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터뷰]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배우 남궁민
2024-07-16
글 : 정재현
사진 : 오계옥

시청자로부터 호응을 받은 남궁민의 작품을 돌아보면, 그는 언제나 다른 문화권으로부터 홀연히 이식된 남자를 연기해왔다. <내 마음이 들리니>의 봉마루는 자진해 가난한 원가족을 등지고 우경그룹의 양자로 다시 태어나는 길을 택했다. <김과장>의 김성룡 과장은 지역 조직폭력단의 회계장부를 처리하던 재능으로 TQ그룹 경리부에 입사해 그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내 구성원들과 끝내 정의를 실현한다. 야구단 재송드림즈에 새로 부임한 <스토브리그>의 백승수 단장, 능군리에 불현듯 안착해 마을 사람들의 심기를 들쑤시는 <연인>의 이장현은 말할 것도 없다. <닥터 프리즈너>의 나이제는 서서울교도소로 직접 향해 복수를 실현하고 <검은태양>의 한지혁은 스스로 1년치의 과거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사람이 돼 국정원에 들어간다. 흰 양 떼 사이의 검은 양처럼 보이던 남궁민의 남자들은 고여 있던 공동체와 마침내 융화하고, 그곳의 문화를 바꾸는 데 성공한다. 그곳에 없던 남자들처럼, 남궁민 또한 본인을 철저히 지운 채 ‘남궁민 드라마’에 쏟아지는 모든 기대를 충족하고 설득해냈다. 제목이 곧 1인칭 주인공인 작품의 주연배우로 자리하고 4년 사이 3번의 연기대상을 받기까지. 어느 날 돌연 등장한 젊은 남자배우가 30, 40대에 이르러 작품을 보기도 전에 배우의 이름만으로 믿음을 주게 되기까지의 시간을 되짚어보았다.

- 많은 사람들이 남궁민의 진가를 처음 인식한 작품이 <내 마음이 들리니>(2011)의 봉마루였다. 아직도 남궁민 관련 게시물에 ‘마루오빠’를 찾는 댓글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착한 소년이 악한 남자로 변해가는 마루의 여정이 몹시 안타까웠다. 분명 악행을 저지르지만 그에게 가엾은 구석도 있어 시청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악역을 연기하면 시청자들에게 미움을 받던 때였다. 작품의 인기로 MBC <뉴스데스크>에 나갔을 때 “악역인데 어떻게 시청자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 나?”라는 질문까지 받았을 정도니 말이다. 당시엔 연기 경력이 오래되지 않아 여러 경험을 쌓던 때였는데, 제작 여건이 지금과 달라 모든 촬영이 촉박하게 진행됐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후회가 없는 작품이다.

- 당시 <씨네21> 인터뷰에 의하면 현장에서 바로 연기를 점검할 수 있는 캠코더를 따로 준비해 다녔다고. <나 혼자 산다>에서 공개한 <스토브리그> 촬영 현장을 보니 그 뒤로도 쭉 연기 모니터링을 할 수 있는 카메라를 들고 다닌 듯하다.

모든 배우가 마찬가지일 거다. 나의 연기가 항상 마음에 드는 게 아니다. 방송분은 베스트 컷만 모아 나가지 않나. 어떻게 하면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지 고심하다 보니 반성의 시간을 늘리는 게 최선이었다. 아쉬웠던 나의 연기를 돌아보는 횟수를 늘리면, 스스로 생각하기에 부족한 지점을 좀더 많이 찾아 고칠 수 있어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캠코더 이전엔 휴대폰이었다. 영상기술의 진보에 맞춰 기기도 발전 중이다. (웃음)

- <냄새를 보는 소녀>의 권재희와 <리멤버-아들의 전쟁>의 남규만을 연기한 2015년은 배우 남궁민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해다. 두 캐릭터는 모두 사이코패스 살인범이었다. 감정의 기복과 에너지 소모가 많을 수밖에 없는 배역을 연이어 연기한 시기를 어떻게 기억하나.

두 역할이 겹친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재희가 MBTI 중 I(내향형) 유형이라면 규만은 E(외향형) 유형의 캐릭터였으니까. 재희는 살인범인 동시에 신사적인 스타 셰프다. 지금으로 따지면 넷플릭스 시리즈 <너의 모든 것> 속 조(펜 배질리) 같은 역할이었다. 당시로선 무척 색다른 이야기고 캐릭터여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규만은 분명 나쁜 놈인데 밉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처음엔 그렇게 방정맞게 화를 내는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점잖지 못하게 연기하니 많이들 좋아해주었다. 작품 초반 규만이 동호(박성웅)를 옥상에서 구타하는 장면을 찍던 날이 생각난다. 규만으로서 덜 분노한 것 같아 한번만 다시 가겠다고 했더니 감독님이 의아해하며 촬영 분량을 보여주셨다. 윗단계가 더 있나 싶게 화가 나 있더라. (웃음) <리멤버-아들의 전쟁>을 촬영할 땐 잠시 스타일리스트가 없던 시기였다. 직접 양복점을 돌아다니며 스리피스 정장을 일일이 테일러링했다. 당시 옆집에 양복 전문가 형이 살아서 촬영 전마다 양복을 바닥에 전부 펼쳐놓고 상하의 조합도 함께 고민하며 규만을 만들어갔다. 그때 훈련해둔 덕분에 지금은 어느 정도 양복 조합에 능숙해졌다.

