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포스트 포르노 시대의 새로운 쇼, <미래의 범죄들>
2024-09-04
글 : 유선아

표층적 차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더이상 구경거리가 되지 못하는 미래가 바로 <미래의 범죄들>이 그리는 시대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는 보디 호러 장르의 <비디오드롬>에서 <엑시스텐즈>에 이르기까지 신체와 기계라는 물질과 그를 통해 보는 환각과 꿈이라는 비물질을 탐구해왔다. 비물질인 환각 이미지마저도 신경전달물질의 이상 체계로 인해 망막에 맺히는 영상이라고 본 크로넌버그에게 있어 정신은 내부와 외부로 나눌 수 없기에 그의 세계에서 내면은 인체의 내부, 장기가 있는 장소를 가리킨다. 또 <미래의 범죄들>에서 예술로 규정하는 해부와 그 행위자는 <네이키드 런치>의 괴물 형상을 한 타이프라이터로 글을 쓰는 작가 윌리엄과 문학적 행위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네이키드 런치> 의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 윌리엄은 아넥시아의 경계에 이르러 작가임을 증명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는 품 안에서 펜을 꺼내 보여주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이든 써보라는 말에 윌리엄은 자동차 뒷좌석에서 잠자던 조앤을 깨워 총으로 쏘아죽이며 작가의 전능함을 눈앞에 공연하듯 보여준 뒤에야 아넥시아로 가는 길을 허락받는다. 예술 행위자의 전능함이 쓰기가 아닌 보여주기로 환대받았던 그 이후는 <미래의 범죄들>에서 조금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다.환경적 재앙이 덮친 인류의 미래에서는 과거 눈으로 볼 수 있었던 모든 것이 외면받는다. 피부에 새겨지곤 했던 타투는 체내로까지 침입하며, 폭력과 살인의 스너프와 포르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던 신체와 말초신경을 자극하던 장르는 자취를 감추었거나 관람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미래 인류에 도착한 새로운 쇼는 이전에 육안으로 볼 수 없었던 신체의 내부를 활짝 열어 자라난 장기를 적출하는 해부 퍼포먼스다. 이 진화의 훗날은 SF적 미래 서사가 아니라 현재의 쇼를 비추는 블랙유머와도 가깝다. 이를테면 힘겹게 음식을 삼키고 소화가 어려워 보기에도 괴로운 식사 장면이 그렇다. 소화를 돕겠다고 괴상하게 움직이는 뼈 모양의 의자에 앉아 미식도, 풍미도, 음미하는 사람의 쾌락도 사라진 식사 장면은 보는 이의 식욕을 돋우던 현재의 푸드 포르노를 반박한다. 이러한 면에서 <미래의 범죄들>은 크로넌버그의 보디 호러 장르의 연장이자 쇼비즈니스 산업의 이면을 다루었던 <맵 투 더 스타>의 연장이기도 하다. 영화와 TV쇼, 클립과 쇼츠가 홍수처럼 범람했다 쓸려가 아예 자취를 감추어버린 시대. 그래서 <미래의 범죄들>은 이제 차라리 눈과 입을 꿰매어 보거나 말하지 않기를 절실한 몸짓으로 갈구한다. 크로넌버그는 이 영화를 명상이라 부르지만 나는 이것이 현대에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이미지와 영상을 향한 우수에 젖은 근심으로 보인다.

