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의 증후는 여러 곳에서 온다. 곱빼기도 마다하지 않던 짜장면을 몇 젓가락 이상 먹기가 어려워질 때, 건널목 신호등 파란불이 깜빡이기 시작하는 걸 보고 달려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남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기가 몹시도 고통스러워질 때.
이런 증상은 신체적 노화의 결과이며, 따라서 대체로 부정적인 것이곤 하다. 노화란 한때 가능했던 것들이 불가능해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체적 노화는 그에 수반되는 다른 것들의 부정적 노화를 촉진한다. 기억력이 떨어지고, 계산력과 어휘력이 확연히 줄어들며, 인내심과 판단력까지도 점차 바닥을 드러낸다. 정신을 모으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精神一到何事不成)고 말하는 이들은 대개 스스로가 아니라 젊은 신체를 가진 이들에게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싱싱한 육신을 가지고 뭘 못하겠다는 거냐!”고.
나이가 충분히 들지 않아서 불가능한 것들도 있고,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일정 시점이 지난 이후의 나이듦이란, 가능했던 것 혹은 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었던 것들의 영역이 좁아지고, 그 추세는 불가역적이 된다는 뜻이다. 나이가 무척 많이 들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 있다면, 그건 그 늙은 신체와 그 안에 담긴 노회한 정신 덕분이기보다는 그 시간을 들여 끌어모은 각종 자원 덕분이다. 돈, 권력(=지위), 인맥 등이 그것이다.
나이든 이들을 대접하라는 이데올로기는 그들이 원천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음을 간파한 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나아가 그들 가운데 종종 심한 노욕을 부리는 이들이 나오는 건 그런 자원이 없는 자신의 신체와 정신이 정말 하잘것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약자에 대한 측은지심, 나나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이들이 언제든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연대의식에 근거를 두지 않은 이데올로기는 결코 튼튼하지 않다.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세대갈등은 상당 부분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더 많은 자원의 토대 위에서 더 많은 노욕이 횡행할수록,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었을 상처와 불신이 불가피한 것으로 바뀌게 된다.
그건 노인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윌리엄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 첫 구절은 그렇게 시작한다. 코언 형제의 영화도 그 아리송한 제목으로 끝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을지 몰라도, 노인들로 그득한 나라는 이미 오고 있다. 영화화된 소설 <은교>에서 박범신은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또한 시인 시어도어 로스케가 남긴 말을 가져온 것이다.
덜 나이든 이들에 비해 나이든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거나 아직 남았을 때, 나이가 벼슬도 아니고, 벌도 아니며, 또한 상도 아닌 나라가 가능하게 해야 한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나라는 노인들을 위한 나라도, 그렇다고 딱히 젊거나 어린 이들을 위한 나라도 아닌 것 같으니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