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최수민은 1969년에 경력을 시작하여 <영심이>의 영심이, <달려라 하니>의 나애리 등을 맡으며 한국 성우계에 굵직한 발자국을 남긴 베테랑 중 베테랑 성우이자 배우 차태현의 어머니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연기에 있어서는 계속하여 자신을 ‘초년생’이라 부르며 겸손을 보이는 4년차 배우이기도 하다. <문경>은 그가 처음으로 주연급 역할을 맡은 작품이다. 배역인 유랑 할매는 손녀 유랑(김주아)의 아픈 비밀을 품고 살아가지만, 도시에서 온 문경(류아벨)과 비구니 가은(조재경)의 고민마저 넉넉하게 해결해주는 ‘진짜 어른’이다. 작중 유랑 할매처럼 관록과 온화한 미소가 가득했던 그와의 대화를 전한다.
= 대본을 보자마자 좋다고 생각했다. 요즘 들어서 많은 영화가 너무 센 자극만 주려고 하는 것 같더라. 나와 내 지인들처럼 서정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문경>이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겠다고 느꼈다. 다만 걱정이 있었다면 내 배역인 유랑 할매가 영화에 나오기까지 너무 오래 기다려야 했다는 거. (웃음)
- 러닝타임이 1시간쯤 흐르고 등장한다. 젊은 문경, 가은이 겪는 어려움을 해소해주는 역할이다.
= 그래서 마음이 좀 놓였다. 앞부분에서는 젊은이들이 겪는 사회생활의 문제와 번뇌가 있는데, 그런 어려움들을 문경쪽에서 풀어나가니까. 유랑 할매가 그런 해답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라는 게 너무 좋았다.
- 주연급 비중으로 출연한 영화는 처음이다. 스크린으로 작품을 본 감상은.
=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레드카펫도 밟고 다른 배우들과 함께 처음 영화를 봤는데 너무 부끄럽더라. 내 연기가 저것밖에 안되나 하는 생각에 끝까지 편치 않은 마음으로 보게 됐다. 그렇게 걱정 속에서 기술시사회를 봤는데 그때는 살짝 마음이 열렸다. 50% 정도? (웃음) ‘그래 이 정도면 괜찮네. 문경의 그 시골집이랑 꽤 어울리는 캐릭터 같네’란 생각으로 아주 조금 안심했다.
- 연기의 어떤 점이 마음에 걸렸는지.= 아무리 배우 초년생이더라도 성우를 54년이나 했는데 표정도 그렇고 제스처도 그렇고, 큰 화면으로 보니 연기에 흠이 너무 많이 보이더라. 그래서 주위에 이 영화 괜찮으니 꼭 보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영화를 몇번 더 보면서 손녀를 위해 헌신하고 다른 이들의 어려운 문제를 하나씩 하나씩 토닥이며 해결하는 유랑 할매의 역할을 되새기다 보니 내 마음도 더 열리게 됐다. 마지막에 고목의 무늬를 만지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 아름다운 역할인 거다. 그리고 언론시사 이후엔 관객들이 “어떻게 저렇게 보석 같은 연기자를 지금껏 놔뒀나”라는 말씀도 해주셔서 살짝 웃음이 났다. 조금 교만한 것 같긴 하지만… 지금의 만족도는 80%까지 온 것 같다. (웃음)
- 대사에 맞는 손의 적극적 제스처가 눈에 띄더라.= 어머. 사실 그런 제스처가 처음엔 아주 걱정스러웠다. 관객들에게 괜히 어색해 보일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냥 대사 속으로 빠져들어가자. 그렇게 하면 몸이 어떻게 움직이든 큰 문제가 되진 않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촬영하면 할수록 그런 부분은 차차 잊어버리게 됐다.
- 제스처는 성우 활동 때부터의 습관인지.= 물론. 녹음실 안에서도 성우들은 대사에 맞는 액션을 다 한다. 그래야 목소리나 감정이 제대로 나온다. 마이크 하나가 주어지면 그 근처의 공간을 다 쓴다. 옆에 성우 동료가 있다면 서로 보면서 녹음하기도 한다. 요즘은 녹음이 거의 스테레오로 진행되니까 그런 공간감을 소리에서 느끼게 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래서 그런 제스처도 습관이 될 수밖에 없었고, 습관을 억지로 지우기보단 자연스럽게 연기에도 내보내자는 생각을 좀 하게 됐다.
- 성우 출신이다 보니 아무래도 유랑 할매의 목소리 변화를 유심히 듣게 됐다. 첫 등장 땐 굉장히 우악스럽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등장하지만 갈수록 유순해지는 명확한 차이가 느껴진다.
= 그렇다. (웃음) 사실 목소리를 인위적으로 때에 맞춰 조절하려고 하면 더 어색해진다. 감정 속으로 파고들어가야 하는데 괜히 목소리를 바꾸고 톤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이상해진다. 목소리는 우선 잊어버리고 장면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초반엔 다른 캐릭터들보다 조금 더 정확한 발성에 튀는 소리가 날 때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점차 상대역과의 분위기와 목소리 키를 맞춰가며 작업을 이어가다 보니 저절로 느낌이 달라지더라.
- 배우들의 동선이나 리액션 숏에서의 표정 연기 등 영화 촬영에서만 느낀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다.
= 정말 기가 막히게, 그게 딱 나의 가장 큰 숙제였다. (웃음)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리액션컷에 잡힐 땐 어느 정도로 감정선을 유지해야 하는지 모든 게 다 의문이었다. 모든 걸 다 물어볼 순 없으니 시나리오를 몇번씩 읽고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스스로 터득해갔다. 감독님도 내가 영화 초년생이란 것을 아니까 조금 더 배려해주신 느낌도 있었다. 남편이 연극영화과 출신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걸음걸이나 숨찬 연기 같은 상세한 부분에 조언을 주더라.
-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배역 연기에 꾸준히 도전하는 이유는.
= 영화는 찍으면 찍을수록 감탄하게 된다. 성우로 50여년 활동하다가 이제 영화라는 큰 세상으로 튀어나왔다는 느낌이 든다. <산후조리원> 으로 처음 연기에 뛰어들었을 때 선배 한분이 “진작에 하지 그랬어”라는 문자를 주셨던 기억이 있다. 나도 조금 더 일찍 연기를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분명히 있긴 하지만, 오히려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여서 지금만큼의 역량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몇 작품이나 더 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역할이 주어지는 대로 열심히 해야겠다는 욕심이 든다. 지금은 너무 힘든 세상 같다. 이 와중에 이렇게 그림같이 아름답고 조용한 <문경>이 나왔으니 모쪼록 많은 분이 봐주시면 무척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