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그림, 만화, 광고, 영상 작품처럼 여러 영화도 <최후의 만찬>(1495`~98)을 인용한다. 최후의 만찬 도상은 반복적으로 그려진 기독교 도상 중 하나이고,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의 구도는 에펠탑의 실루엣만큼이나 유명하다. <최후의 만찬>은 인터넷 밈처럼 가볍게 사용되는가 하면, 짐짓 심각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비리디아나>(1961), 피에로 파올로 파솔리니 감독의 <맘마 로마>(1962) 같은 경우가 그렇다. 매춘 포주를 도상 속 예수의 자리에 배치한 <맘마 로마>는 최근 논란이 된 파리올림픽 개막식 장면 못지않게 불손한 장면일 것이다. 이번 올림픽 개막식에선 센강 다리 위에서 스트리트댄스를 추던 드랙 퀸, 어린이, 장애인, 초고도 비만인 등이 디오니소스로 분장한 가수 뒤쪽에 서며 활인화(tableau vivant, 살아 있는 모델이 회화, 조각, 문학 속 구성을 현실 공간에 정지상태로 구현하는 것. 지난 연재 참조)를 만들어냈다.
최후의 만찬 도상은 주로 긴 식탁, 예수, 예수를 배반할 유다를 포함한 예수의 열두 제자 등을 재현한다. 올림픽 개막식에선 DJ 역할을 했던 레즈비언 액티비스트 여성이 가운데 있었으니, 이를 <최후의 만찬> 활인화라고 확신한 이들은 그가 예수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고, 퀴어한 존재들이 예수의 제자 자리를 차지해 불순하다고 비난했다. 종교재판의 가혹한 역사를 기억하는 프랑스는 종교에 대한 비판, 풍자, 조롱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하는 편이지만 논란이 불거지자 기독교 신도들에게 상처를 줄 의도로 연출한 장면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연출자는 <최후의 만찬> 도상을 참조한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올림포스 향연>(Le Festin des dieux, 1635~40) 도상을 참조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기독교 도상에서 고대적 정념 형태의 ‘잔존’을 발견하는 아비 바르부르크나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같은 미술사학자라면 개막식 활인화가 참조하고 있는 그림이 무엇인지 구별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중세 이래 사진, 텔레비전, 영화, 유튜브가 없던 시대에도 예수의 탄생과 행적, 죽음과 부활은 쉼 없이 묘사되어왔다. 교회는 신도들에게 종교적 ‘신비’를 보여주기 위해 사제들이 나서 종교극을 공연했고 종교화를 주문했다. 신도들은 1천년 전, 1500년 전, 거의 2천년 전에 지상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태어났다 죽은 인간 예수, 무덤에서 사라진 후 부활한 예수를 두눈으로 보고자 했다. 그래서 종교극은 영화적 시나리오나 미장센이 구성되던 과정이다. 인간과 신성을 구별하는 기독교에서 인간적 모습과 수단으로 신을 가시화하는 일은 신학적 토론과 논란의 대상이었다. 10세기 프랑스 교회의 부활절 아침 미사는 가령 십자가와 수의로 예수의 부활을 보여주려고 했다. 사제가 부활한 신의 아들로 등장하던 12세기 공연은 신성모독의 위험을 무릅쓴 과감한 시도였다. 보여줄 수 없는 존재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어려움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동방박사를 주제로 한 12세기 종교극은 세 사람의 자세를 구체화한다. 첫 번째 동방박사가 무릎을 꿇고 갓 태어난 아기에게 경배하면 두 번째 동방박사는 고개를 돌려 예언을 알리는 별을 가리킨다. 그러니 성경에 쓰이지 않은 것, 예수의 시신이 사라진 관이 있던 장소에 대한 세밀한 묘사, 텅 빈 관을 발견한 여인의 동작, 표정, 동방박사의 몸짓 같은 것은 상상되고 발명되어야 했다. 무덤의 모습을 상상하고, 관의 뚜껑을 열고, 천사가 묘지 건물 앞에 서 있을지, 관에 앉아 있을지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중세 시대 종교극은 미술, 조각, 연극 등 의 도상의 변화와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활인화 형식은 종교극이나 성탄절 말구유 장식 등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물론 활인화는 19세기 이후에는 대중오락 공연장에서도 폭넓게 사용된다. 관객에게 작품 속 에로틱한 포즈를 흉내내고 있는 살아 있는 조각을 360도 각도로 관찰할 수 있는 포맷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세기의 영화 속 종교극 또는 종교화 인용은 종교, 예술, 오락의 형식으로 경합하는 모방의 기술을 살펴볼 계기를 제공한다.
