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표지는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희생>의 한 장면이다. 예술영화의 아이콘으로 불러도 손색없을 유명한 이미지 중 하나지만 정작 영화를 극장에서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나중에 비디오로 보긴 했지만 제대로 본 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보면서 많이 졸기도 했지만, <희생>은 극장이란 공간의 제약을 필요로 하는 종류의 영화기 때문이다. 똑같이 졸아도 극장에서 시간을 놓치며 졸아야 의미가 있을 것 같은 영화. 이런 이유로 <희생>을 향한 찬사는 실체를 확인하기 힘든 도시 전설을 연상시킨다. 예술영화를 향한 존중과 동경과 허세까지 포함해 <희생>의 아우라는 지난 30년 세월 동안 켜켜이 쌓여왔다.
<희생>이 8월21일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국내 관객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표지에 싣기로 결심했다. 솔직히 최초 개봉도 아니고, 유명 배우가 나오지도 않고, 화제작도 아니기에 표지로 다루기엔 꽤 난감한 작품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표지도 하고 실황공연영화 표지도 한 마당에 재개봉 예술영화를 표지로 못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는 자기합리화를 발판 삼아, 개봉까지 일정이 꽤 남은 상태지만 미리 당겨 표지에 실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를 대자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는 하고 싶으니까. 둘째는 할 수 있으니까. 셋째는 해야 하니까.
기회가 되면 잡지 표지로 장식하고 싶은 영화들의 목록이 있다. <희생>도 그중 하나(였)다. 대단한 감동이나 영감을 얻어서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희생>은 내게 예술영화의 벽을 맛보여준 작품이다. 영화제에서 주로 만날 수 있는 예술영화를 구분하는 방법에 관한 농담이 있다. 하루 3, 4편의 영화를 몰아보면 인간인 이상 반드시 한번은 극장에서 잠든다. 조는 게 정상이다. 그렇게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의식이 날아간 뒤, 개운한 기분과 함께 눈을 떴을 때 여전히 똑같은 화면이 나오고 있으면 그게 예술영화 인증이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 그만큼 느리고 천천히 찍는 방식은 예술영화의 특권인 양 오해를 불러왔다. (진지하게)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1995년 개봉 당시 무려 10만 관객의 돌풍을 일으킨 <희생>에 있다고 생각한다.
<희생>을 잡지 표지로 하고 싶었던 건, 이것이 사유의 증명과도 같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그물 삼아 시간 그 자체를 포획한 <희생>의 한순간을 정지시킨 채 소장하고 싶었다. 이번 <씨네21> 표지가 된 장면을 볼 때마다 영화 속에 유장하게 흐르던 시간이 지루한 감각으로 되살아난다. 이 지루함의 또 다른 이름은 다름 아닌 ‘생각’이다. 고인 듯 내던져진 시간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강제로) 사유할 시간을 선물받는다. 쏟아지는 자극과 조급함 속에 요즘 부쩍 생각의 근육을 잃고 있음을 실감한다. 아니, 생각할 시간 자체가 소진되고 있다. 빈틈과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 시대. 우리에겐 좀더 많은 지루함과 낯섦과 불편함이 필요하다. <트위스터스> <에이리언: 로물루스> <빅토리> 등 많은 개봉작 중 이번주 특집으로 <행복의 나라>를 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소 어둡고 불친절하고 무거울지라도, 리스크가 있을지라도 <씨네21>이 잘할 수 있는 건 놓치지 않고 중요하게 다루려 한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에서 더이상 머뭇거리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