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를 확보하기 위한 연출 방식 중 하나였던 롱테이크의 지위가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디지털카메라의 기록 능력이 향상되면서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차이밍량, 아피찻풍 위라세타꾼, 페드로 코스타처럼 이미지의 정적인 흐름을 통해 관객의 관조적 관람을 유발하는 작품, 즉 슬로 시네마(slow cinema)에서 롱테이크가 자주 나타난 바 있다. 그 작품들은 기록의 사실성이 허구적 진실이 되기를 바라면서 몽타주를 금지하자고 했던 앙드레 바쟁의 요청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디지털 합성과 CGI 기술 발전에 힘입어 액션영화, 전쟁영화, 공포영화, SF영화처럼 시각적 볼거리에 대한 관객의 몰입을 강화하는 작품에서도 롱테이크 기법이 적용된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은 프레임 내부에 공존하는 다양한 요소들 사이의 경계를 지우거나 하나의 숏이 다른 숏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이음매 없이 결합하여 관객이 롱테이크라고 인지할 수밖에 없도록 연출된 것이다.
이처럼 디지털영화에서 롱테이크는 리얼리티의 포착과 조작이라는 이중의 전략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리얼리즘을 구축한다. 연출자의 성향과 제작 여건에 따라서 두 방식은 함께 쓰이기도 한다. 작품 전체를 원테이크로 촬영한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2002)나 미국의 전원적인 풍경 또는 산업화의 풍경을 고집스럽게 기록하는 제임스 베닝의 여러 작품 또한 영화적 지속을 연장하기 위해 이미지와 사운드를 미시적으로 조작한 경우이다. 촬영 현장에서 발생한 오류, 실패, 결점을 후반작업에서 수정하는 이러한 방식은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는 유일한 순간을 기록하고자 했던 고전적 리얼리즘의 불문율을 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디지털영화에서는 후반작업을 통한 개입과 조작이 롱테이크의 미학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퍼즐이라는 점이다.
디지털영화의 롱테이크는 일종의 문턱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지의 지속, 이미지의 분절, 이미지의 합성을 동시에 수행하여 현실의 삶과 가상의 삶이 하나의 화면에 공존하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디지털 롱테이크의 경계 없음이 두드러진 작품으로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2006)이 있다. 전 인류가 불임으로 인해 멸망의 위기에 처한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그린 이 작품은 오프닝 시퀀스의 폭탄 테러 장면, 중반부의 자동차 추격 장면, 후반부의 총격 장면 등을 롱테이크를 활용해 박진감 있게 그린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카메라를 통해 현장감과 사실감을 극대화하고, 여기에 특수효과와 시각효과를 통해 장점을 극대화하거나 반대로 단점을 최소화한다. 중반부 롱테이크의 숨은 비결은 특수 고안된 자동차에 거치대를 설치해 카메라가 자동차 내외부를 유영하듯이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에 있다. 또한 이 장면은 주행 중인 자동차의 내부에서 찍은 숏과 자동차가 멈춘 직후부터 외부에서 찍은 숏을 비가시적인 편집으로 결합했다. 이런 제작 과정을 놓고 보면 롱테이크에 기초한 이 영화 특유의 리얼리즘에 대한 평가는 여러 영화적 장치와 테크닉에 대한 설명과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무턱대고 기술적 성취만 놓고 이 작품의 롱테이크가 기존의 관습을 벗어나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칠드런 오브 맨>이 과거의 롱테이크와 차별화를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영화의 오프닝에 50초 정도 지속되는 한 장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시퀀스 전체를 구성하는 것은 10~20초 정도 지속되는 세개의 숏과 50초 정도 지속되는 하나의 숏이다. 먼저 전 인류 중 가장 나이가 어린 한 남성의 사망 사건을 전달하는 뉴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이어서 화면이 바뀌면 어느 카페에서 텔레비전 모니터를 쳐다보는 사람들과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커피를 주문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두개의 숏을 통해 묘사된다. 다음으로 주인공이 카페 밖으로 나가서 커피 잔에 술을 따르는 사이 카페에서 폭탄이 터지면서 아비규환이 된 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숏이 약 50초 동안 계속된다. 오프닝 시퀀스 중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 롱테이크 장면은 불안정한 주인공의 모습과 무질서한 거리의 풍경을 통해 작품 속 근미래의 세계가 붕괴 직전에 있음을 암시한다.
이 롱테이크 장면에도 몇 가지 숨은 비밀이 있다. 그 장면은 이틀에 걸쳐서 촬영한 두개의 숏의 결합물이다. 하나는 주인공이 카페를 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인공이 카페를 나선 이후에 폭발이 일어나기까지의 상황을 담고 있다. 이 장면의 제작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촬영 단계에서는 배우, 엑스트라, 카메라의 동선을 맞추거나 주인공이 카페를 나설 때 버스가 지나가도록 하여 편집 지점을 계산하는 등의 노력이 있었다. 편집 단계에서는 현장 촬영으로 얻은 두개의 숏을 3D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 마야로 불러들여 공간적 좌표를 맞추는 작업을 한 다음에 다시 각각의 이미지를 디지털 합성 프로그램에서 하나로 합치는 과정이 있었다. 이 제작 공정과 그에 따른 결과물 속에서 영화의 최소 단위로서의 숏이나 이미지의 경계로서의 프레임의 의미는 다소 모호하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이 장면은 컴퓨터의 계산값에 따라 주인공이 거주할 수 있는 세계를 통합적으로 구축한 것이며, 관객은 카메라와 스크린을 매개로 그 장면 속의 세계를 탐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칠드런 오브 맨>의 롱테이크 장면이 구축한 세계는 관객인 우리에게 이미지로 지각되기 이전에 데이터를 코드화한 결과물로 존재한다. 실제로 이 작품의 오프닝은 작품 속 세계가 데이터와 정보가 상품처럼 교환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롱테이크로 촬영된 장면의 경우 거리, 행인, 버스 등 전경의 실사 촬영분에 해당하는 부분과 버스와 건물의 광고판에 출력되는 광고 영상처럼 후경의 CG로 처리된 배경 부분은 합성물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제작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이 작품 속 세계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데이터, 정보, 이미지의 흐름의 지배 속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따라서 주인공과 그의 뒤를 따르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단순히 물질적 공간을 배회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비물질적인 세계를 항해하는(navigating) 것에 가깝다. 과거 영화학자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오직 영화만이 물질적인 “삶의 흐름”을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바람과 달리 오늘날의 영화는 비물질적 삶의 흐름과 그렇게 구축된 세계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영화는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세계에서 끝없이 표류하는 누군가의 항해일지와 같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