어지는 구간마다 자연을 담아낸 무인의 숏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영화에 삽입된 풍경은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아 미묘하게 윤곽이 뭉개진 형태로 나타난다. 이 영화의 풍경은 흐릿하고, 흐릿한 풍경의 삽입은 세 차례에 걸쳐 반복된다. 특정한 순간에 초점이 맞지 않는 장면을 활용하는 선택은 거의 모든 장면을 초점이 나간 화면으로 구성한 <물안에서>의 일관된 구성보다 세밀한 의구심을 건넨다. 영화를 처음 보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되묻자면, 왜 하필 풍경을 담은 장면만 흐릿한 모양으로 나타나는 걸까?
흐릿한 풍경의 숏은 영화의 전체 내러티브에 영향을 미친다거나 독립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간직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특정 인물의 시점을 대리하는 것도 아니고 앞뒤 장면과 접속하며 일정한 의미론적 체계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가 건네는 시청각적 체험에 속한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사소한 장면이다. 풍경을 담은 흐릿한 화면은 문자 그대로 <여행자의 필요>라는 전체에 끼어 있는 이질적이고 불투명한 얼룩이다. 이 영화를 ‘봤다’는 경험을 전제로 하는 자리에서 세 차례 반복되는 흐릿한 장면을 말하는 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시각적인 오류와 불확실함의 질감을 품은 이 장면은 영화를 보는 시각을 스치듯 훼손하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작은 흔들림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명시적인 의미로 규정할 수 없는 숏의 물질성(‘흐릿함’)이 영화에 속해 있고, 관객의 감각을 자극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흐릿함은 영화의 한 부분이자 부서진 파편으로 스크린에 출현했다. 의미의 압력과 구성적 화면의 바깥에서 사물을 바라보게 만드는 이미지의 능력, 대상을 오직 외양으로 인지하게 만드는 시각화의 능력이 바로 홍상수 영화의 핵심적인 문제라고 말한 자크 오몽의 지적처럼, <여행자의 필요>는 우리 눈에 흐릿함이라는 이미지의 외양을 직시하게 한다.
전면과 배경
세 번의 흐릿한 풍경은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강렬한 얼굴과 접속하는 전제조건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해야 한다. 영화의 후반부, 성국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이리스를 찾아 나선다. 그의 발걸음 앞에 현실인지 꿈인지, 과거인지 상상인지 분간되지 않는 모호한 산책이 펼쳐진다. 그리고 마침내, 초점이 흐려진 클로즈업 숏 위로 숲속에서 잠든 이리스의 얼굴이 가득 담긴다. 홍상수는 범용하고 보편적인 사물의 세부를 관측해 특수한 시적 감각을 세공한다(홍상수 영화의 이런 성질을 예리하게 간파한 관측자는 클레어 드니일 것이다. <생활의 발견>의 오리배를 두고 드니는 “호수에서 배를 탄다는 것은 하늘색 사과나무처럼 생긴 커다란 패들 보트에 갇혀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홍상수의 시각을 통과한 화면 위에서 아무 데서나 보이는 오리배는 호수를 가득 채우는 닫힌 사과나무로 변형된다). 드니의 용법을 빌리면 이리스의 클로즈업은 술에 취해 바위 위에서 잠든 여성의 얼굴이지만, 또한 풍경 장면의 흐릿한 빈칸에 채워져 비로소 영화가 직면하게 된 스크린의 얼굴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여행자의 필요>는 이 얼굴에 도착하는 영화다.
초점이 나간 흐릿한 풍경과 흐릿한 얼굴. 풍경은 카메라에서 멀리 떨어진 배경에 있고 이리스의 얼굴은 카메라와 가장 가까운 전면에 있다. 이리스가 한국에 머문 지 오래된 정착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여행자’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이 영화가 카메라의 초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풍경에서부터 가장 가까이 근접한 얼굴에 이르는 과정을 주시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여행은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를 통과하면서 발생한다.
