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고장난 영혼의 빛, 지나 롤랜즈
2024-09-05
글 : 김소미
<사랑의 행로>

영화 보기의 은밀한 매혹 중 하나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실천하기 두려운 파국적 상상을 허락한다는 것이다. 극한의 황홀과 흉포한 실망을 경험하는 스크린의 얼굴들은 잔뜩 취약해져 있거나 비틀거리기 일쑤다. 나는 영화예술의 친밀하고도 위험한 이 속성이 한 사람에게 세례처럼 쏟아지는 것을 본 적 있다. 1965년 촬영한 <얼굴들>부터 <사랑의 행로>(1984)까지 존 카사베츠 감독이 연출한 6편의 영화들 속 배우 지나 롤랜즈를 통해서다. 고객 앞에서 사랑을 연기하는 성노동자(<얼굴들>), 고집 센 중년의 미혼 여성(<별난 인연>), 우울과 절망에 빠진 노동자계급의 주부(<영향 아래 있는 여자>), 알코올중독에 빠진 배우(<오프닝 나이트>), 남의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는 마피아 정부 (<글로리아>)와 같이 롤랜즈는 언제나 모범으로부터 멀리 달아난 인물에 적역이었다. ‘창녀와 정부, 아내와 노처녀, 여동생과 여배우’로 부름받은 그는 시대착오적 호칭에 굴하지 않는 혁신적 성격을 배역에 불어넣었다. 한마디로 롤랜즈의 여자들은 골칫거리다. 그들은 독선적이고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으며, 급작스럽게 과도한 비난이나 명랑을 구사함으로써 주변인을 긴장시킨다. 행여 어느 모임의 식탁에서 마주 보게 된다면 체증을 유발하고야 말 기인들이 스크린에서는 더없이 매력적인 주도자(protagonist)가 되는 영화적 권능에 지나 롤랜즈는 적극 협동하는 배우다. 여기서 롤랜즈의 연기가 지닌 뾰족함을 언급하면서 구별해두고 싶은 점은, 그의 독특함이 “난 클로즈업에 준비가 됐어요”라고 외쳤던 노마 데스먼드(<선셋대로>)식의 디바다움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나를 빠져들게 한 성질은 드라마틱한 존재감과 화려함이 아니라, 배우의 몸 곳곳이 열어젖혀져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취약성이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 사람의 비극이 왕왕 거창한 독백이나 오열로 이어질 법한 순간에 롤랜즈의 인물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지거나 벽에 부딪혀 나자빠졌다. 쿵, 쿵 하는 충격음. 의도된 지속시간을 넘어선 듯한 정적이 뒤따랐다. 카사베츠가 주문하고 롤랜즈가 수행한 이 연약한 신체성의 표현이야말로 그들의 영화에 심장박동을 새겨넣은 주범이다. 바로 이런 순간에 롤랜즈의 여자들은 타인을 곤혹스럽게 하기 이전에 자신의 광기와 맞서 싸우다가 이미 탈진했다는 사실을 투명하게 내비친다. 내적 파국을 이토록 진부하지 않게, 그리고 맨살에 닿는 촉각으로 전하는 배우는 많지 않다.

<오프닝 나이트>

요컨대 관객은 지나 롤랜즈를 통해 취약해질 자유를 대리체험하면서도 그녀가 주는 불편과 긴장에 사로잡힌다. 정상성 바깥으로 탈주하는 인물에 능하고 고장난 영혼에 깃든 빛을 품는 배우. 나는 롤랜즈의 연기와 접촉할 때마다 전전긍긍하고, 수치심을 느끼고, 묘하게 해방되곤 했다. 중요한 것은 이 배우의 쓰임이 향하는 종착지가 자기파괴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통념과 달리 존 카사베츠의 영화는 즉흥적으로 만들어지긴커녕 때로 200페이지가 넘는 각본을 자랑했는데, 그 지독한 구체성에 바탕해 롤랜즈는 카메라 앞에서 자기 몸을 완전히 놓아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감독은 배우의 리듬에 전적으로 호응했다. 과정상의 고됨과 지독함을 편의적으로 압축하는 묘사일까 저어되지만, 롤랜즈의 연기가 내포하는 불균질함과 생동성은 이를 가능케 하는 어떤 안전함 위에서 탄생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신뢰하기 힘든 위험한 인물에게 기꺼이 우리 자아의 일부를 내맡기는, 지극히 관객다운 즐거움을 누린다. 카메라라는 무자비한 장치 앞에서 해부되는 직업인 배우는 때로 카메라와 전투하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롤랜즈의 경우 철저히 항복했다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해보인다. 그는 완전히 쓰러진 다음에야 몸을 일으켜 진실을 발설하곤 했다.

자연주의적 스타일의 한 정점을 구사한 지나 롤랜즈와 존 카사베츠 콤비가 <오프닝 나이트>에서 보여준 엔딩 신은 무대와 현실, 연기와 진실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면서 두 사람의 유산을 압축적으로 암시한다. 자기 존재의 상실감에 시달리는 중년 배우 머틀 고든(지나 롤랜즈)이 리허설에서 내내 고전한 끝에 초연의 밤에 다다르게 되고, 결국 대본과 연출을 모두 파괴한 자기만의 즉흥극을 감행하는 장면이다. 약 13분간 이어지는 엔딩 시퀀스에서 배우는 해방되고 극작가는 절망한다.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이 두 배우의 만담 같은 대화에 동화되어갈 때쯤 스크린 속의 연극 청중들도 절묘한 리액션을 보낸다. <오프닝 나이트>의 롤랜즈가 오가는 것은 무대와 현실 사이, 그리고 영화와 현실 사이라는 이중의 벽이다. 나이듦, 상대 배우(존 카사베츠)와의 강도 높은 호흡, 매체의 요구에 신음하는 머틀과 40대 중반의 지나 롤랜즈가 통과했던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은 점도 둘을 겹쳐놓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롤랜즈와 카사베츠는 무대 양 끝에서 마주보며 걸어오다가 상대의 다리를 부여잡는 우스운 제스처를 선보인다. 영화 내내 뺨을 때리거나, 악수하거나, 온전히 마주 보는 데 실패했던 두 사람이 실로 바보 같고 즉흥적인 게임을 빌미로 서로를 부여잡는 것이다. 그제야 붉고 무거운 장막이 무대를 덮어버릴 때, 나는 주어진 역할과 의무를 모두 버린 뒤에도 자기 본분을 수행하는 이 아이러니야말로 곧 배우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지나 롤랜즈의 연기는 접촉적으로 기억된다. 롤랜즈의 인물들이 따르는 사랑의 행로가 감동스러운 것은 구제의 손길이 필요한 처지이면서도 도리어 그가 먼저 상대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클로즈업에 담긴 지나 롤랜즈의 무모한 영혼은 풀숏에서 바닥을 짚고 일어나 곁의 상대와 몸싸움하거나 포옹한다. <영향 아래 있는 여자> 속 부부가 소파에서 서로 기대어 잠시 안식할 때, <사랑의 행로>의 절망한 남매가 벽 너머로 말없이 손을 잡을 때, <글로리아>의 총성 속에서 살아남은 주인공이 유일한 동반자인 소년을 높이 들어 올릴 때, 나는 재건되기 위해 망가져야 하는 인간의 내면을 통과하는 최상의 수단이 영화임을 믿기로 했다. 영화가 끝나면 멀쩡한 얼굴로 극장을 나설 테지만, 적어도 지나 롤랜즈의 영향 아래 있을 때만큼은 영화처럼 처참해질 자유가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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