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었던 배우나 감독을 직접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직업이 영화기자라고 밝혔을 때 빠지지 않고 듣는 말이다. 매번 나를 곤란하게 하는 질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질문을 업으로 삼은 기자는 많은 이들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특권을 누린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누군가를 꼭 만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던 적은 거의 없었다. 감정 기복이 적은 편이라(실은 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상태을 기본으로 하는 인간 ‘우울이’가 바로 나다) 주변에서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 악영향일까. 무언가를 강렬하게 동경하는 마음을 품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때는 좋아하는 대상을 좀처럼 발견하지 못하는 무딘 마음이 기자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마음이 가벼워진 건 형형색색 개성 넘치는 팬심들을 마주하면서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일치했다면 당연히 행복했겠지만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조금만 애정을 기울여 주변을 둘러보면 다른 종류의 기쁨들이 도처에 피어 있다. 지금에 와선 그 마음에 ‘무디다’는 자괴감 대신 ‘느림’이란 이름표를 달아주고 싶다. 다양한 방식으로 각자의 애정을 드러내는 팬들을 통해 거꾸로 뜨겁지 않아도, 아니 뜨겁지 않아서 제대로 보이는 것들도 있음을 깨달았다.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없어도 상관없다. 일단 누군가를 만나 정성을 다해 듣다 보면 궁금해지는 것들이 점점 늘어난다. 계속 궁금해진다. 그렇게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찬찬히 오래 생각할 때 비로소 말을 걸어오는 것들은 시간이 갈수록 어여쁘다.
바로 이번주, 아쉬워서 더 진하게 채워지는 기쁨을 오랜만에 맛보았다. 충무로에서 꽤 오랫동안 진행 중인 강의가 있는데, 두세달에 한번씩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편하게 나누는 자리다. 이론적인 설명을 하는 ‘강의’라기보다는 편하게 ‘수다’를 나누는 시간인데, 이번달에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대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내게 이 영화는 처음에는 놀람이었고, 두 번째는 부끄러움이었으며, 지금은 허기로 기억된다. 말을 아무리 꺼내고 던지고 채워도 모자란 기분. 거대한 검은 구멍 같은 영화를 가운데 놓고 옹기종기 모여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객석에 앉아 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눈동자에 새겨진다. 떠올랐다가 금세 잊어버린다. 그렇게 취향을 공유하는 한 덩어리가 된다, 는 기분 좋은 착각의 시간이 감사하다.
요즘은 누군가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설렌다. 막상 상대 앞에선 미처 건네지 못한 말들이 계속 떠오르는 게 즐겁다. 말하지 못한 후회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상대의 표정, 얼굴, 반응들이 뒤늦게 떠올라 다시금 혼자만의 대화를 시작한다. (한번도 무언가의 팬이었던 적이 없는 나는) 어쩌면 팬이 된다는 게 이런 기분이 아닐까, 짐작 중이다. 계속 말을 건네고 싶은 마음은 무언가를 조건 없이 애정하는 행동을 닮았다. (마음이 넘쳐흘러) 전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지만 설사 모두 전하지 못할지라도 썩 나쁘지 않은 이상한 기분. 전하지 못해도 이미 충만한 시간 속에서, 다시금 각각의 얼굴을 떠올린다. 따로 또 함께. 오래 품은 채 곱씹는 시간 속에 나름의 행복이 깃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