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소설의 언어, 영화적 장면, <딸에 대하여> 이미랑 감독, 소설가 김혜진
2024-09-05
글 : 정재현
사진 : 최성열

<딸에 대하여>는 희망퇴직 압박에 놓인 장년 노동자를 다룬 <9번의 일>, 도시 중앙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노숙인이 주인공인 <중앙역> 등 시민과 창작자의 시선이 쉽사리 가닿지 않는 이들의 정체성을 그려온 김혜진 소설가의 2017년 작품이다. 이 소설은 몇년 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춘정> 등의 단편으로 이름을 알리고 이창동, 장률 감독의 스크립터로 일한 경력이 있는 이미랑 감독에 의해 각색되고 영화화됐다. 같은 학교에서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내다 영화를 매개로 20여년 만에 재회한 두 창작자는 서로의 <딸의 대하여>를 진심으로 애호한다. 각자 입고 온 셔츠의 색깔을 두고 “그린과 레인처럼 입고 왔다”며 미소를 짓는 이미랑 감독, 김혜진 소설가의 사려 깊은 시선을 전한다.

*작품 속 딸과 딸의 연인이 서로를 부르는 애칭인 그린과 레인으로 이름을 표기합니다.

김혜진 소설가, 이미랑 감독(왼쪽부터).

- 두분이 서울예대 재학 당시부터 인연이 있었다고 들었다.

김혜진 내가 감독님보다 한 학번 후배였고 함께 학보사 활동을 했다. 감독님이 2학년 편집장이었고 나는 1학년 신입 기자였다.

이미랑 작가님이 학보사에 들어오기 전에 서울예대 다동(문예창작전공, 극작전공 강의실이 위치한다.-편집자) 앞에서 나를 불렀다. 내게 학보사가 어떠냐고 묻더라. 우리 둘 다 당시에 다른 학부를 다니다 재입학한 상황이라 이미 각자 경제생활 중이었다. 작가님에게 학보사 활동이 크게 시간을 뺏지 않는 일이라며 추천했던 기억이 난다.

김혜진 감독님이 수업 전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동아리 홍보를 했다. 그때 교지와 학보사 중 어디가 좋을지 신입생들 사이에 격론이 일었는데 감독님을 믿고 학보사를 택했다.

- 이후 각색 과정에서 두분이 다시 만난 건가.

이미랑 크랭크업 이후에야 만났다. 연락이 늦어 죄송하다고 말한 뒤 서울 합정동에서 졸업 후 처음 만나 차를 마셨다. 원작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컸다. 작가님과 논의를 거치며 각색 방향을 정해도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지만, 원작을 나 스스로 체화하는 게 진정으로 작품을 각색하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소설의 중요한 문장을 영상화하는 일

- 소설 속 엄마는 젊음이 선사하는 기회를 사무치게 통감한다. 엄마가 딸을 바라볼 때 느끼는 젊음에 관한 사유와 엄마가 스스로와 젠(영화의 제희)을 바라볼 때 느끼는 노화에 관한 감정이 소설 전반을 수놓는데.

김혜진 1인칭 서술자가 엄마라 택한 전략이다. 엄마는 젠과 딸 사이에 있다. 엄마는 보호자 없이 요양병원에 입원한 젠을 통해 딸의 미래를 비관한다. 노화는 늙어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변화에 겁을 먹고 보수화되는 일이기도 하다. 변화에 대처하는 힘과 낯섦을 수용하는 능력이 감퇴할 수밖에 없는 게 노화니까. 엄마가 느끼는 공포엔 본인이 더는 젊을 때처럼 딸을 책임지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걱정도 있을 것이다.

- 대구를 이루는 장면이 몇 있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엄마(오민애)는 수박 한통을 홀로 무겁게 이고 집으로 향하지만, 그린(임세미)과 레인(하윤경)은 수박 한통을 사이좋게 나누어 든 채 집으로 돌아온다. 또 영화 초반 엄마가 침대에서 홀로 자는 딸의 다리를 내려다보는 시점숏이 있고, 영화 중반 한 침대에서 같이 자는 그린과 레인의 포개진 다리를 응시하는 시점숏이 있다. 수박과 관련한 장면은 원작에 없고, 다리에 관한 장면은 원작에 있다.