<미래의 범죄들>은 유성영화 이후 손상된 채로 등장한 적이 거의 없던 음성과 얼굴을 훼손한다. 사울(비고 모텐슨)과 팀린(크리스틴 스튜어트)은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말할 때마다 목소리에서 바람이 새며 쇳소리가 나기 일쑤다. 카프리스(레아 세두)는 친구인 오딜이 얼굴의 표면을 새롭게 조형하는 수술 퍼포먼스를 지켜보다 고개를 돌리고 만다. 오딜이 이마와 두뺨을 도려내어 생선의 아가미처럼 속살이 바깥으로 훤히 내보이도록 커다란 상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켜보던 자의 외면에는 훼손된 얼굴을 향한 참담함이 있을 거라 짐작하게 하지만 카프리스는 이후 자신의 이마에 상현과 하현달이 뜨고 지는 모양을 양각으로 새겨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것이 무명 시절에도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내던 레아 세두라는 당대 배우의 얼굴이기에 이 얼굴의 훼손은 영화 속에서 역할에 주어진 분장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부드러운 피부 또한 음성과 얼굴만큼은 아니어도 훼손된 채로 영화에 드러날 경우에 특수하게 여겨진다. 크로넌버그는 이미 <맵 투 더 스타>에서 애거서(미아 바시코프스카)의 두팔과 한쪽 얼굴에 화상의 흔적을 남긴 적이 있다. 세상에 없는 나비족의 모공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매끈한 살결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스크린에 구현해낼 수 있었던 <아바타>(2009) 이후 크로넌버그의 영화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여기에 팀린으로 분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도 부조화를 더한다. 시종 로봇처럼 삐걱대고 쭈뼛대는 팀린의 몸짓은 수상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독특한 표현 방법일 테지만 목소리와 얼굴이라는 영화의 성역이 훼손된 뒤에는 이 또한 기존의 연기 양식을 파괴하려는 시도로 보일 수밖에 없다. 레아 세두의 얼굴처럼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목소리에도 개성은 뚜렷하다.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적당히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남기는 기분 좋은 잔상은 지워지고 캑캑대며 말하는 팀린의 발성을 카프리스의 얼굴과 함께 견주어보면 어느 현상이 감지된다.

AI 음성 합성 기술은 <탑건: 매버릭>에서 후두암으로 목소리를 잃은 배우 발 킬머의 목소리를 새로 태어나게 했다. 한 회사가 생성한 음성 모델에 배우의 말하기 방식을 학습시켜 영화에서 마치 배우가 대사를 말하는 것처럼 발 킬머의 목소리를 구현해낸다. 망가진 것을 복원하는 기술이 아닌 온전해야 할 것을 망쳐버린 뒤에 보정할 수 없는 상태로 여기게 하는 크로넌버그의 역(逆)기술적 시도는 ‘테세우스의 배’를 연상시킨다.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귀환할 때 탄 배는 오랜 세월에 걸쳐 보수됐다. 이 사고 실험은 수리에 수리를 거치다 원래 배에 있던 부분이 모두 교체되고 나면 그 배는 최초의 것과 같은 배라고 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살결, 음성, 얼굴, 나아가 인간의 언어와 행동을 매끄럽게 다듬어 발전시킨 연기 양식을 포함하면 이는 모두 영화에서 아직은 훼손되어서는 안된다고 여겨지는 불가침 성역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은 잠시 옆으로 미뤄두고 ‘몸은 현실이다’(Body Is Reality)라는 캐치프레이즈에 또 다른 문장이 뒤이어져 샴쌍둥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짝을 이루기를 상상해본다. 오직 실재하는 것은 몸이다. 지금 영화라고 부르는, 영화를 이루던 구성 요소가 모두 사라져버린 시대가 도래할 때, 그때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영화라 부를 수 있을까.

‘내면’이 마음과 정신을 뜻하지 않고 인체 내부를 가리킬 때, ‘아름다운 내면’ 콘테스트가 곧 아름답게 배치된 장기를 의미하게 될 때, 이곳은 또한 영혼이 사라져버린 구슬픈 세계다. 사울의 동료, 카프리스와 팀린이 반복해 외쳐 부르는 그 이름은 영혼(soul)의 어긋난 발음으로 들린다. 사울이 성대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팀린, 그 이마에 영원히 남을 상처를 새긴 카프리스와 행하는 두 차례의 입맞춤은 AI 기술로 생성하고 보정할 수 없는 구시대의 진정한 신체, 즉 지난 세기의 영화를 향한 크로넌버그식 낭만주의를 나타내는 순간이다. 손상된 목소리를 음성 모델에게 학습시켜 복원할 수 있을 때도 팀린의 목소리는 모종의 이유로 손상되었고, 세상에 없는 이의 신체를 만들어 운동하게 할 수도 있었으나 카프리스의 얼굴은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었다. 테크놀로지의 메스가 닿지 않은 신체의 특권은 성역이 짓밟히지 않을 영화의 특권으로 비약한다. 합성 플라스틱 바를 씹어 삼키고 마침내 자신도 진화의 흐름에 대항하지 않을 신인류임을 확인한 사울의 얼굴은 다가올 미래에 어떤 이미지로의 구원과 해방을 약속하고 있을지 모른다. 영화사에서 수십, 수백번은 반복되었을 흑백의 클로즈업에서, 오로지 지금만큼은 사울의 얼굴과 그 굴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만이 실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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