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K팝 산업은 차기작이 기다려지는 영화 감독들의 신작을 가장 빨리 만나볼 수 있는 곳이 됐다. 아이유의 <Love wins all>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엄태화 감독, RM의 <Come back to me>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이성진 감독에 이어 최근 엔하이픈의 정규 2집 발매를 앞두고 공개된 컨셉 시네마 <로맨스: 언톨드>(ROMANCE: UNTOLD)는 이충현 감독과 컬래버레이션을 했다. <로맨스: 언톨드> 최초 공개 시사회 현장에서 만난 이충현 감독은 “K팝 업계에서 세계관 스토리텔링을 위해 새로운 영상 작업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하더라”라며 “앞으로도 비슷한 컬래버레이션이 더 등장하지 않을까 싶다”고 전했다.
이같은 추세를 영화와 드라마에 이어 K팝까지 아우르며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최근 콘텐츠 업계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맞고 어떤 의미에서는 틀렸다. 먼저 엔하이픈은 ‘뱀파이어 세계관’을 주축으로 음악 및 비주얼 스토리텔링의 저변을 전방위적으로 확장해가는 그룹이다. “내 하얀 송곳니/ Oh 난 너에게 걸어가지/ 두 세계를 연결하지/ 나의 붉은 눈빛.”(<Given-Taken>) “달콤한 이 향기도/ 붉은빛 송곳니도/ 즐겨봐, 이 Carnival wow wow.”(<Drunk-Dazed>) 불멸의 일곱 뱀파이어 소년들의 ‘연결’과 ‘성장’을 보여주는 ‘-(하이픈)’이 그룹명과 노래 제목 작법에 반영되고 매 앨범 유기적으로 스토리를 확장해간다. 이들의 세계관을 담은 웹툰 <다크 문: 달의 제단>은 누적 조회수 1억8천만뷰를 기록했고(이들이 소속된 하이브의 주요 신사업으로 꼽히는 오리지널 스토리 IP 대부분이 기대 이하의 성과를 거둔 가운데 <다크 문: 달의 제단>은 드물게 성공을 거둔 사례다) 지난해 롯데월드와 정식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특히 <다크 블러드>(DARK BLOOD), <오렌지 블러드>(ORANGE BLOOD)로 이어지는 컨셉 트레일러는 6~8분의 영상으로 곧 공개될 앨범의 핵심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담아내 화제를 모았는데, 이번에는 이충현 감독과의 협업을 통해 정규 2집 《ROMANCE : UNTOLD》를 소개하는 단편영화를 만든 것이다. 원래 K팝 산업의 세계관은 아이돌의 매력을 다층화하고 일부 팬들의 과몰입을 이끌어내는 반면 일반 대중에게는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엔하이픈은 뱀파이어 장르 문법을 통해 그 한계를 깨고자 한 그룹이다. 영화는 이들의 콘텐츠를 확장하는 예술 융합의 한 연결고리가 된다.
엔하이픈의 작업물이 철저한 집단 기획의 산물이라면, 아티스트 개인의 시네필적 성향과 영감에서 출발한 사례들도 있다. 엄태화 감독이 연출한 <Love wins all> 뮤직비디오는 일찍이 마이클 파월,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분홍신>을 오마주한 동명의 곡을 내놓았던 싱어송라이터 아이유의 주도하에 나온 프로젝트다. 그는 2018년 아이유의 10주년 콘서트 VCR 영상에 이어 뮤직비디오 연출로 한번 더 인연을 맺게 됐다. 감독에 따르면 아이유는 과거 콘서트는 물론 이번 뮤직비디오에서도 총괄 디렉터 같은 역할을 했다. “대중의 니즈와 자신의 예술적 감각 사이의 접점을 잘 찾아가는”(엄태화) 아이유의 강점을 떠올릴 때, 영화적 스토리텔링은 아티스트의 매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매개가 된다. 한편 RM의 <Come back to me>는 의외로 기존 K팝 산업의 기획물과는 정반대 지점에서 출발했다. 뮤직비디오의 미술에 참여한 류성희 미술감독은 “이번 솔로앨범을 위해 모인 바밍타이거, 혁오 등의 아티스트들, ‘팀 RM’의 정체성이 무척 중요했던 작업”이라고 기억한다. “‘팀 RM’은 RM의 지난 10년,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담아내며 기꺼이 도전하고 추락하고 다시 나아가는 일대기를 시네마로 만들고 싶어 했다. 인생의 갈무리에 있어 영화보다 좋은 방식은 없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었다.” 다시 말해 영화는 앨범의 본질을 담아내기 위해 필연적으로 만나야 할 표현 양식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다양한 예술에서 흡수한 자양분, 특히 봉준호, 박찬욱, 장준환 등이 배출된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경험하며 ‘자기 표현’이 몸에 들러붙은 세포가 된 세대”이며 “영화적인 표현이 자연스럽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과거에는 매체를 보는 방식이 구분되어 있었다면 이들은 영역을 유연하게 넘나들고 상상하며 예술을 한다. 실제 작업 과정에서 그들은 영화적 언어와 해석, 창작자끼리의 컬래버레이션에 무척 능했다. 자기로부터 시작된 상상력을 기반으로 개연성 있는 스토리텔링을 하기를 원했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만남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영감을 주고받고 창작적 자유를 보장받았던 시간이었다.” (류성희)
그리고 영화계 밖에서 출발한 융합 예술의 움직임에 기성 영화인들이 답을 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엄태화 감독은 “한편의 영화가 나오기까지 2~3년이 걸리지만 뮤직비디오는 한달 좀 안되게 준비해서 이틀 촬영하고 20일 정도 후반작업을 한 후 바로 오픈”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하루 만에 천만뷰를 찍고 전세계에서 즉각 리액션 영상을 올리는 피드백 과정은 극장영화만 만드는 창작자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경험이기도 하다. 걸그룹 에스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