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그것이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일지라도. ‘원더랜드’ 서비스는 죽은 사람, 혹은 죽음에 준하는 상태에 놓인 환자들을 인공지능(AI)으로 복원해준다. 해당 서비스가 보편화된 세계를 배경으로 사람들은 의식을 잃기 전 원더랜드로 넘어가거나 원더랜드를 통해 보고 싶은 이를 만난다. 죽음으로 인한 단절에 반기를 든다는 것이 원더랜드의 이점이지만, 그것이 축복과 굴레 중 무엇으로 귀결될지는 사용자 개인의 시선에 달려 있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가족의 탄생> <만추> 등을 연출한 김태용 감독이 오랜 공백을 깨고 신작 <원더랜드>를 세상에 내놓았다. 탕웨이, 수지, 박보검, 정유미, 최우식 등을 기용하며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주목도가 높았던 작품이다. 다수의 인물을 등장시켜 이들의 관계성과 감정선을 다루는 건 <가족의 탄생>에서 김태용 감독이 이미 시도한 구성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여러 캐릭터를 등장시키지만 이들은 원더랜드를 경유한다는 조건만 같고 이후에 마주하는 사건과 감정은 제각각이다. 한국 SF의 야심작이자 김태용 감독의 신작 <원더랜드>는 무엇을 말하고자 싶었나. 작품의 감상을 도울 <원더랜드> 리뷰와 함께 김태용 감독 인터뷰를 전한다.
당신은 믿을 수 있나요?
바이리(탕웨이)는 사망한 뒤 원더랜드에 복원된 AI 중 하나다. 딸이 원할 때 영상통화로 연락을 주고받고 통화하지 않을 땐 고고학자라는 가상 세계에서의 본분을 충실히 따른다. 어느 날 딸이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은 후 서비스가 갑작스레 종료되고, 바이리는 혼자서라도 딸을 찾을 방법을 강구한다. 한편 정인(수지)은 사고로 의식을 잃은 연인 태주(박보검)를 대신해 원더랜드의 AI 태주와 일상을 보낸다. 기적적으로 태주가 깨어나긴 하나 정인은 실제 태주와 가상 세계 속 태주의 간극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던 중 원더랜드에 오류가 발생하고 서비스를 운용하는 플래너인 해리(정유미)와 현수(최우식)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다.
SF 장르물은 작품 세계관을 초반에 간략하게나마 짚어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원더랜드>는 배경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원더랜드에 가겠다는 바이리의 결정을 시작으로 서비스디자인, 이를 관리하는 플래너 해리와 현수를 차례로 보여주며 시작한다. 독특한 구성이 누군가에겐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달리 보면 이 지점부터 <원더랜드>의 방향성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영화의 목적은 가상 세계를 세밀하게 구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사용자들이 서비스를 이용하며 변화하는 과정을 담는 데에 있다. 가능한 한 여러 사용자의 예시를 보여주면서 말이다. 이는 원더랜드의 기본 전제와 연결된다. 이 서비스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사용자는 원하는 때에 자유롭게 서비스를 시작하고 종료할 수 있다. 때문에 원더랜드는 독자적인 세계라기보다 사용자들에게 주도권이 있는, 이들에게 종속된 세계에 가깝다. 극 중 발생하는 문제들도 원더랜드 내부의 것이 아닌 사용자라는 외부요인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문제들은 사용자가 ‘화면 속 상대를 실재한다고 믿을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동반한다.
김태용 감독은 영상통화를 하면서 “핸드폰 너머의 사람이 실재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고 “세상을 떠난 사이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 관계가 지속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영화의 출발점이 됐다고 말한다. 이 가정은 원더랜드의 중요한 작동 기제다. 원더랜드는 인간을 실제와 다름없게 복원할 기술이 있지만 이것이 사용자의 신뢰를 담보하진 못한다. 바이리의 엄마 화란(니나 파우)은 복원된 딸을 받아들이지 못해 결국 서비스를 종료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해리는 원더랜드의 부모와 십수년간 일상을 나눠왔고, 진구(탕준상)의 할머니는 원더랜드 속 손자를 진짜로 여겨 그를 위한 값비싼 아이템을 끊임없이 구매한다. 부정하며 외면하느냐, 암묵적인 선을 지키며 믿길 택하느냐. <원더랜드>에서 존재의 근거는 재현이 아닌 믿음의 문제로 치환된다.
슬픔을 디딘 <원더랜드>의 풍경
바이리의 존재는 그래서 중요하다. 그는 인간세계와 가상 세계의 경계선에 이르는 유일한 캐릭터다. 이 과정에서 바이리는 자신을 메타적으로 인지하고 스스로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기에 이른다. 재현의 단계를 넘어선 이 AI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원더랜드 사용자와 원더랜드 속 AI, 그리고 서비스를 관장하는 플래너. 극 중 캐릭터들에게 주어진 비중은 엇비슷하지만 바이리의 존재감이 확연히 다른 건 위의 이유 때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원더랜드>는 가상 세계가 인간세계에 종속된 모양새에도 불구하고, 이 두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으며 인간과 AI의 관계를 일방향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바이리의 존재, 바이리의 변화가 변환점 자체로 작용한 덕이다.
인물들은 사랑하는 이와 계속 닿고 싶은 마음으로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그 선택이 야기한 결과는 각기 달랐다. 목적대로 그리움과 슬픔을 유예하는 데에 성공한 사람이 있는 반면 상대의 부재를 더 크게 감지하는 이도 있다. 그렇다고 쉽게 서비스 종료 버튼을 누르진 못한다. 화면 속 얼굴이 연인 그리고 가족의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의 탄생> <만추>가 증명한 것처럼 김태용 감독은 멜로, 가족 드라마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창작자다. 그 장점은 이번 영화에서도 발휘됐다. <원더랜드>는 SF 장르의 골자를 갖고 있으나 그 안에서 인물들을 추동하는 요건들은 멜로, 가족 드라마의 것에 가깝다. 그렇게 다른 장르의 요소들이 충돌하고 어우러지며 생긴 결과물은 <원더랜드>만의 독특한 인상이 되어준다.
AI는 이미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일처리를 요청하거나 이들과 스케줄을 공유하는 것 모두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문제와 보다 밀접하게 결부될 때 이야기는 달라진다. <원더랜드>와 유사하게 떠난 가족을 가상 세계에서 만날 수 있도록 연출한 MBC <VR 휴먼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 프로그램이 방영 당시 여러 논의를 불러일으켰던 것처럼 말이다. 원더랜드와 같은 서비스가 상용화된 미래에 우리는 과연 어떤 혼란을 겪을까. 무엇을, 어디까지 진짜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청사진을 <원더랜드>에서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