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매번 다르게, 신혜선답게, <그녀가 죽었다> 신혜선
2024-05-23
글 : 남지우 (객원기자)
사진 : 오계옥

세 갈래의 다른 길에서 배우 신혜선을 만난다. 한국 드라마를 애정하는 시청자에겐 <비밀의 숲>이라는 장르 사상 최고의 작품을 출세작으로 인정받은 사람으로. 코로나19라는 어려움을 겪어온 업계 종사자에겐 근 3~4년간 한국의 허리급 상업영화들을 주연으로 견인해온 배우로. 무엇보다도 20대 여성에겐 한 계단 한 계단 차근차근 올라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방식으로 30대를 열어젖힌 여자 선배로. 2020년에 영화 <결백>과 <도굴>을, 지난해엔 <타겟>과 <용감한 시민>을 선보였던 신혜선이 또 한편의 영화를 내놓은 지금, 당신이 어떤 경로로 신혜선을 만났든 결국 길은 하나로 이어진다. <씨네21>은 <그녀가 죽었다> 개봉을 계기로 배우 신혜선이 그간 걸어온 길에 뒤늦은 동행을 요청했다.

“팬들에게 선물로 받았다”는 하얀색 휴대용 선풍기를 목에 걸고 스튜디오에 들어오는 그를 본 순간부터 영화, 드라마, TV와 웹 예능프로그램에서 구축해온 명랑한 분위기와 경쾌한 발언들을 연결해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영상 필모그래피로 ‘해석된’ 신혜선이 아닌 그의 삶 자체에서 나오는 진짜 목소리는 무엇일까 더욱 궁금해졌다. <학교 2013>의 단역으로 연기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인 신혜선은 2017년 <비밀의 숲>과 <황금빛 내 인생>을 만나면서 커리어의 대확장을 경험했다. 이후 원톱 주연급으로 활약한 드라마 <철인왕후>를 너끈하게 성공시키면서도 본인 앞에 도착한 영화 시나리오 읽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게 좋은 글을 발굴하면 할수록 찍어야 할 영화들도 많아지는, 기분 좋은 함수 그래프를 그려보는 과정은 배우 신혜선을 더욱 단단하게 담금질했다. <그녀가 죽었다>는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2021년에 연달아 찍은 세편의 영화 중 하나로, 특유의 질주하는 서사를 따라 관객 누구나 끝까지 가보기를 바랄 작품이다. 좋은 영화를 통해 극장에서 가능한 한 많은 관객을 만나는 것을 꿈꾸며 성실하게 자신의 영역을 확장 중인 ‘영화’배우 신혜선의 현재를 전한다.

- 2020년 <결백>부터 5월15일 개봉한 <그녀가 죽었다>까지 포스터에 전면 등장하는 영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 신혜선이 나오는 영화로 인식되는 작품들이 있다면 감사하지만 나는 영화 경험이 아직 많지 않은 배우다. 1~2년 동안 연달아 영화를 찍었고 지난해부터 차례차례 개봉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촬영했던 작품들이라는 것이 새삼스레 느껴진다. <그녀가 죽었다> 촬영장 스틸을 보고 오는 길인데 사진에서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더라.

- <그녀가 죽었다>를 언제 처음 만났나.

= 드라마 <철인왕후>를 촬영하던 2020년 초에 시나리오가 들어왔다. 당시에 하고 있던 역할과 이미지가 180도 달랐고, 이전 작품에서도 보여준 적 없는 얼굴을 지닌 캐릭터라는 점에서 선택했다. 앞으로 어떤 역할을 더 맡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시점에서 ‘한소라’는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유일무이한 역할이었다.

-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갈망이 다음 작품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인가.

= 필모그래피를 구성하는 데 있어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리겠다’는 의지가 항상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작품 공개 시기는 내가 정할 수 없다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배우의 연기는 기본적으로 자기복제라는 점이다. 어떤 캐릭터를 만나든 껍데기는 여전히 나니까. 그런 한계들을 알면서도 지금 이 시점을 지배하고 있는 태도와 감정에 변화를 주고 싶어 하는 편이다. 지금 순한 연기를 하고 있다면 다음에는 좀 센 연기를 해보고 싶고, 드라마에서 로맨스를 하고 있다면 영화에서는 액션과 스릴러에 좀더 손이 간다.

- 원했던 것처럼 <그녀가 죽었다>에는 액션도 있고 스릴러도 있다. 개봉까지 오래 기다렸는데 완성된 영화를 본 소감은.

