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과잉으로 허술함을 가리다, <돌풍>
2024-08-07
글 : 정준희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언론학자)

넷플릭스 정치드라마 <돌풍>에 대한 칼럼 제안을 받고 잠시 머뭇거렸다. 12화를 전부 보기 위해 들여야 할 시간이 아까운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긴 시간을 들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할 것을 알았고, 그런 불쾌함을 표현한 글이 또 다른 이들을 불쾌하게 할까봐 미리 불편해지는 게 싫었다. 요즘의 비평 세태가 종종 그렇듯, 나와 비슷한 감상을 가졌던 이라면 ‘불쾌함의 이유’에 공감하겠지만, 재밌게 본 이들이라면 자신이 느낀 ‘유쾌함’에 찬물을 끼얹는 글을 접하고는 필경 ‘586 꼰대’를 운운하며 불화살을 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주변에 물어봤다. <돌풍>이 어떻더냐고. 다수는 아직 보지 않았는데, 그 보지 않은 이유가 나와 비슷했다. 보았던 소수는 나와 비슷한 이유로 불쾌감을 느꼈다. 그 와중에 그럭저럭 재밌게 본 이들도 없지 않았다. 소수 중의 소수에 해당했지만 말이다. 흥미롭게도, 결국 <돌풍>을 보고 난 내 감상의 구성비와 비슷했다.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분포가 나라는 인간의 내적 조성을 반영하는 듯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비율을 따라 어쭙잖은 비평 글을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당신이 ‘유쾌함’을 느꼈다면

먼저 <돌풍>에서 ‘유쾌함’을 느낀 이들이 보았을 장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드라마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들을 폭넓게 포괄한다. 재벌, 정치권력, 검찰, 사법부. 중요한 건 이들의 구성인데, 기득권에 저항했던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역시 이미 이 기득권의 (심지어!) 주류가 됐거나 그들과 적극 결탁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요컨대 재벌을 꼭짓점에 두고, 한쪽에는 군부독재에서 연원한 전통 기득권으로서의 (극)우파 세력과 그들의 정치적 동원 수단인 ‘태극기부대’가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선거와 사법고시 등을 통해 주류 진출에 성공한 신흥 기득권인 민주화운동 세력 및 언필칭 ‘귀족노조’ 등이 있다. 이 기득권 삼각구도의 밑단을 이루는 양측은 권력과 이권을 놓고 서로 피 튀기게 경쟁하면서도 때로 비열하게 공모한다. “남쪽이 살려면 북쪽이 죽어야 된다”라는 대사의 연장인 셈이다. 남과 북은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것 같지만 결국 각자의 기득권을 위해 ‘적대적 공존’을 택했다는 것이고, 산업화와 민주화로 대비되는 한국 현대 정치의 권력 구도 속에서도 재연되었다는 의미.

이런 시각, 그리고 엎치락뒤치락하는 전개 과정에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기득권과 저항 세력의 대당이 독재와 민주화의 기존 구도로는 온전히 품어질 수 없게 된 한국 정치의 변화와 복잡성 때문이다. 그러나 <돌풍>의 단점은 정확히 이 지점에서 오히려 도드라진다. 변화의 복잡성을 다루겠다며 내민 철학과 서사구조치고는 지나치게 단순한 탓이다. 민주화 세력은 집권을 거치면서 기득권이 됐고, 과거의 상처와 영광을 팔아 자기 배 불리는 데 혈안이어서, 이제는 사회 개혁에 장애물만 될 뿐이라는 진단. 설혹 부분적으로나마 진실을 짚고 있다고 인정해준들 전체의 진실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고, 정치 현실의 맥을 정확히 짚지 못하며, 개혁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도리어 더 큰 장애를 안기는 문제 설정이라는 건 여전하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은 독살당해 마땅할 만큼 부정을 저질렀고, 기득권끼리 상호 결탁한 부정부패를 극소수의 정의로운 검찰이 징치할 수 있으며, 교언영색을 일삼는 민주화운동 출신 차기 권력자에게 살인 혐의를 씌우기 위해 스스로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현대판 남성 논개에도 못 미칠) 길을 선택함으로써 개혁을 도모할 수 있다고? 흠… 정말?

