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사람들은 종종 ‘별점’을 두고 이야기하곤 한다. 별점을 짜게 주기로 소문난 어떤 평론가가 다섯개 혹은 열개의 별들 가운데 절반 넘게 색칠을 해주면, 잠시간 웅성거림이 나타난다. 20자 비평 속에 ‘명징’과 ‘직조’라는 단어를 집어넣어 일대 소란을 일으켰던 유명 평론가의 별점에는 그것을 비평하는 또 다른 대중 별점이 달리곤 한다. 대개는 ‘내 감상’과 ‘그의 평가’가 어긋나는 곳에서 폭발한다. 내 감상보다 높은 점수면 ‘돈 받아먹은 평론’이 되기 십상이다. 이보다 더 크게, 훨씬 더 자주 발생하는 문제는 내 감상보다 형편없는 점수가 부여될 때다. 그런 평론은 ‘먹물의 것’이고, 알아먹지 못할 말로 잘난 척하는 것에 불과한 ‘재수 없는’ 비평이 되고 만다.
이미 그 징조는 그 유명했던 ‘<디워> 논쟁’에서부터 나타났다. 대중과 비평가 사이의 대치전선이 뚜렷했던 당시, 솔직히, 한쪽의 비평의 질도 그리 높지 못했지만 다른 한편에서 폭발했던 반응도 아리송했다. 대립의 핵심은 ‘대놓고 감정을 건드린 비평’과 ‘내 감정을 무시하지 말라는 집단적 반발’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다. ‘눈에 보이는 평론’과 ‘눈에 보이지 않은 채 각자 고립되어 있던 대중적 감상’이라는 기존의 일방향적 ‘비평 커뮤니케이션’ 구조가 붕괴된 것. 숨겨지고 고립돼 있던 감상이 삽시간에 가시화돼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새로운 구조가 이미 등장해 있었다.
이런 커뮤니케이션 구조는 점점 더 지배적이 되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내리까는 비평이 대중시장에 기초를 둔 현대 영상산업을 이끌 평론 패러다임일 수 없음은 이제 자명하다. 상대적 소수에게만 의미를 갖는, 고도의 정합성과 혜안이 결합된 학술적·전문가적 평론이 필요한 것은 여전하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산속에 가둬둔 호수 같은 거라면, 대중 담론의 일부로서의 평론은 전문 영역이라는 절벽과 대중이라는 모래톱 사이를 흐르는 강물 같은 것이다. 꺾임과 패임이 심해서, 급류가 되었다가 별안간 평탄한 (그러나 매우 깊고 때로 모든 것을 빨아들일 회오리도 품고 있기에 여전히 무시무시한) 물웅덩이와 만나기도 한다.
비단 영화평론만 그럴까. 문학평론, 음악평론, 미술평론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평론과 사회평론 역시 다를 바 없다. 나만 잘난 줄 알았던 평론가가 ‘나도 잘났다, 아니 내 감정이 더 맞다!’고 확신하는 대중과 마주한다. 넘치는 논평들 속에, 특수한 커뮤니케이션 양식으로서의 평론은 갈 길을 잃은 채 물속에 처박혀 꼬륵대고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