<여행자의 필요>에서 홍상수는 화면의 전면과 후면을 잘라낸다. 이 시각적 구분을 제일 아름다운 구도로 담아낸 장면은 이리스와 그녀의 수강생인 원주(이혜영)와 해순(권해효)이 나란히 서서 윤동주의 <서시>가 적힌 비석을 바라보는 순간이다. 눈앞에 보이는 전경에 인물의 뒷모습이 보이고,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배경에는 시가 적힌 커다란 돌이 놓여 있다. 화면 중앙에 세 사람보다 큰 비석이 보인다. 한쪽에서 해순이 한국어로 시를 읽으면 다른 한쪽에서 이리스는 영어로 번역된 시를 낭독한다. 서로 다른 성질의 사물과 시선과 목소리와 시간이 하나의 구도를 감싸며 화면을 지속한다. 소리와 몸짓의 점묘법을 형성하는 이 장면은 놀라운 감각적 기쁨으로 채워져 있다. 뒷모습의, 사물의, 시선의, 목소리의 아름다움은 같은 구도에 담겨 있지만, 각각이 분리되어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여행자의 필요>에서 평면적 화면은 서로 다른 높낮이와 각도로 분할된다. 홍상수는 분리된 두 눈의 시각으로 화면을 관측된다. 두 눈의 시각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상투적으로 보이던 사물은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품는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내가 모르는 현상으로 뒤바뀐다. 윤곽이 흐트러진 불투명한 풍경은 하나의 명확한 얼굴과 맞물린다.
이리스는 일관된 평면처럼 보이는 세계(‘숏’)에 새겨진 분리를 직시하도록 이끈다. “나는 이리스가 마녀나 요정같이 느껴진다. 인국은 물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어떤 실험을 하도록 이끄는 존재니까”라는 이자벨 위페르의 인상적인 해석은 <여행자의 필요>가 형성하는 화면의 윤곽에도 새겨진다. 이리스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질문한다. 악기를 연주하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나요? 비석과 기념비에 적힌 문장은 어떤 내용인가요? 그녀는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표면적인 감정이 아니라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진 기분을 끄집어낸다. 이리스는 불투명한 감정을 구체적인 언어로 전환하고, 이 과정에서 영화는 분리된 구역을 인지한다. 분리란 이런 것이다. 인물이 머무는 전경은 무지와 불확실로 채워져 있다. 그들이 바라보는 배경에는 언어의 진실과 시의 아름다움이 기록되어 있다. 전경은 의심하고, 배경은 견고하다. 현재는 모호하고, 과거의 표지는 선명하다. 하지만 홍상수의 관찰은 분리된 영역의 위계를 세우고 더 우월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여행자의 필요>는 그 사이를 탐색하는 지각의 형태를 가늠할 뿐이다.
너무 빠른, 너무 느린
<씨네21> 1455호에서 김예솔비 평론가가 지적한 것처럼 <여행자의 필요>에서 이리스는 너무 빨리 사라진다. 수강생들의 악기 연주가 시작하면 자리를 피하고, 과외비를 받자마자 시야에서 사라지며, 성국의 엄마가 집에 찾아왔을 때도 순식간에 문밖으로 나간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서 남은 사람들은 황당한 말투로 말한다. “벌써 간 거야?” 이리스는 터무니없을 만큼 빠르다. 과외비로 하루 만에 월세 절반을 벌고 해가 지기도 전에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녀의 속도는 하루 동안의 시간을 기록한 <여행자의 필요>의 여정에 현기증이 일어날 듯한 리듬을 부여한다. 김예솔비 평론가의 분석을 빌리면, “이리스의 동선은 ‘하루’라는 연속성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갑작스러운 사라짐과 너무 이른 출현은 시간을 이상한 방식으로 압축시키거나 벌려놓으면서 시공간을 불균질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리스는 너무 늦게 나타난다. 성국은 아무리 기다려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 이리스를 찾아 나선다. 그녀를 찾아 나서면서 성국이 이리스를 처음 봤다고 설명한 상황(“공원 의자에 앉아서 피리를 부는데 너무 못 부는 거예요.”)은 성국의 말보다 뒤늦게 화면에 도착한다. 옆모습과 뒷모습의 연쇄로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이리스의 클로즈업된 얼굴이 화면 정중앙에 주어지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다. 그녀는 너무 빠르게 사라지고, 너무 느리게 도착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리스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외면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영화에 끌어들이기도 한다. 그는 첫 번째 수강생의 상처 난 손에 새로 돋아나는 살을 바라보지 않으려 하지만, 닫힌 성국의 문 너머로 끓고 있는 찌개를 상상한다. 이리스의 감각은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고, 보이는 것을 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게다가 이리스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녀가 하루 동안 걸어 다니며 만날 만큼 가까이 있지만, 잠시 집을 나간 그녀를 찾는 데 한참 걸릴 만큼 멀리 있다. 너무 빠르면서 느리다.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다. 가까우면서 멀다. 다시 말해, 이리스는 <여행자의 필요>의 화면이 설정하는 전경과 배경의 충돌을 몸의 감각적 신호로 증언하는 자다.
