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은 왜 이렇게 재미가 없지?” “안양은 왜 이렇게 평범하지?” 이 질문이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이하 <수카바티>)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수카바티>의 공동연출자인 나바루 감독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무언가에 미친 자들만이 내지를 수 있는 함성에 홀리고 만다. 그리고 자신의 질문이 틀렸음을 깨닫는다. 그 함성의 주인공인 FC안양의 서포터스 ‘RED’는 노잼의 도시였던 안양을 극락의 도시로 도약시킨다. 무엇이 그들을 미치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축구의 힘인가? 아니면 안양의 힘인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가? 그렇게 <수카바티>는 출발점에서 제기된 질문을 질적으로 다른 질문으로 이어가며, 관객을 ‘수카바티’를 미친 듯 외치는 RED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극락(極樂)의 세계에 당도한다.
안양은 아미타불의 정토이자 ‘깨달음이 동반된 즐거움’의 세계를 의미하는 ‘극락’과 같은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극락을 뜻하는 산스크리스트어가 바로 ‘수카바티’다. 그렇다면 RED는 노잼의 땅에서 극락의 세계로 어떻게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일까? RED는 ‘안양 LG 치타스’를 응원하기 위해 탄생했다. 강성 서포터스로 유명했던 RED의 상징은 붉은색 연기를 내뿜는 ‘홍염’이었다. 하지만 2004년 안양 LG 치타스는 치타만큼 빠른 일처리로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고 ‘FC서울’로 변신했다. 졸지에 사랑의 대상을 박탈당한 RED는 10여년의 노력 끝에 안양 연고의 시민구단 ‘FC안양’의 창단을 이끌어낸다. 포도빛을 닮은 보라색 유니폼의 FC안양. 하지만 FC안양의 서포터스는 여전히 RED로 불린다. RED는 보라색 클럽과 붉은색 서포터스의 모순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다. 이 모순 속에 안양FC의, RED의, 그리고 안양이라는 위성도시의 작은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안양 LG 치타스’가 서울이라는 특별한 도시에 입성하기 위해 안양을 버린 것처럼, 수도권의 많은 도시 역시 서울을 위해 희생을 강요당해야 했다. 서울에서 혐오, 유해 시설을 밀어내기 위해 인근 도시에 공단이 조성됐고, 그 결과 안양, 안산, 시흥 같은 공단 중심의 도시가 형성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울을 위해 인근 도시가 희생하고, 수도권을 위해 비수도권이 희생되는 악순환의 반복. 인구 1천만명의 도시인 서울의 상암월드컵경기장을 비워둘 수 없다는 논리 속에 ‘안양 LG 치타스’가 헌신짝 버리듯 안양을 버리고 ‘FC서울’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도 강자를 위해 약자의 희생이 당연시되는 사회적 논리가 반복된 결과였다. 그것이 힘의 논리든, 경제적 논리든, 지역적 논리든, 그 포장지가 무엇이든 간에 한국 사회는 희생자에게 희생의 반복을 강요하는 사회다. 그래서 RED의 작은 역사 속에는 한국 사회의 모순이 그대로 담겨 있다.
RED는 이 모순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떠안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다. 그렇기에 RED는 그 자체가 안양이라는 로컬리티의 집단기억일 수 있다. <수카바티>가 단순히 팬덤현상을 다루는 작품을 넘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가는 자들의 즐거운 삶이 담긴 영화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FC안양의 창단 과정은, RED가 외부의 힘에 의해 좌우되는 수동적 희생자의 위치를 넘어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정립해가는 주체적 주인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수카바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FC안양과 FC서울이 맞붙은 경기에서 RED의 상징인 홍염이 타오르며 관중석을 붉게 물들이는 장면일 것이다. <수카바티>의 선호빈, 나바루 감독은 그날의 경기 결과에 조금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안양 LG 치타스’를 향한 RED의 이별 선언(RED의 결성을 주도했던 최지은의 말을 빌린다면 ‘완전한 결별’)에 있다. 이별을 위한 제의(ritual)라 불러도 좋을 이 장면은 너무나 장엄하고 숭고하며, 심지어 보는 이를 몽환적으로 도취시키는 힘이 있다. 이는 단순히 스펙터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장관의 스펙터클을 연출한 RED의 태도, 그러니까 버림받는 수동적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을 버린 자를 기꺼이 떠나보내는 능동적 위치로 도약하려는 그들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토록 장엄하면서도 숭고한 이별 장면을 본 적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아름다운 장면이다.
<수카바티>의 매력은 RED라는 집단의 서사보다는 그 집단 속에 층층이 쌓여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소중히 여길 줄 안다는 점이다. <수카바티>가 관객에게 즐거운 깨달음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면, 이는 개인의 작은 삶에 내재한 극락의 세계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수카바티>에 인터뷰이로 등장한 RED 회원들에게는 미치도록 무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에너지가 가득하다. 이러한 면에서 영화 속에 인용된 <북극의 나누크> <카메라를 든 사나이> <달세계로의 여행> 등의 푸티지 필름은,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되돌려받기 위해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든 젊은(젊었던) 청춘들의 맹목적 사랑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이 영화든, 카메라든, 아니면 카메라에 담긴 피사체든 간에 이들 초기 영화에는 RED의 청춘과 닮은 맹목적 믿음과 집착이 내재해 있고, 그것이 이들 영화를 숭고하게 한다.
<수카바티>는 축구장 바깥에서 그저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RED 회원들의 하루하루를 곧잘 내비친다. 레미콘을 몰고, 직장에서 짐을 옮기고, 가정 살림을 하는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삶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 평범한 삶을 아주 특별한 즐거움이 숨 쉬는 주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줄 안다. 최지은의 말처럼, 그들이 FC안양의 창단을 위해 그토록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주말에 경기를 보고, 경기가 끝나면 친구들과 술 한잔하고, 이기면 일주일이 즐겁고 지면 일주일 동안 억울해하는 일상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그들에게 축구장에서 보내는 하루가 일상에서 벗어난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을 떠받치는 기둥일 수 있었던 것은 반복적이고 진부하며 지루한 시간처럼 치부되는 일상을 즐거움이 숨 쉬는 시간으로 스스로 만들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FC안양의 1부 승격 실패가 좌절되자 최캔디의 아들은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서럽게 눈물을 흘린다. 최캔디는 그런 아들을 품에 안아 쓰다듬는다. 그저 아름답다. 최캔디가 아들을 품에 안을 때, RED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을 싸웠는지, 그들이 진정으로 되찾고자 했던 일상이 무엇인지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들은 거창한 대의나 신념을 위해서 싸웠던 것이 아니다. 아들을 안아주며 위로할 수 있는 이 짧은 순간, 그 작은 몸짓이 가능한 삶을 위해 그들은 그 긴 시간을 싸웠던 것이다. <수카바티>는 평범한 일상에 빛나는 아주 특별한 순간의 힘을 일깨운다. 그것이 <수카바티>가 RED를 통해 당도한 깨달은 극락의 세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