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가 되어 사막을 달리는 두 여자의 자동차와 에드 해리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델마와 루이스>의 구도를 재현하되 종래의 고전적 낭만을 걷어내고 가차 없는 폭력을 가미한 1980년대 배경의 퀴어영화다. 지역 갱스터인 아버지(에드 해리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젊은 여성 루(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보디빌더 대회의 우승을 꿈꾸는 재키(케이티 M. 오브라이언)의 사랑은 제어되지 않는 육체적 충돌들로 시험받는다. 험악한 누아르를 고수하며 부분적으로는 데이비드 크로넌버그를 연상시키는 초현실적 미장센을 구사하고, 마침내 걸리버 여행기 스타일의 판타지까지 나아가는 이 독특한 로맨스의 기둥은, 자세히 보면 삼각관계다. 팽창하는 근육과 부서지는 어금니의 세계에서 루와 재키는 잘 어울리는 한쌍일 테지만 애나 바리시니코프가 연기한 데이지는 안타까운 이종임에 틀림없다. 러플 장식이 달린 꽃무늬 상의를 입고 흰 우유를 들이켜는 데이지는 연약한 내면의 소유자가 갈망에 압도될 때 발산하는 광기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동안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샌디, Apple TV+ 시리즈 <디킨슨>의 라비니아 역으로 이름을 애나 바리시니코프는 좁은 터전에 붙박인 채 곧잘 지워지거나 분에 찬 여성의 용광로를 드러내는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곤 했다. 뒤틀린 소녀성, 애처로운 미성숙함, 괴짜의 절망스러움을 표현하는 데 유난한 섬세함을 발휘하는 그에게 <러브 라이즈 블리딩>과의 절묘한 만남에 대해 물었다.
- 데이지는 외양에서 성격적 특질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캐릭터다. 배우의 해석을 들려준다면.
=이름에서 대단히 여성스럽고 아이 같은 느낌을 연상해볼 수 있었다. 시나리오에 이미 훌륭한 단서들이 많았다. 계속 우유를 마시고 이가 성치 않다는 설정처럼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기도 하고 때로 사악하기도 한, 그래서 예측이 잘되지 않는 어른 아이라고 느꼈다. 데이지는 자기 자신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재키와 대비된다. 왜 루가 데이지를 좋아하지 않는지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슬프게도. (웃음) 강인하게 몸을 키운 재키와 달리 데이지는 축 처지고 기름진 머리를 하고 슬리퍼를 끌고 다닌다. 집 밖에서의 모습으로 유추하건대 집 안에서도 꽤 불행한 상황에 처했을 수 있다. 루가 재키를 자신의 터전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여기는 것처럼, 데이지에게도 루가 본인의 불행한 삶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 혹은 더 나은 삶을 향한 희망일 것이라 생각했다.
- 1989년, 협곡들이 줄지어 선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80년대 미국 지방 소도시에서 살아간 가난한 퀴어 여성의 삶을 상상해보게 된다.
=태어난 이후로 자기 동네 밖으로 나간 적이 단 한번도 없는 여자를 상상했다. 주변에 자신을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한 사람이 많지 않거나 혹은 다들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데이지는 더더욱 루만이 자기의 유일한 상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돈도 없는데 약에 중독되어 있다. 그래서 루와 데이지의 관계를 처음 보여주는 장면이 더더욱 중요했다. 체육관 화장실에서 데이지를 만난 루가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는 대신 돈을 쥐어주는 장면이 정말 가슴 아프다. 왜냐하면 나는 여기서 데이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거절당해 무척 속상한 동시에, 궁핍한 가운데 돈이 생기는 반가움도 느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굉장히 와일드하고 스타일리시한 장르영화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만이 느끼는 진실한 감정이 핵심으로 자리한다. 때로 모순적이고 그래서 애처로운 사랑이란 감정 말이다. 뒤틀려있을지 몰라도 데이지가 루에게 느끼는 감정도 사랑이다.
- 영국인 감독 로즈 글래스가 1989년 뉴멕시코의 작은 사막 마을 앨버커키를 재현했다. 캐릭터에 지역적 특색을 반영하려고도 했나.
=나는 로즈 글래스가 이방인으로서 매우 미국적인 영화에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를 존중한다. 로즈의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국인이 상상한 미국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미국 관객보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작으로 선보이게 된 것처럼 해외 관객이 보기에 더욱 최적이다. (웃음) 그래서 내게도 로컬의 디테일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데이지가 아주 작은 동네에서 평생 갇혀 있었다는 느낌이었다. 늦은 밤 도로에서 JJ의 시체를 싣고 떠나는 루와 재키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데이지는 엄청난 스릴을 느꼈을 것이다. 그만큼 언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동네니까.
- 말한 것처럼 데이지는 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로 서스펜스의 열쇠를 쥐고 있다. 사랑하는 루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숨겨줄 수도 있고, 복수심을 빌미로 커플을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다. 선악의 미묘한 스펙트럼 위에 인물을 위치시키는 과정에 어떻게 접근했나.
=<러브 라이즈 블리딩>을 관계의 ‘힘’에 관한 영화로 이해하자 도움이 됐다. 루와 재키의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완력이 물론 가장 중요할 것이다. 개별 캐릭터로 보아도 각자가 힘을 발휘하는 장면들이 따로 있다. 우선 재키는 육체적인 힘을 가지고 매력을 발산한다. 데이지는 범죄 사건의 목격자라는 바로 그 지위로 인해 후반부에 루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자신만의 힘을 가지게 된다. 둘의 약점을 알게 되었기에 어쩌면 재키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나는 데이지가 루를 사랑하는 마음과, 관계를 휘두르는 권력에 대한 욕망 사이를 아주 오묘하게 오가기를 바랐다. 이런 판단이 가능했던 건 내 역할을 받아들일 때 도덕적으로만 판단하지 않으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오직 데이지에 이입해 해석하자면, <러브 라이즈 블리딩>의 후반부는 그동안 아무런 힘이 없었던 여자가 처음으로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게 된 놀라운 순간들일 수 있다.