실명에 가까운 어떤 언급들과 작품의 비겁함

그런 면에서 <돌풍>이 과감하게 선택한 ‘직접 언급’ 방식은 도리어 허술하고 비겁하다. 새로운 악의 축으로 호명된 전대협 의장, 문화선전국장, 조통위원장 그리고 민주노총 위원장은 물론이고, 김대중을 연상케 하는 노벨 평화상과 누가 봐도 노무현을 되부르는 죽음의 방식, 사모펀드와 가상화폐거래소로 대표되는 부정부패의 양식 등에 이르기까지, 신흥 기득권이라 지칭된 이들에게 씌워진 혐의를 거의 실명에 가깝게 모욕적으로 엮어낸다. 그에 반해 전통 기득권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이 도통 없다. 반대 당 거물 정치인의 공안검사 이력과 아스팔트 우파와의 긴밀한 관계 정도를 제외하고는, 정주영과 이건희를 연상케 하는 대진그룹 총수 일가가 고작이다. 뭐 이해는 간다. 삼성과 현대를 거명하고 치러야 할 송사, 보수를 자칭하는 정당과 정치인 그리고 자유총연맹이나 각종 (극)우파 단체를 호출했을 때 맞아야 할 치도곤 등을 생각하면 그렇다. 그에 반해 전대협과 민주노총 당사자들은 실효적 행위 같은 건 엄두도 못 낼 테다. 설혹 문제 제기를 하더라도 ‘민주를 표방하면서 정작 예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 운운하며 언론이 호된 몽둥이질을 해줄 것이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이런 식의 직접 언급은 마치 현실을 과감히 반영하는 것 같지만 현실을 더 그릇된 방향으로 비틀어버린다. 기껏해야 좌 또는 우가 아니라 반기득권의 입장에 서 있음을 웅변하기 위한 알리바이 장치일 뿐, 실상은 철학, 정치학, 사회학, 심리학, 무엇보다 영상학의 빈곤을 가리는 너절한 천 쪼가리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의 강고한 기득권 카르텔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떤 노하우로 자신을 유지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고들지 못한다. 그러니 피곤할 정도로 잦은 반전을 통해 마치 대단한 플롯이라도 되는 양 요설을 펼칠밖에. 제아무리 최고위급 인사라고 해도, 독극물을 품고 청와대에 들어간다거나 대통령 얼굴에 젖은 손수건 한장을 덮어 죽일 수 있다고? 헌법재판관을 그렇게 불러 모아서 돈가방을 안긴다고? 그 많은 협잡이 전화 통화로, 심지어 옥중 화상 대화로 이뤄진다고? 따라서 이런 알리바이는 ‘현장 부재증명’이 아니라 ‘리얼리티 부재증명’이라 부르는 게 맞다.

이에 수반되는 캐릭터의 헐렁함도 문제다. 예컨대 명색이 ‘아치 에너미’급 최고 ‘빌런’인 정수진(김희애)은 위기 앞에서 매번 세상 무너지는 불쌍한 얼굴을 한다. 그러다가 또 매번 모든 걸 다 알고 완벽히 주무르는 표정으로 재반전을 꾀한다. 끔찍한 물고문도 버텼던 전대협 문화선전국장의 갸륵함과 권력의 단맛을 알아버린 기득권자의 간교함을 동시에 지닌 ‘입체적 인물’로 그리기 위해서라고, 행여나 변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그저 정치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그 모순의 핵심이 무언지 꿰뚫지 못한 배우의 연기력 부족이거나, 피상적인 반전-재반전 구조로 12화를 내내 끌고 간 작가와 연출자의 역량 결핍일 따름이다.

하지만 솔직히 현실 권력이 하는 짓이 이런 허술한 철학과 플롯보다도 더 형편없긴 하다. 그러다 보니 애초에 참조하고 재현할 현실이라는 것 자체가 더 엉망진창인 것도 사실이다. 다만, 미래의 현실 정치가 ‘스스로를 더럽혀 정의를 이루는 검사 출신 정치인’의 자해극과 ‘부패한 정치 검찰 안에서 홀로 선 정의로운 검사’의 수사극의 결합으로 흐르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다. <돌풍>이 그리는 것 마냥 시민은 그렇게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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