이미랑 숏을 구성하며 데칼코마니를 계획했다. 대부분은 소설 속 문장으로부터 출발한 숏이다. 하지만 문장이 마음에 든다 해도 이를 영상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 영상문법을 고민하며 영화를 짜나갔다. “수박을 허겁지겁 퍼먹고 나니 할 일이 없다”는 문장이 내게 중요하게 다가왔다. 엄마는 본인이 먹을 수박은 숟가락으로 퍼먹지만, 딸을 위해선 수박을 조각내 냉장고에 넣어두는 사람이다. 엄마가 수박을 들고 홀로 언덕을 오르는 장면은 원작 소설에 없다. 한데 엄마가 힘겹게 든 수박을 그린과 레인은 나누어 들 것이다. 엄마가 느끼는 일상의 무게는 엄마가 들여다보지 못하는 삶을 사는 딸들에겐 훨씬 가벼울 테니까. “내 딸이 살게 될 세상은 더 나아질까 더 팍팍할까?”라는 소설 속 대사도 있다. 그린과 레인은 함께라 엄마의 걱정보단 덜 힘겹게 일상을 이어갈 거란 방향에서 만든 숏이다. 엄마가 다리를 바라보는 문장은 뇌리에 박힐 수밖에 없었다. 작가님도 나도 고향이 서울이 아닌데, 가끔 본가에 가면 엄마가 내가 자는 방에 와 다리를 만지던 경험이 아직 또렷하다. 사실 나도 조카를 오랜만에 만나면 그렇게 자는 조카의 다리를 한번씩 만져본다. (웃음) 이건 지방 어머니의 특색일 수도 있다.

김혜진 우리 부모님도 그렇다. 항상 내가 잘 때면 발을 만지는 부모님의 손길이 느껴진다. 그린과 레인의 다리가 겹쳐 있는 장면은 소설에서도 둘이 친구가 아니라는 점을 그리기 위해 필요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그리고 싶진 않아 간접적인 선에서 보여주려 넣은 장면이다. 감독님에게 궁금한 게 있다. 엄마가 든 수박과 레인, 그린이 든 수박은 같은 사이즈인가?

이미랑 기억이 잘 안 난다. 서로 다른 날 촬영했는데 소품팀에 수박을 살 때 특대 사이즈를 사라고 요청하긴 했다. 무거워서 들기 아주 힘든 수박으로 특별히 골랐다.

- 영화도 소설도 캐릭터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는다. 엄마의 재취업 과정에서 이력서에 엄마의 이름이 언뜻 비치긴 한다.

이미랑 이력서가 나와야 하니까 엄마의 이름을 잠깐 등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때 등장하는 이름 오주희는 오민애 배우가 과거에 쓰던 예명이다. 그래도 시나리오에선 엄마의 이름을 써두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 자체로 보통명사 혹은 고유명사이길 바랐다. 엄마라는 개념 안에 관객이 각자의 엄마를 넣어두었으면 좋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이름 정하는 게 또 스트레스다.

- 엄마의 심리가 상세히 서술된 소설의 문장을 읽으면 자연히 엄마와 주변의 관계를 상상하게 된다. 엄마는 섬세하고 또 예민한 사람이라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은 게 보이고 많은 게 들린다. 이런 엄마가 피치 못하게 주변인들에게 미치는 긍정적, 부정적 영향이 여러 사건을 빚는다.

김혜진 엄마는 굉장히 자기 성찰적인 사람이다. 상황적으로 스스로를 성찰할 여력이 없는데도 말이다. 가끔 내 소설에 판타지적 요소가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SF적 상상력이 아닌 나만의 환상이라는 의미에서다. 독자들의 동의 여부는 모르겠지만, <딸에 대하여> 속 엄마는 내게 어느 정도 판타지의 영역에 있는 인물이다.

이미랑 책을 읽으며 엄마에게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창작 과정에서 자기 성찰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책을 읽으며 엄마를 이해한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정작 시나리오를 쓰려니 엄마를 구체화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좀더 말이 없는 엄마가 탄생했다. 대사 대신 지문으로, 직접 행동 대신 타인의 행동에 대한 리액션으로 엄마를 설명하는 게 좀더 영화적이라 판단했다. 소설 속 엄마는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영화 속 엄마는 반응하는 사람이다.

- 엄마와 달리 그린과 레인은 타인의 고통이 언제든 자신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알고 곤경 속에 사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두 캐릭터를 그릴 때 유념한 점은 무엇인가.

