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코프]
[씨네스코프] <한국이 싫어서> 촬영 현장, 한국은 그대로라서
2024-08-23
글 : 배동미
사진 : 오계옥

건물 안 계단으로 들어서자 거리에선 들리지 않던 드럼 소리가 들린다. 발을 아래로 옮길수록 소리는 점점 커진다. 몸이 둥둥 울릴 정도다. 계단을 통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이곳은 홍대 일대에 자리한 ‘라이브클럽 빵’, 인디 신에선 이미 유서 깊은 곳이다. 꼬박 2년 전인 2022년 8월23일, 이곳이 영화를 위한 장소로 변신했다. <회오리 바람>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연출한 장건재 감독의 신작 <한국이 싫어서>의 82신을 위해서다. 오후 4시쯤 현장을 찾았는데, 한여름 햇빛이 쏟아지는 바깥과 대조적으로 어두운 지하 클럽은 스모그로 가득했다. 색색의 조명만이 무대를 비췄다. “조명을 화려하고 세게 써도 좋아요!” 장건재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날 촬영분은 뉴질랜드에서 잠시 귀국한 계나(고아성)가 동생 미나(김뜻돌)와 함께 동생의 남자 친구 홍원(이현송)의 공연을 관람하는 장면이다. 미나는 신나서 노래를 따라 부르지만, 계나는 그런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생각에 잠긴 채로 말이다. 이 장면을 두고 장건재 감독은 “오랫 동안 해외에 나가 있다가 돌아온 계나가 한국의 상황은 그대로라는 걸 목격하는 신”이라고 기자에게 넌지시 말했다.

“오늘 촬영 포인트는 밴드들이에요. 뜻돌씨도, 현송씨도 처음 연기하거든요. 리딩 때 너무 신선한 기운을 얻었어요. 다시 오지 않을 경험 같아요.”(고아성)

“같이 따라 불러주세요!” 인디록밴드 불고기디스코이자 <한국이 싫어서>의 홍원 역으로 처음 연기에 도전한 배우 이현송이 활기차게 말한다. 발을 구르며 열정적으로 노래하던 이 신인배우는 감독의 컷 소리에 관람객을 연기하는 보조출연자들에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여유까지 보인다. “실제로 노래를 좋아하는 것 같아 정말 좋네요. 이렇게 해요, 우리. 눈도 맞추면서.” 이어 들려오는 이현송의 시원시원한 목소리는 한여름에 펜을 든 기자도 상쾌하게 만들었다. 감독도 흥이 올랐는지 모니터 뒤에 앉아 박자에 맞춰 샌들을 까딱이다 ‘오케이’를 외친다.

“2016년에 판권을 사서 준비한 프로젝트였어요. 계획보다 작업이 늦어지긴 했는데 그사이에 아성씨가 인물하고 나이가 같아졌어요. 기다리며 제 시간에 도착한 영화라고 생각해요.”(장건재)

이현송이 부르는 <COBALT>는 뮤지션이자 동료 배우 김뜻돌의 곡인데, 현장에 막 나타난 김뜻돌은 자신의 노래가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불리는 광경을 보고는 다소 들떠 보였다. “제가 부른 걸 다른 사람이 부르니까 다른 사람 노래 같아요. 정말 감동적이네요. 제 노래를 객관적으로 들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았는데 영화에 어떻게 담길지 기대돼요!”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피서객처럼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나타난 김뜻돌에게서 들뜬 마음과 젊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현송처럼 그 역시 <한국이 싫어서>로 처음 연기에 도전했는데, 이날이 두 사람의 첫 촬영날이었다.

이날 같이 촬영한 86신. 새벽 4시에 계나와 미나, 홍원 일행이 공연을 마치고 감자탕과 술을 마신 뒤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홍대 클럽 앞에 줄을 선다. 조금만 버티면 입장이라는데 계나는 피곤하기만 하다.

영화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온 두 신인배우가 생기 있게 움직이는 동안 20년차 배우 고아성은 병맥주를 손에 쥔 채 움직임을 최소화한 채 몸을 살랑이고 있다. 두 사람과는 대조적인 분위기와 몸짓이다. 자신만의 속도로 음악을 느끼려 하나 씁쓸한 눈빛만은 감출 수 없다. 먼 타국에서 집으로 돌아와 여동생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도중에도 그의 큰 두눈은 슬퍼 보인다. 어쩌면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그의 두눈으로 기억될 것 같다. 텅 빈 듯한 고아성의 눈동자는 영화 속에서 여러 번 변주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맹추위에 오들오들 떨다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피로한 눈꺼풀을 깜빡일 때, 가족들이 살아갈 집의 재건축 문제로 눈에 눈물이 맺힐 때, 그에겐 이곳이 아닌 다른 나라가 절실해 보인다. 나고 자란 나라를 떠난다는 건, 가족과 연인을 설득하는 시간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영화로 치자면 비슷하게 관객을 설득하는 숏과 신이 필요하다는 뜻일 텐데, 고아성은 대사가 아닌 눈동자로 관객을 납득시킨다. 그 눈동자를 시끌벅적한 클럽에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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