- <스토브리그>는 평단과 대중 모두의 선택을 받은 작품이었다. 백승수는 ‘나는’이라고 주어를 밝히지 않아도 군중이 그의 말에 절로 감화되는 PT의 귀재다. 또한 자기 확신이 강한 리더라 본인이 이미 해답을 아는 상태에서 대화 상대에게 “왜 그럴까요?”라며 역질문한다. 여러모로 재밌는 화법의 소유자다.

스스로가 정답을 강요하지 않지만 그의 모든 문장에 “내가 맞다”의 함의가 깔려 있으니 청자 입장에선 짜증날 수밖에 없는 인물형이다. 백승수가 재송드림즈의 기존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판단을 강행하는 브리핑을 할 때 말에서 강조점이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겐 “내가 주인공이니 내 말을 들어야 한다”보다 세련된 화법이 필요했다. 그렇게 백승수 특유의 무심한 톤을 만들어갔고, 감독님도 이를 잘 살릴 수 있는 방향의 연출을 함께 고민해주셨다. 백승수처럼 말할 때 오히려 청자는 상대의 주장을 강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나 또한 백승수와는… 말싸움하고 싶지 않다.

- 두 번째 연기대상 수상작인 <검은태양>에선 카 체이싱, 총격전 등 에피소드마다 격렬한 액션 연기를 소화했다. 바로 다음 작품인 <연인>까지도 액션 연기가 이어졌는데.

<검은태양>부터 무술감독과 어떤 식으로 액션을 보일지 함께 치열하게 구상했다. 커리큘럼을 짜듯 컷 전환과 타격의 방식을 숙지한 후 액션스쿨에 가 끝없이 연습하는 식이다. 지혁은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전사를 지닌 남자라 노상 울적할 수밖에 없다. 마침 몸집을 키운다며 하루 3시간씩 주 6회 운동을 하던 때라 심신의 고통이 지혁에게 고스란히 반영됐다. 데뷔 이후 여태 운동해온 경력이 있으니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운동을 시작했는데, 정말 과정이 쉽진 않았다. 샤워하다 말고 주저앉아 초라하게 울던 날도 많았다.

- 언급했던 모니터링용 카메라를 포함해 연기에 관한 셀프 피드백을 적어둔 연기 노트의 일부를 공개한 적 있다. 계속해 본인의 연기를 점검하는 동력은 어디서 오나. 공개된 노트를 보니 보컬 트레이너처럼 발성기관의 역학이나 한국어 음운의 음성적 특징까지 기록해뒀다.

어제도 노트를 썼다. 자평하자면 나는 감성적인 사람이고, 감정의 깊이를 섬세하게 느끼는 사람이지만 그렇다 하여 연기에 타고난 재능을 보유한 배우는 아니다. 그래서 끝없이 결과물을 반성하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무얼 놓치고 있진 않을까 하는 불안함에 공부할 수 있는 모든 걸 숙지한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선 내가 이전에 배운 걸 다 빼는 연습을 항상 한다. 이미 마친 노력은 내 안에 남아 있기 때문에 현장에서 노트에 적어둔 내용에 집착하는 순간 다른 상념에 빠지거나 과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발성을 제대로 훈련하기 위해 보컬트레이닝도 받았고 신체 기관도를 연구하던 때도 있었다. 그 시간을 거쳐 성대는 감정에 의해 접지한다는 걸 깨우쳤다. 머릿속으로 끝없이 분석해 명령을 내리기보다 지금 내가 연기해야 할 감정에 집중하면 원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렇게 투자한 모든 시간이 내게 배우로서 자신감을 선사했고 자존감을 높여줬다. 장면엔 운명이 있다고 믿는다. 오늘 내가 최대치를 연기할 수 있음에도 능력치에 미치지 못했다면 그 또한 운명이다. 다만 내가 준비 과정에서 거듭 최선을 다하면 그 자체로 자존감이 되고 나를 향한 신뢰로 돌아온다. 그렇게 누적한 시간이 예술가의 깊이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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