부뉴엘처럼 교회와 사제의 타락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독교 정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파솔리니의 <맘마 로마>에서 에토레가 숨을 거두는 장면은 르네상스 시기 화가 만테냐의 <죽은 예수>의 낯선 구도와 유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감독 본인은 두 이미지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에 결국 진절머리를 냈지만 말이다. 만테냐의 <죽은 예수>에 대한 참조는 그자비에 보부아 감독의 영화 <신과 인간>(Des hommes et des dieux, 2010)에서도 등장한다. 이 영화는 파솔리니나 부뉴엘의 영화와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1996년 알제리 내전 당시 이슬람 반군 세력에 납치 살해된 일곱 가톨릭 수도사들의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영화는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와 기독교 심사위원상을 수상했고, 개봉 후에도 가톨릭 교회와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획득했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사실주의적 구성 대신 생략과 단순함의 영화적 수단을 선택하면서 기독교적 ‘신비’와 ‘은총’의 영화적 현현을 시도했던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1950)의 전통에 낯 간지러울 정도로 직접적으로 오마주를 바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테냐의 <죽은 예수>, 카라바조의 <기둥에 묶인 예수>, 최후의 만찬 구성 등을 참조하고 있다. 특히 감독은 수도사를 최후의 만찬 속 예수와 사도, 카라바조 회화 속 예수의 자리에 놓는 구성을 통해 수도사들의 죽음이 일종의 순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시각적으로 주장한다. 그런데 파솔리니가 만테냐의 <죽은 예수> 속 예수의 자리에 매춘 여성 맘마 로마의 아들 에토레를 놓았던 것과 유사하게, 보부아는 부상당한 이슬람주의 테러리스트를 놓는다. 수도원을 지키고 죽음을 택하는 가톨릭 수도원 수도사의 순교를 자신의 신에 대한 배타적 섬김과 복종으로 그리는 대신 자기 헌신을 통한 넓은 사랑의 실천으로 그리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은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아리아인의 우월한 신체를 내세웠다. 그렇지 않더라도 몸의 문화에 속하는 국가주의 행사인 올림픽은 ‘정상’ 신체들이 신체의 우월함을 뽐내는 행사가 되기 쉽다. <최후의 만찬>이 되었건, <올림포스의 향연>이 되었건, 파리올림픽 개막식은 퀴어의 포즈를 통해 프랑스를 비롯해 서구 근대 사회가 정상성의 표준으로 규정했던 서구, 비장애, 성인, 남성 신체 관념을 문제 삼겠다는 것을 천명했다. 이 일은 사실 중세 교회 사제가 신도들 앞에서 극을 연기했던 것처럼, 가톨릭 정신을 경건하게 다루는 <신과 인간>이 예수의 자리에 테러리스트를 놓았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를 현시하려는 일이고 포용하려는 일이다.
이나라의 누구의 예술도 아닌 영화
“오직 영화만이!”라고 말하는 대신 영화가 모방하는 예술과 경쟁하고, 전염되고, 영향을 주고받는 인터미디어성의 사례에 관하여 그리고 몰래, 보란 듯이,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오래전부터, 새롭게 뒤섞고 뒤섞이는 영화와 예술, 형식과 매체, 장소의 사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체계적인 영화의 과학을 주장하는 대신 영화의 반과학적 계보학을 그리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