= 네번 봤다. 집에서 세번, 극장에서 한번. 솔직히 고백하면 한번에 볼 수 없어서 여러 번 봤다. 내 모습을 마주하는 게 어색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에 보기가 어려워서. (웃음) 나의 연기하는 모습, 목소리, 얼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맡은 한소라라는 인물은 끝내 가까워지지 못했다. 이 가증스러운 인물을 표현하면서 내가 나에게서 싫어하는 목소리와 표정을 가능한 한 많이 쓰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으면 이상한 것 같은 ‘징그러운’ 느낌을 받았다.

“글, 캐릭터, 새로운 경험”

- 정태(변요한)의 이야기가 소라의 이야기로 전환되는 순간에 틈입하는 내레이션이 인상적이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내 인생은 조졌다”가 나올 때 내용뿐 아니라 분위기 전체가 전환된다. 의외의 목소리가 영화를 크게 한번 할퀴고 간달까.

= 극 중 소라의 목소리는 내가 평상시에 쓰는 목소리 톤이 아니다. 내레이션은 촬영을 다 마친 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녹음했다. 약간의 휴식이 있었을 뿐이지만 연기할 때 썼던 소라의 톤을 다시 찾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기억이 있다. 신혜선이 아닌 한소라로, 낯설지만 새롭게 다가갈 수 있도록 디테일에 신경 썼다.

- 그 말처럼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 한소라는 설득과 감정이입이 어렵다. 장르 세계관 안에서만 허용될 수 있는 비일상적이고 특이한 순간이 많다. 동시에 한편으론 소셜미디어를 살아가는 동시대 여성의 일부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 소라는 동정받거나 이해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만든 캐릭터다. 그것이 감독의 의도였고 나 역시 캐릭터와 거리를 두고 연기했다. 가족과 의절하고 성 산업에 연루된다는 전사,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명을 일삼는 내레이션 모두 소라를 이해하기 위한 장치는 아니다. ‘이 친구’가 지금 우리 사회의 여성을 대변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 그렇기에 거짓을 섞어낸 자신을 보여주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 뒤틀린 인간 본성을 극대화해서, 어쩌면 그것만 응축해서 만들어낸 장르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 그런 비현실적인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는 것이 베테랑 배우의 능력이다. 신혜선의 세밀하고 설득력 있는 연기는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나 장르적인 캐릭터에 안정감과 현실감을 부여한다.

= 100%까지는 아닐지라도 창작자의 의도와 가장 가깝게 캐릭터를 표현하려 노력한다. 대본을 받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내가 맡은 캐릭터의 성격과 분위기를 파악하는 거다. 최대한 세밀하게 장면 하나 하나의 대사 톤과 감정을 분석해서 인물에 어울리는 표현법을 찾으려 한다. 물론 연기라는 게 반복, 숙련으로 쌓이는 여타 전문 기술처럼 특정 방식의 훈련을 많이 한다고 해서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아니 도리어 그래서 뭘 열심히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땐 무조건 열심히 하려고 한다. 고민하며 머뭇거릴 시간에 일단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작품에 들어갈 때 오로지 그 작품만 생각하는 것이 열심히 하는 것의 첫 단계다.

- 서른넷 동갑내기 김세휘 감독의 데뷔작이다. 영화 <결백>과 <도굴>도 신인감독의 입봉작이었고 드라마 <비밀의 숲> 역시 이수연 작가의 첫 작이었다. 이제 막 시작하는 이들과 함께해도 좋겠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이 있는지.

= 시나리오와 이야기를 믿는다. 글이 재미있다고 판단할 때 신인급 감독, 작가들의 경력 여부 때문에 주저한 적은 없다. 뿐만 아니라 캐릭터가 좋을 때, 그리고 작품에 참여하는 것 자체로 인생에서 새로운 경험이라 느낄 때 작품을 선택한다. 결과가 좋으면 다행이지만 사실 그건 부차적이다. 글, 캐릭터, 새로운 경험이라는 세 가지를 모두 충족시켜준 작품을 만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감사하다.

- <씨네21> 홈페이지에 ‘신혜선’을 검색해봤다. 이름이 처음 언급된 것이 2016년 10월, 영화 <하루>가 크랭크업한다는 기사더라. ‘김명민, 변요한, 신혜선 출연.’