김혜진 두 캐릭터를 구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성격을 달리 배치했다. 엄마가 딸에게 “남의 일에 너희가 왜 신경을 써”라고 말하는 건 그게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엄마는 타인의 고난을 함께 책임지는 일이 어렵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다. 오히려 그린과 레인은 그걸 엄마만큼 느끼지 못해 용감해질 수 있다. 젊음이라는 게 무모하지 않나. 무모함과 용기는 일견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엄마는 외면했던 문제가 눈앞에 닥치자 딸의 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감당의 문제가 된 것이다. 소설을 쓸 때도 영화를 볼 때도 결국 어떤 의제를 받아들이는 건 코앞까지 일이 닥쳤을 때 무얼 선택하느냐의 문제란 생각을 했다. 엄마는 레인에게 “나도 널 이해하고 싶다”고, “그런데 남의 일처럼 이해한다, 응원한다 이야기하고 싶지만 내 딸이라 그게 안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중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엄마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딸의 속성은 딸이 사랑을 위해 내린 결정 아닌가. 만약 그린과 레인이 주인공인 소설이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됐을 것이다.

이미랑 그린을 연기한 임세미 배우는 워낙 베테랑 배우라 얼굴은 알고 있었는데 내가 드라마를 많이 보는 사람이 아니라 생소했다. 그러다 임세미 배우의 유튜브 채널인 <세미의 절기>를 보게 됐다. 채널 속 영상을 보니 그가 참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 연기를 역추적했다. 하윤경 배우는 독립단편영화에서부터 왕성하게 활동한 분이라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두 배우의 여러 활동을 조합해보니 외형뿐 아니라 내적으로도 둘이 잘 붙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캐스팅까지 이어졌다. 물론 고민은 있었다. 오민애 배우와 임세미 배우가 외적으로 안 닮았다. 우선은 친탁했다고 정했다. (웃음) 외형적으론 안 닮았어도 둘의 행동은 유사하길 바랐다. 엄마가 제희(허진)에게 베푸는 돌봄이 그린이 동료를 위해 나서는 행동으로 연결되면 관객도 둘이 닮았다는 걸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으니까.

김혜진 소설을 쓸 때 인물의 성향과 내면을 생각하지, 주인공의 얼굴을 떠올리진 않는다. 영화엔 상상하지 못했던 얼굴이 육화돼 신기했다.

이미랑 혹시 작가님이 생각한 얼굴과 달랐던 배우도 있나? (없다는 답을 듣자) 사실 소설을 읽을 땐 엄마의 외형을 훨씬 나이가 든 여성일 거라 상상했다.

영화가 내린 선택

- 소설은 엄마가 레인의 농성 현장을 찾아간 후 경험한 수치와 혼란을 강하게 묘사했다. 반면 영화는 이 부분을 생략한 후 엄마를 농성 현장에서 다친 딸이 치료 중인 응급실로 바로 향하게 했다. 엄마가 딸의 시위를 직접 목도하는 것과 외상을 입은 딸을 본 후 시위 현장을 짐작해야 하는 것은 다른 정서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김혜진 소설 속 그 장면은 엄마의 감정이 가장 고조되는 순간이다. 내 소설에 그런 순간이 많지 않은데 그 장면만은 그렇게 썼다. 영화가 내린 선택이 좋았다. 엄마가 농성 현장에 방문하는 장면은 소설적 순간이다. 소설을 쓸 땐 소설적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있다. 장면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면 말하려는 바가 뚜렷해지지 않아 소설만이 가능한 묘사를 택하는 것이다. 이 장면을 들어낸 게 영화만의 자연스러운 선택이 아닐까 싶다.

이미랑 소설적 장면이란 작가님의 말이 오히려 감독의 입장에선 영화적 장면이라 해석된다. 나 역시 독자로서 그 장면을 책에서 읽을 때 작가의 작품 중 이렇게 스펙터클한 장면이 이제껏 있었나 싶었거든. 엄마가 비 내리는 시위 현장에서 당황하는 모습들이 절로 눈앞에 그려져 되레 영화적이라 느꼈다. 막상 이 장면을 영상으로 표현하려고 하니 고민이 되더라. 소설엔 감정이 한번 최고조를 찍는 장면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영화엔 감정이나 스케일의 측면에서 돌출된 지점이 등장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결국 그 장면을 소거했다. 영화의 숏이 선사할 수 있는 리듬으로, 사운드가 선사할 수 있는 반응으로 폭풍 같은 엄마의 내면 상태가 돌출하도록 만드는 데 집중했다.