영화는 눈앞에 있는 대상을 관찰하면서 멀리 떨어진 배경을 포착할 수 있다. 무심한 기계장치로서의 카메라는 얼굴을 바라보면서, 풍경을 끌어들이는 이중의 역량을 갖춘다. <여행자의 필요>가 제공한 영화의 마지막 장소에서 이리스의 얼굴은 화면 중앙을 차지한다. 그녀의 얼굴을 둘러싸는 프레임 가장자리에 비어 있는 풍경이 자리 잡고 있다. 텅 빈 하늘 위에 거대한 돌처럼 솟아오른 하나의 얼굴, 무엇도 지시하지 않으면서 프레임 전체를 채우는 얼굴. 여기서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시각 아래서 전경과 배경이 일으킨 하나의 픽션이 서로의 윤곽을 흐트러트리며 끌어안는다.
‘0’의 얼굴
이리스는 성국과 접지 매트를 밟으며 수치가 ‘0’에 근접하지만 도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과 그 물건이 지시하는 상태가 영화에 깃드는 의미심장한 은유다. <여행자의 필요>는 90분의 상영시간 동안 이리스가 말하는 상태의 긴장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기 때문이다. 0에 근접하지만 도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리스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습득하지만,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그 어떤 명확한 진실도 알 수 없다. 카메라는 화면 안에 전경과 배경을 배치하지만, 초점이 나간 흐릿한 시각은 명확한 구분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눈앞에 보이는 것과 저 너머로 관측되는 것 사이의 긴장으로 채워진 이리스의 얼굴이 카메라 앞의 전경에 도착한다. 이 자리에 홍상수가 구축한 영화적 이미지의 영도가 마련되어 있다.
이리스는 마음속 내밀한 감정을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수첩에 프랑스어 문장을 적는다. 돌과 벽에는 오래된 시들이 적혀 있다. 빈 종이나 돌 위에 글씨가 채워지는 것처럼, 이리스의 얼굴은 불투명한 얼룩으로 남겨져 있던 흐릿한 풍경 숏의 표면에 도착한다. 하나의 풍경이 하나의 얼굴에 도착하는 데 하루의 시간이 걸린다. 이것이 홍상수 영화의 물리적 규칙이다. 그러니 이제는 <여행자의 필요>가 세 차례 반복적으로 삽입한 풍경 숏을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화면으로 보여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시각적 기호라기보다는 빈칸의 상태를 지시하는 화면이기 때문이다. 아직 글씨가 적히지 않은 수첩의 종이나 돌처럼 비워진 숏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 번의 풍경 장면은 엄밀히 말하면 ‘풍경’을 찍었다고 말할 수 없는 화면이다. 이는 표면적으로 특정한 대상을 포착해서 보여주는 화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전경에 마련된 자리를 비워둔 화면이기 때문이다. 비워짐은 그러나 단순한 부재가 아니다. 이 불투명한 화면은 숏을 점유하게 될 임시적인 체류자를 기다린다. 보이지 않는 장면의 상태는 눈에 비치는 존재의 시간을 암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여행자의 필요>의 흐릿한 화면은 하나의 스크린이 된다.
세 차례 반복된 빈칸의 숏과 비로소 도착한 얼굴의 리버스숏. <여행자의 필요>는 바로 이 느슨한 몽타주를 실행하는 영화다. 카메라가 관측한 배경의 숏과 이리스의 얼굴로 채워진 흐릿한 전경의 숏은 가장 멀리 떨어져서 서로를 바라보는 영화의 원소다. 이 장면들의 몽타주가 성립하는 순간에 세계는 분리되지 않고 픽션은 종결된다. 하지만 그것은 투명한 끝이 아니다. <여행자의 필요>가 비어 있는 불투명한 풍경을 지나쳐 도착한 곳은 이리스의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얼굴이다. 숏에 깃든 물질성이 수행하는 역할은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의미를 명확하게 정립하는 것만이 아니다. 화면의 물질성은 그 반대로 영화의 외형을 한없이 불투명하고 추상적으로 뒤틀기도 한다. 프레임 전경에 마련된 빈칸에 비로소 도착한 얼굴은 여전히 흐릿한 외형으로 주어진다. 영화는 프레임을 덫으로 삼아 카메라에 비친 피사체의 형체를 겉면에 새긴다. 그러나 <여행자의 필요>는 카메라 앞에 피사체의 형체가 분명히 각인되는 것을 끝까지 지연한다. 영화는 무한히 잠재한 형상의 흐릿한 외형을 간직한다. 이미지라는 시각적 틀이 불가피한 영화의 조건이자 구속이라면, 이미지로 각인되지 않는 불투명한 외형으로 촉발되고 끝나는 영화적 픽션은 가능할까? <여행자의 필요>는 이 질문에 응답한다. 홍상수는 더욱 급진적으로 ‘영화’라는 물질적 덩어리와 접촉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