= 거기 등장인물이 워낙 적어서… 같이 적어준 게 아닐까 싶다. (웃음) 그때는 누구도 나를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 그다음으로는 드라마 <비밀의 숲>의 작품성을 둘러싼 호의적인 기사들이 이어지고 신혜선의 ‘영은수 검사’도 종종 언급된다.

= <비밀의 숲>의 ‘영 검사’가 워낙 사랑을 많이 받은 캐릭터다 보니. (웃음) 사실 주변에서 배우 신혜선으로 알아봐주기 시작한 건 첫 주연작이었던 <황금빛 내 인생>부터였던 걸로 기억한다. KBS2 주말드라마로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으니까. 돌이켜보니 두편의 소중한 드라마 이후로 8년이, 단역으로 출연한 데뷔작 <학교 2013> 이후로 벌써 11년이 흘렀다.

- 언제부터 배우의 길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했나.

=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배우가 꿈이었다. 사실 그 시절의 바람을 꿈이라고 부를 수 있을진 모르겠다. TV에 나오고 싶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정도의 마음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장기자랑을 좋아하는 활발한 어린이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할까. 이후 사춘기를 지나면서 성격이 내성적으로 바뀌었다. 남들 앞에 서는 것, 하다못해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는 것도 불편하고 무서웠다. 그렇게 10대가 되어서도 ‘연기’를 하고 싶다는 바람은 사라지지 않았다. 혼자 녹음기를 켠 채 동화책을 연기하듯이 읽었다. 어느 순간 혼자 하는 걸로는 갈망이 채워지지 않았고, 진짜 연기를 배워보고 싶어 예술고등학교와 대학교 연기과에 진학한 것은 나로선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표현해보는 과정이 정말 재밌었고 지금도 그렇다.

포기하지 않고 달리다

- <대지> <거짓말은 진실이다> <리턴매치> <인생은 새옹지마> 등 여러 단편에 출연했고, TV 데뷔까지 오디션도 많이 봤을 것 같은데.

= 오디션을 진짜 많이 보고 진짜 많이 떨어졌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렇지도 못했다. 애초에 서류에서 다 떨어져 오디션 현장에 가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웃음) <학교 2013>이 첫 오디션 현장이었는데 감사하게도 합격했다. 이후 한참 일이 없어 놀다가 <고교처세왕> 오디션을 볼 수 있었고, 또 붙었다. (웃음)

- 실전에 강한 스타일인가보다.

= 그런가? (웃음) 오디션을 봐야 했던 그때도, 오디션을 보지 않는 지금도 필승법이랄 것은 없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지름길은 없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익숙해지는 건 있다. 낯선 캐릭터가 몸에 익숙해지기까지 필요한 절대적인 시간이 있는데, 점점 그 시간이 단축되고 있다고 느낀다. 예전에는 촬영 중후반까지 불편하게 연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그보다는 몇회차 빨리 캐릭터를 익히고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 평소 어떤 콘텐츠를 즐기나.

= 시장에 나온 모든 OTT 서비스를 구독하고 있다. 그것도 가장 높은 등급으로. (웃음) 범죄 시사 프로그램을 특히 좋아한다. <그것이 알고 싶다> <실화탐사대> <궁금한 이야기 Y> <용감한 형사들> 전부!

- 앞으로 연기해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다면.

= 걸걸한 욕설로 가득한 마피아 두목. 코믹스러운 것 전혀 없이 무조건 멋지게 가보고 싶다. (“<차이나타운>의 김혜수 같은?”이라는 기자의 질문에) 정말 안 어울릴 수도 있겠지만 내게도 그 정도의 카리스마가 있을지 시험해보고 싶긴 하다. (웃음)

- 배우 신혜선은 차근차근 한 계단씩 인지도를 쌓아올려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이 점이 보통 사람들에게 더 큰 호감의 요인으로 다가가는 것 같다.

= 그렇게 봐주신다면 감사한 일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본 것도 아니고 아직 인생을 논하기엔 경험도 적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느끼는 게 있다. 모든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 분야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연기자는 ‘운’의 영역이 강하게 작용하는 직업군이다. 그래서인지 배우들은 ‘열심히 했다’고 말하는 것을 민망하게 생각할 것이다. 노력이 투명하게 보상받지 못하는 걸 많이 보아왔으니까. 그래서 차근차근이라는 말을 들으면 더 쑥스럽다. 매 작품 노력 이상의 운들이 따라주었기에 사랑받았다. 배우로서 걸어온 길에 대해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가지고 태어난 것에 비해 운이 좋았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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