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프리퀄인가
프리퀄은 불리한 게임이다. 권리금을 지불하지 않고 전작의 인지도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행에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창작자 입장에선 기본적으로 시퀄보다 따르는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본편’이라는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결말을 세상 사람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라는 역사적 걸작이 결말인 영화다. 다시 말해 <퓨리오사>가 보여주는 액션 시퀀스들의 결과물, 예컨대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고 누가 어디를 얼마큼 다치는지에 관한 상세 정보를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승패 결과와 스코어를 알고 보는 스포츠 경기만큼 김빠지는 게 없는 것처럼, 어차피 우승자가 정해진 <퓨리오사>라는 카 체이싱 경주를 <분노의 도로>만큼 박진감 넘치게 만드는 것은 당연히 어렵다.
궁금한 건 조지 밀러가 왜 이러한 순서를 택했는가이다. 모두 알고 있듯 <퓨리오사>는 <매드맥스> 시리즈 최초의 프리퀄이다. <분노의 도로> 전까지 이 시리즈는 느슨하긴 했지만 늘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또 유명한 이야기는 <퓨리오사>의 서사가 <분노의 도로>의 제작 단계에서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둘 중 왜 <분노의 도로>가 먼저 출발해야만 했을까. 그 엔딩에서 (사족 같은) 자막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냈던 역사가(The First History Man)가 역사를 역순으로 서술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관한 정설은 물론 영화 제작 조건을 둘러싼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겠지만, 여기서는 다른 버전의 가설을 세워보려고 한다.
분노라는 연료
먼저 확실하게 말하고 싶은 건 <퓨리오사>는 분명 그 어려운 것을 해낸 예외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스코어를 알고 있음에도 휘슬이 울리기 직전까지 내가 아는 결과를 의심하게 만드는 경기를 관람하는 것처럼, <퓨리오사>는 좋은 의미로 <분노의 도로>를 떠올리고 비교하게 만든다. 영화에서 진행되는 극한의 액션들로 알고 있던 스토리를 끊임없이 되짚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분노의 도로>가 <퓨리오사>의 운명이라고 한다면 조지 밀러는 <퓨리오사>의 운명을 가지고 서스펜스의 줄타기를 한다. 우리는 결과를 완벽히 알면서도, 그러니까 이 세계가 디멘투스가 아닌 임모탄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것, 퓨리오사가 임모탄 군대의 사령관이 된다는 것, 그리고 퓨리오사가 한쪽 팔을 잃게 된다는 명백한 사실을 몇번이고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다른 결과를 상상하게 된다. 그러다 결말에 다다라 역시나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이는 비록 끝을 알고 있었지만, 아니 오히려 끝을 알고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강렬한 무언가이며 지금의 순서가 아니었다면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상임이 틀림없다. 조지 밀러가 이를 위해 역순을 선택한 것은 아니겠으나 결과적으로 이 순서로 인해 <퓨리오사>가 개별 작품 자체를 넘어선 어트랙션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동시에 <퓨리오사>는 바로 그 감각으로 인해 전편의 자장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전편의 서사적 구멍을 메우기 위한, 혹은 미처 담아내지 못한 무언가를 보충하기 위해 존재하는 영화가 아니라, 결과까지 되돌아보게 만드는 혹은 <분노의 도로>라는 엔진을 더욱 달아오르게 만드는 연료가 되는 것이다. 그 연료는 분노다. <퓨리오사>가 탁월한 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서의 결과만을 설명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스크린에 비친 죽은 몸과 살아남은 몸, 잘린 팔이 전부가 아니다. <퓨리오사>는 퓨리오사가 <분노의 도로>에서 왜 그렇게 분노를 내뿜었는지, 왜 끝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지에 관한 동기를 완벽히 납득시킨다. 그렇게 도달한 <퓨리오사>의 엔딩은 과거의 퓨리오사와 미래의 퓨리오사간의 ‘분노 배턴 터치’가 이뤄지는 공간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혹은 미래에서 과거로 <매드맥스> 시리즈의 심벌마크인 운전대가 전달된다. 운전대를 잡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태여 덧붙이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 감독이 이 이야기를 누구의 사가(saga)로 보고 있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위대한 역사가가 하는 일
여기까지가 전부라면 <퓨리오사>는 그저 최고의 액션 장르 영화로만 기억될지도 모른다. 그대로 두고 싶지 않은 건 이 영화가 한 장면에서 장르 문법을 완전히 벗어난 생경한 순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디멘투스와 임모탄 세력간의 일명 ‘40일 전쟁’이 펼쳐질 때, 영화는 액션을 보여주는 것을 갑자기 중단한 뒤 역사가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는 이 전쟁을 이야기하기 위해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인류의 전쟁을 소환한다. 그 모든 전쟁과 지금 이 전쟁이 근본적으론 같다는 듯, 지구상에 있는 모든 문명의 흥망성쇠가 인간의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이 순간 다시 한번 역순의 구도가 반복된다. 우리가 결과를 알고 있는 전쟁들과 그 원인. 어쩌면 영원히 종말될 수 없는 분노의 결과물과 그 프리퀄. 이제 다음 순서는 ‘결과를 아는 상태로 본 프리퀄’, 즉 ‘역사’를 본 우리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매드맥스>의 세계가 상정하고 있는 핵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는 것까지가 감독이자 역사가인 조지 밀러의 의도일 것이다.
결과를 알면서 봐야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는 법이다. 영화 애호가 입장에서 영화의 n차 관람을 찬미할 때 쓰는 표현이기도 한 이 말은, 사실 영화가 모방하려는 현실에 적용할 때 더욱 적합한 말일 수밖에 없다. <퓨리오사>를 본 뒤 다시 <분노의 도로>를 봤을 때 퓨리오사의 눈빛, 목소리, 그리고 모든 액션에서 새로이 보이는 것이 생긴 것처럼 우리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분노들을 마주할 때 그 탄생 설화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그 이야기가 쓰여질 때, 우리는 그 모든 분노(이야기)들의 주인공을 재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결말을 안 채 이야기의 주인공을 다시 세우는 일, 그것이 위대한 역사가가 하는 일이다. 바로 그것이 역순의, 아니 30년 만의 리부트의 진정한 이유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