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에 복합문화공간에무라는 공간이 있습니다. 1층은 카페, 2, 3층은 상영관, 지하에는 공연장, 게다가 정원과 옥탑도 있습니다. 이런 공간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예술가들의 망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곳입니다. ‘에무’라는 이름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 에라스뮈스에서 영감을 받아 지었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안녕하세요, 에무시네마입니다. 아니 당신이 생각하는 ‘애무’는 아니고요~ 그래도 영화가 상처받은 우리를 애무하기도 하죠^^” 같은 비참한 농담 같은 것을 하고 싶어지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안의 아저씨가 만들어낸 질 낮은 농담입니다.) 그래서인지 뭔가 서먹하게 느껴지던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저에게 꽤 많은 추억이 쌓인 곳입니다.
코로나 시기, 거리 두기 방침으로 많은 예술 공간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관객이 앉을 자리를 한석 비워두고 한석은 채워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퐁당’ 같은 은어가 쓰이곤 했고요, 둘 비우고 하나 채우는 ‘퐁퐁당’ 같은 상황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절 우리는 관객 반, 빈 의자 반으로 공연이나 상영을 했던 거지요. 이때 에무의 뒤뜰에서 하는 음악 공연이 생겼습니다. 이 공연은 블루투스 헤드폰으로 소리를 송출했습니다. 소리의 출력 반경에서 자유로워진 관객들은 넓은 공간 속에서 자신의 취향껏 자리를 선택해 앉을 수 있었고요, 원한다면 뒤뜰 주변을 산책하면서 공연을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 공연의 이름은 <격조콘>이었고 저는 세번 정도 참여했습니다. (격식, 운치를 나타내는 격조(格調)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격조(隔阻)를 포함하는, 약간의 말장난. 이건 제가 아니고 다른 아저씨가 만들어낸 이름입니다.)
무대 위에서는요, 생각보다 관객들의 얼굴이 잘 보입니다. 관객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무섭냐고요? 네. 너무 무섭습니다. 보고 듣고 맡는 연약한 얼굴들이 저의 부족함을 금세 알아차릴 것 같아서 심장이 콩닥거립니다. 때론 관객석 중앙에 임의의 점을 설정하고 그걸 응시하며 노래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각자의 얼굴이 담고 있는 에너지에 압도될 것 같아서요. 그런데 <격조콘>에서 공연할 때는 관객들의 표정이 뭔가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경희궁 숲 끝자락에 걸쳐진 뒤뜰은 풀과 나무들이 자연스럽고 불규칙하게 엉켜 있습니다. 새소리가 들리고 고양이가 지나다닙니다. 이 풍경을 보고 앉아 있는 인간의 얼굴은 블랙박스형 공연장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아, 내가 뭘 대단히 잘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여기 앉아 있는 것만으로 즐거운 때를 보내겠구나. 그리고 저도 무거운 화장 대신 레몬그라스 향이 나는 벌레 퇴치제를 바르고, 임의의 점이 아닌 나뭇잎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며 노래를 불러보는 거죠. 그렇게 노래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이 섞여서 느슨하고 다정한 하나의 장면이 됩니다.
에무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별빛 영화제>일 것입니다. 여기서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를 봤습니다. 친구와 함께 1층 카페에서 맥주와 나초를 사서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삶의진실을 직면하거나 회피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고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삶을 직면하는 것도 회피하는 것도 괴로워하기에 영화를 자주 볼 수 없습니다. 한번 볼 때 에너지를 많이 쓰고, 영화를 보기 전이면 긴장합니다. 그런데 이날의 풍경은 이렇게 표현하기엔 진부하지만 인생에서 좀 낭만적이라고 생각할 만한 순간이었습니다. 옥상 공간에 빈백, 캠핑 의자 등으로 30석 정도의 객석을 놓은 작은 야외 상영장에 나무와 빈 하늘을 배경으로 프로젝터가 하나 걸려 있습니다. 해가 지는 피코크빛 하늘색은 극장의 암전으로 순식간에 변해갑니다. 주변이 어두워질수록 영화는 깊어집니다. 관객들은 블루투스 헤드폰을 끼고 혼자 빈백에 누워 있거나 소중한 사람의 손을 잡거나 하는 각자의 자세로 영화를 봅니다. 영화를 보고 있는 지금이 더 영화 같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우리를 통과할 때가 있죠.
그때였습니다. 영화가 15분 남짓 남았는데 한두 방울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빗물은 얼굴 위로 떨어지고, 옷을 적시고, 맥주에도 들어갑니다. 맥주만 그늘로 슬쩍 옮길 뿐 그 누구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습니다. 주인공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며 관객들이 초집중하고 있었거든요. 어느새 빗물이 주변 나뭇잎을 토독 토독 적시는 소리가 나지만, 몰입한 사람들에게 닥친 갑작스러운 비는 오히려 지금밖에 없는 삶의 순간을 더 자각하고 집중하게 하는 기폭제가 됩니다. 이젠 누가 봐도 빗속에 앉은 사람들이 되었을 때에야 영화제측에서 상영 중지를 알립니다. 우리의 몰입을 어떻게 깰지 무척 고민하다 내린 결정 같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기로 선택한 것 말고는 아무 관계없는 약 30명의 사람들이 비를 피해 옥상에서 건물 안으로 얌전히 들어갑니다. 마치 수학여행에서 비를 피하는 같은 반 학생들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젖은 옷을 털어내는 우리에게는 아까 그 영화가 묻어 있습니다. 영화제에서는 미안하다고 무료 영화 티켓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 티켓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에는 이 모든 순간이 담겨 있습니다. 90년대 일본 특유의 풍경과 배우들의 순수한 눈빛, 조용조용한 전개 속에 담겨 있는 작은 철학, 게다가 한국 초여름의 산들바람, 비에 젖은 나초와 맥주, 수많은 사람들의 집중한 옆모습, 주변이 어두워질수록 더 빛나는 스크린.
이런 우리가 조금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나요? 그리고 그 속에 내가 슬쩍 들어가 있다는 것이 쑥스럽지만 몰래 아름다워지는 기분이 듭니다. 삶은 대부분 재미없고 자주 고통스럽습니다. 이 고달픔을 뼈저리게 느끼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끔 선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사람과 이야기에 진지하게 집중하는 때죠. 그 짧은 순간 저는 작은 구원을 받습니다. 누군가는 이 화학작용이 좋아서 창작을 시작하겠죠. 재능 있고 특별난 사람들에게만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도 영화를 보거나 만들고 있습니다. 작게는 오늘 하루라는 영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