- 배우가 자신의 인물을 판단하지 않고 공감 또는 연민할 때 좋은 연기가 나온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특히 자신의 캐릭터가 무언가 나쁜 일을 할 경우에 좋은 방법이 된다. 어떤 식으로든 공감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면,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더 깊이를 찾게 된다. 그의 동기, 숨은 감정, 한겹 아래에 자리한 여러 심리들을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숨겨진 것들이 속속 보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 본연의 목소리보다 훨씬 얇고 높은 톤으로 연기했다. 대사의 톤과 어조를 조형할 때 신경 쓴 부분은.
=데이지가 루에게 굉장히 귀찮고 성가신 인물이란 점에서 목소리에서도 약간 거북한 느낌을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엔 목소리에 관한 나의 개인적인 콤플렉스도 엮여 있을지 모르겠다. 언제나 나 자신에게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연기 스승들에게 항상 목소리를 낮추라는 지도를 받곤 했다. 더 낮고 안정적인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얇고 높은 목소리는 내가 숨기고 싶은 약점 중 하나인데, 이번엔 내 약점을 한번 마음껏 써보겠다는 심정으로 임했다.
- 약점을 더 부각함으로써 오히려 강점으로 승화했으니 자신다움을 받아들인 과정이라고 해보자. <러브 라이즈 블리딩>을 끝낸 지금,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내 과거를 찬찬히 돌아보게 됐다. 목소리 코칭을 받을 때마다 실제 내가 가진 목소리보다 더 높은 목소리를 사용한다는 지적을 받곤 했는데, 나는 왜 그랬을까? 성장 과정에서 내가 여성성을 이해하고 사용하는 방식과 결부된 문제다. 조금 더 밝고 얇고 친절한 소리를 낼 때 사람들이 나를 덜 부담스러워하고 더 귀여워해주는 경험을 흡수하면서 나도 모르게 그 안에 갇혔던 건 아닐까 싶다. 때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위험한 상황을 모면하거나 안전장치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의 그 목소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러니까 나와 내 캐릭터를 위해 쓰려고 한다. 목소리를 컨트롤하는 것이 내게는 배우로서 민감한 이슈가 되었으니 그만큼 역할마다 다양한 목소리를 연구하고 싶다.
- 후반부로 갈수록 다양한 폭력 신에서 슬랩스틱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액션이 강조된 장면을 준비하는 과정은 어땠나.
=데이지가 총 맞는 장면이나 목 졸리는 장면 등은 굉장히 기술적으로 접근해야 했다. 전적으로 크리스틴 스튜어트에게 크게 의지했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보여주면서) 크리스틴은 “너무 걱정 말고 그냥 이렇게 해 봐!” 하는 식으로 내게 익살맞게 시연해주곤 했다. 넘어지는 순간에 허리를 잡을지 어떤 식으로 밀착할지 등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가이드를 따랐다. 총을 맞고 그대로 엎어지는 장면은 첫 테이크 만에 오케이가 떨어졌다. 각본상엔 바로 직전까지도 “데이지가 루에게 제대로 키스하려고 한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해간 장면이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갔더니 원신 원테이크로 간다고 하고, 나는 죽을 때 토를 하는 설정을 위해 액체 소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입 안에 물고 있어야 했다. 키스신을 위한 내 모든 계획은 그 자리에서 무산된 것이다. (웃음)
- 유년 시절부터 뉴욕에서 연극무대를 경험했고 아버지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어머니 리사 라인하트 모두 걸출한 안무가이자 무용수다. 매체에서도 몸짓을 과감히 활용하는 연기를 늘 갈망했을 듯싶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몸을 잘 써야 한다는 걸 늘 강조하셨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의 그림자를 의식하면서 자랐고, 내가 절대 부모님만큼 춤을 잘 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춤은 정말 싫다고 생각했다. 절대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쓴 적도 있다. 성인이 되어서야 카메라 앞에서 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스스로 실험한 것 같다. 연극계에 있다가 처음 촬영장에 갔을 때, 카메라가 가까이 올 때마다 몸이 경직되는 걸 느꼈다. 그러다 점차 타이트숏에선 몸의 미세한 움직임이 큰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와이드숏에선 그보다 과감히 움직여야 한다는 것 등을 배워가면서 차츰 편안해졌다.
- 영화 말미에 죽은 줄 알았던 데이지가 잠시 깨어나고, 루가 그를 처리한다. 이 잔인한 코미디를 어떻게 받아들였나.
=단연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신이다. 자기 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을 쏟아온 루가 끝내 자신의 아버지처럼 되어버리는 장면으로 봤다. 재키의 잠든 모습 너머로 루가 데이지의 시체를 사막 위에 끌고 나와서, 데이지의 가방에서 꺼낸 담배를 꺼내 피운다. 루는 그동안 담배를 끊기 위해서도 애써왔지만 역시 실패한 것이다. 결국 사람도 죽이게 되고, 그 죽은 여자의 가방에서 꺼낸 담배까지 피우는 모습이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상상할 수 있는 자신의 최악의 버전도 끌어안는 인간을 말해주는 것 같다. 물론 카펫에 싸여 질질 끌려다니는 내 모습을 보는 일은 정말 이상한 기분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