- 영화의 에필로그는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영화만의 장면이다. 크랭크업 이후에 촬영된 장면이라고.

이미랑 시나리오엔 영화에 담긴 버전을 포함해 여러 장면을 적어두었다. 그중 일부는 프로덕션 단계에서 찍고, 일부는 찍지 않았다. 영화에 담긴 에필로그는 새로 찍은 게 맞다. 엄마가 제희의 사망 이후에도 돌봄노동을 지속하는 이야기는 시나리오에 있었고, 길 건너에서 다른 퀴어 커플을 보는 장면은 새로 쓴 이야기다. 제희의 장례식장에서 편히 잠드는 엄마의 얼굴이 작품의 첫 엔딩이었다. 이후 1년 가까이 후반작업을 했는데, 편집을 마치니 엄마가 엄청 답답하고 보수적인 사람처럼 비쳤다. 연출부 내부에서도 이에 관해 수차례 회의를 거쳤다. 소설과는 다른 무언가를 영화의 결말에서 보이되 영화적 언어를 살릴 수 있는 방향을 고심하다 지금의 에필로그가 탄생했다. 우선 영화제 상영 버전에 이 에필로그를 붙이고 에필로그에 관한 관객 반응을 살폈다. 반반이었다. 영화제를 찾는 관객 모집단이 일반 관객 전체의 표본과는 아무래도 다르지 않나. 완성도의 측면에서 의문을 던지는 관객도, 호감을 표하는 관객도 있었다. 이 에필로그를 개봉판에서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던 차에 답을 찾았다. 개봉 전 마지막 상영에서 한 장년 여성 관객이 에필로그를 통해 영화 속 엄마를 비로소 이해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에필로그를 살리는 방향을 택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 중엔 영화 속 엄마 같은 관객도 있을 것이다. 우리 작품이 더 많은 관객과 만나기 위해선 이 장면이 필요했다.

-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엄마가 딸에게 “내가 뭘 잘못했니?”라고 고압적으로 따져 묻는 대사가 등장한다. 누구든 훈계마다 스스로를 피학자로 설정한 채 자식에게 죄책감을 투사하는 양육자의 화법을 지긋지긋하다고 느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미랑 나의 경우 이 대사가 낯설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 그래서 단순하게 접근했다. 한국의 부모는 종종 자식에게 ‘너는 곧 나’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네가 밖에서 욕 먹을 짓을 하면 그건 부모 얼굴에 먹칠하는 행위다”라고 말하는 식으로. 그렇게 접근하면 엄마 입장에서도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네 행동이 이런 식이냐”는 논리가 선다. 타인이 동성애자인 건 괜찮지만 내 딸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심리를 표현하기에도 적합한 대사다. 그린이 “엄마가 날 그렇게 키워놓고 왜 이러는 거냐”라고 힐난하자 엄마는 “너는 내 딸이니까”라고 답한다. 정말 폭력적인 언어다. 남의 딸은 되지만 내 딸은 안된다고 단정하는 건 끝내 가책의 화살을 자기한테 돌리는 행위지 않나. 영화 속 엄마는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다. 자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내적 고찰도 빈번하게 하며 스스로를 섬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김혜진 “내가 뭘 잘못했니?”는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이지만 집필 당시엔 딸의 입장에 기운 채 엄마를 이해해보고 싶었다. 7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된다. 어릴 땐 이같은 부모의 말에 분개했지만 이젠 부모로부터 받은 것들을 돌이켜본다. 부모로부터 시간도 받았고 마음도 받아 지금의 내가 됐다. 그걸 떠올리면 부모의 화법이 이해가 간다. 우리 세대야 ‘나다움’을 고민할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부모 세대는 우리만큼 스스로를 정립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못했다. 그럴수록 평범하게 사는 정상성의 삶이 더 큰 가치로 다가왔을 것이다.

- 마지막으로 서로의 <딸에 대하여>가 좋은 이유를 고백해보면 어떨까.

김혜진 영화에 음악이 거의 없는 점이 좋았다. 그리고 오민애 배우의 표정이 좋았다. 내가 언어로 쓰려던 게 혹시 오민애 배우의 저 표정, 저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미랑 우리 둘은 동갑이고 둘 다 지방 출신이다. 여러모로 작가님과 커온 환경이 비슷한데 나는 하지 못하는 통찰을 언어로 포착하는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원작을 훼손하고 싶지 않아 PD님과 함께 각색 중 소설 전체를 필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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