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있다(연재 첫글을 이런 말로 시작하게 돼 유감이다). 알다시피 이 오래된 여성 혐오적 관용구에는 문제가 많다. 일단 ‘여적여’ 프레임은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 사이에서는 진지한 우정도, 사랑도 불가능하다고 전제한다. 오직 절대적이고 강제적인 이성애 세계관 아래에서 우월한 수컷을 두고 다투는 적이 될 수 있을 뿐. 혹은, 여성 퀴어 영화/드라마를 다룬 박주연의 책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를 따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어떤 여자들을 라이벌로 여기라고 했을까? (…) 여자들이 서로 안 싸우면 너무 큰일을 할 것 같아서였을까?” 물론 이 자리에서 ‘여적여’가 실은 남성 중심 사회가 악용하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논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는 아무리 미운 사람(꼭 여자가 아니어도 된다)이라고 하더라도 그를 ‘명백한 적’으로 명쾌하게 분류하는 게 꽤 어렵다는 걸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의 마음이란 복잡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깊은 미움은 깊은 사랑과 같은 규모의 감정적 투자를 필요로 한다. 앞서 언급한 책이 ‘여적여’와 같은 “‘혐관’ (혐오 관계)이 진정한 ‘맛집’”이라고 일갈한 까닭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여적여’가 실은 ‘여돕여’(여자는 여자가 돕는다)를 포함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차라리 내가 제안해보고 싶은 가설은 다음과 같다. 어쩌면 ‘여적여’는 여성들간 ‘진정한’ 다른 관계를 금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적대 관계로서만 여성들간 관계를 표상할 수 있었던 남성 중심, 이성애 중심 사회의 지루하기 짝이 없는 상상력을 보호하기 위해 요구됐던 표현일지도 모른다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여적여’는 여성간 관계의 가능성을 비가시화하는 방식으로 가시화하는, 일종의 문제적 장소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런데 암만 ‘여적여’가 유용하다 할지라도,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예컨대 페미니즘과 퀴어 비평의 관점에서 ‘여적여’ 프레임에 의해 가려진 여성들간 우정과 사랑을 재조명하기는 쉬워도, 진짜 적이기‘만’ 한 경우는 오히려 ‘여적여’ 프레임을 증명할 뿐이므로 그야말로 처치 곤란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원인 중 하나는 물론,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라 불리는 시기인 2010년대 중반 이후 페미니스트 활동가와 비평가가 구사했던 (남성에 대한) 여성의 ‘도덕적 우월함’을 내세우는 대중운동 전략에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만이 유일하게 ‘안다무’ (안온, 다정, 무해)를 구호 삼아 ‘여적여’ , 즉 여성들간 질투와 증오, 폭력과 적대의 존재를 부인한 페미니스트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지구상의 모든 페미니스트가 지금까지 그래왔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유럽에 등장한 프로이트의 악명 높은 ‘남근 선망(envy)’으로 인해 ‘여적여’를 이루는 핵심 감정인 질투가 ‘여성 전용’으로 알려지게 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자면,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다. 프로이트에게 여성의 질투란 남성과는 다르게 자신에게는 남성기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발생하는, 이후 안전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신경증으로 발전할 수 있는 근원적인 감정이다. 여성은 ‘남근 선망’을 얼마나 잘 수용하느냐에 따라 ‘정상’ 혹은 ‘비정상’이 된다. 이러한 관점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독하게 설득력을 발휘했던지 멜라니 클라인(“실은 남근 선망이 아니라 가슴 선망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남근이 아니라 모체가 먼저다”), 주디스 버틀러(“남근이라는 건 없다”)와 같은 여성, 페미니스트 정신분석 이론가들은 ‘남근 선망’을 생산적으로 비판하고, 전유하는 데에 많은 힘을 쏟아야만 했다. 이는 여성을 ‘질투하는 동물’로 정의하는 남성 중심 사회의 프레임을 안팎으로 깨부수기 위해서다. 그런데 지금부터 ‘여적여’ 장르라 부를 범주에 속하는 영화들은 여성의 질투, 혹은 여성들간 질투를 수위 높게 묘사하며 어째선지 그런 정의를 한껏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 장르가 최소한 두명의 여성과 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동일시의 메커니즘, 그리고 그에 따르는 정서적, 신체적 폭력의 묘사라는 필수 요소를 갖는다고 간주한다. 이런 문제적인 ‘여적여’ 장르에 대한 페미니즘, 퀴어 비평의 태도는 하여간 어떻게든 질투의 공격성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거나, 아니면 성적 긴장감의 우회적 표현으로 재맥락화함으로써 ‘여적여’의 ‘밝은 면’을 조명하는 것이다. 비평의 필터를 거치며 질투의 공격성은 무독하게 정화된다.
