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은 점에서 멈추지 않고 시차를 둔 채 선으로 이어져, 결국 면의 형태까지 퍼져 나간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처음 본 후 떨리는 손으로 메모장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간혹 굳이 언어로 옮겨 적는 것에 회의나 한계가 느껴지는 영화가 있는데 딱 그런 (기분 좋은) 무력감 혹은 도전정신을 안겨주는 작품. 오프닝에서 이미 끝남.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장면을 지나 낙원 같은 호숫가 수면 아래 지옥도가 감지될 때, 그 불온한 낙차가 모든 걸 집어삼킨다. 쨍하고 밝고, 푸르게 끔찍하다. 괴물 같은 영화.”
실은 이건 나중에 카페에서 생각을 정리해 기록한 버전이다. 극장에서 끄적인 메모장 제일 앞 페이지에는 그냥 딱 한마디만 적혀 있다. “와우….” 시간이 지난 뒤 말줄임표의 여백을 채워보려 애썼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개봉을 앞둔 영화를 1년 만에 다시 보고 똑같이 적는다. 와우. 그러곤 펜을 놓았다. 이번에도 역시 아무것도 적을 수 없었다.
우리는 때로 역할의 노예를 자처한다. 주어진 역할을 의심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때 책임으로부터 달아나 부품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내가 그랬다. 관성대로 일하면서 쓸 수 있는 글과 없는 글을 나눠서 생각한 시기가 있었다. 스스로 한계를 규정짓고 할 수 없는 일이란 변명을 앞세웠다. 해나 아렌트가 역설한 ‘악의 평범성’은 꼭 윤리적인 영역에 국한하지 않는다. 흔히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하는데, 행동에 대한 판단과 책임을 미루면 보이지 않는 발판부터 무너져내리는 법이다.
나름 이런 위태로운 익숙함에 저항하고자 여러 방편을 고민해왔다. 그중 제일 효과가 확실했던 건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는 것이었다.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가. 이것만큼 본질을 설명할, 확실하고 투명한 감정도 드물다. 때론(사실 거의 대부분) 욕망과 능력의 불일치에 좌절하며 괴로움에 몸부림치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생기면 해야 한다. 어쩌면 그 몸부림이야말로 살아 있음의 증거이자 사유의 결과물이다.
취재기자 시절, 위대한 영화에 압도당한 뒤 그 영화에 대한 글이 보고 싶을 땐 세 가지 길이 있었다. 이미 나온 좋은 글을 찾아보거나, 적절한 필자를 섭외하거나, 아니면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는 심정으로 직접 쓰거나.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으로 허락된 건 후자였기에, 많은 순간 쉽게 포기했다. 돌이켜보면 의미 있는 결과로 남거나 전환점이 된 건 망할지언정 뭐라도 썼을 때였던 것 같다.
지금은 상황이 다소 바뀌었다. 읽고 싶은 글이 있을 땐 제일 잘 써줄 수 있는 필자를 섭외한다. 물론 이것도 섭외 불발이 다반사다. 그럼에도 운 좋게 애정하던 필자 섭외에 성공하여 보석 같은 글을 받았을 땐 (약간의 과장을 보태) 영화를 봤을 때보다 아주 조금 더 행복하다. 개편 이후 지난 한달간 <씨네21>에 합류한 필자들이 첫선을 보였다. 이번주엔 특히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대한 김영진 평론가의 통찰과 박홍열 촬영감독의 세밀한 분석, 새 연재를 시작한 남다은 평론가의 유려하고 밀도 있는 글을 자랑하고 싶다. 아직 모으지, 아니 섭외하지 못한 필자들이 많지만 이 정도면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보석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