예컨대 페미니스트 영화 이론가 재키 스테이시는 <이브의 모든 것>(1950)과 <수잔을 찾아서>(1985)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여적여’, 즉 여성들간 동일시에 기반한 질투와 집착이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대신, 여성 관객이 ‘보기의 경험’을 통해 여성 동성애적 욕망과 관계 맺는다고 말한 바 있다. 여성 관객에게 그럴 능력만 있다면 아무리 영화가 ‘여적여’를 재현하고 있을지라도 스크린상의 여성과 동일시하거나 혹은 그들을 욕망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착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굳이 선택적 ‘착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여적여’와 여성 동성애적 욕망을 구분하기란 어려운 법이니까. 그런데 이런 논리는 얼핏 듣기에, 특정한 방식의 독해를 위해서라면 이미 스크린상에 재현되고 있는 여성들간 노골적이고 격렬한 질투의 공격성을 일부러 축소하거나 배제해도 괜찮다는 것처럼 들린다. 이미 부지런한 페미니스트, 퀴어(그중에서도 레즈비언) 비평은 텅 빈 무기고를 채우기 위해 그런 ‘특정한 방식의 독해’에 많은 공을 들여왔다. 게다가 실제로 ‘여적여’ 장르와 ‘여성 동성애’ 장르가 거의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사실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제복의 처녀>(1958), <올리비아>(1951), <크랙>(2009)은 프로이트에 의해 집단적 동일시의 ‘감염’을 설명하는 예시로 동원된 여학생 기숙사를 배경 삼고 있는 ‘여적여’ 장르와 ‘여성 동성애’ 장르의 정전이다. ‘여적여’가 실은 여성 동성애 관계고, 반대로 여성 동성애 관계가 실은 ‘혐관’임을 폭로하는 <블랙 스완>(2011),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와 같은 영화들도 두 장르 모두에서 언급될 수 있다.
다만, 계속해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만약 ‘여적여’ 장르가 그들 사이의 우정 혹은 사랑을 아직 깨닫지 못해 이를 질투와 폭력으로 표출할 뿐인 ‘여성 동성애’ 장르라면, 여성들간 ‘진짜’ 적대 관계는 어떻게 가시화될 수 있는가? 문화이론가 시앤 나이는 페미니즘 비평에 의해 구제 불가 판정을 받은 <위험한 독신녀>(1992)를 ‘여적여’ 장르의 예시로 언급한다. 영화는 그 모든 이해와 공감, 우정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망 없는 사생결단으로 치닫는 ‘여적여’ 관계의 한 극단을 보여준다. 즉 동일시의 기대가 실패한 자리에 ‘여적여’의 분노와 폭력이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적대 관계도 관계다. 우리(특히 페미니스트를 가리킨다)에게 필요한 건 오히려 ‘여적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인 대신, 타협할 수 없는 간극을 보존하는 ‘여적여’ 또한 여성들간 관계의 일종이기도 하다는 관점 아닐까.
이연숙(리타)의 장르의 감정지난 수십년간 시각예술과 대중문화에서 부상한 우리 시대의 새로운 ‘장르’를 분석함으로써, ‘지금 여기’라는 현재의 조건 속에서 출현 중인 지배적인 감정 구조를 포착해보려는 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