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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영화가 재난을 응시할 때, 김병규 평론가의 기후의 영화들 - <트위스터스>와 <태풍클럽>
2024-09-18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재난이 영화를 중단한다. 정이삭의 <트위스터스> 후반부에선 거대한 토네이도가 도시를 강타하는 상황이 묘사된다. 위협적인 폭풍의 경로를 따라간 카메라가 도착하는 장소는, 뜻밖에도 영화관이다. 토네이도는 극장을 위협한다. 영화를 보던 관객들을 대피시키고, 오래된 흑백영화가 상영되던 스크린을 파괴한다. 폭풍이 지나가고 극장에 남은 사람들은 스크린이 있던 자리에 뚫린 구멍을 통해 토네이도가 휩쓸고 간 잔해를 지켜본다. 재난이 남긴 광경은 영사기의 빛을 받아 스크린 속의 이미지로 남는다. <트위스터스>는 극장이라는 장소를 빌려, 이미지로서의 재난을 응시한다. 광폭한 태풍을 길들이는 첨단 과학기술을 전면에 내세운 서사의 결말에 나타난 오래된 극장은 마치 20세기에 봉인된 시대착오적인 장소처럼 다가온다. 이 친밀하지만 이질적인 장소에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왜 영화는 끊임없이 재난을 불러오는가? 그리고 영화가 불러온 재난은 왜 극장의 스크린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관측되는가?

영화, 기후적 세계의 시스템

<트위스터스>

영화는 기후를 형성하고 그것과 대면하는 장치다. “대기만큼 문화적인 것은 없고 날씨만큼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없다”라고 말한 롤랑 바르트의 견해를 따르자면, 영화 매체의 표면은 이 명제를 가장 촉각적인 물질로 구체화하는 장소일 것이다. 존 포드의 웨스턴이 미국이 꿈꾸는 이상적인 국가 공동체 재현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서부극의 영웅과 그가 속한 집단이 선보이는 아름답고 강렬한 행위를 학습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의 기반이 되는 대지와 하늘의 형상을 모두가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의 화면은 미국인의 삶을 경험하게 한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지평선을 화면 상단이나 하단에 두라고 조언했듯이, 포드의 영화는 위와 아래로 분할된다. 상단에는 구름과 암석과 위대한 영웅이, 하단에는 모래바람과 강물과 소박한 사람들이 있다. 그 중간에 이따금 고개를 들어 무정형의 구름을 바라보고 지면에서 부는 바람에 옷깃이 휘날리는 수많은 인간이 위치한다. 포드가 창조한 프레임의 기후적 규칙 안에서 존재하는 인간들을 통해 국가의 형상이 탄생하는 것이다.

아내가 죽은 뒤, 남편을 잃은 며느리와 나란히 서서 새벽하늘의 고요한 날씨를 지켜보는 <동경 이야기>의 히라야마처럼 영화 속의 인간은 기후를 매개로 타인과 같은 대기의 조건 아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내밀한 감정을 공유한다. 기후는 숏보다 미세한 층위에서 서로 다른 개체를 공통의 기반에 붙잡아둔다. “영상의 기본적인 기능은 관객에게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영화평론가 V. F. 퍼킨스 말처럼 영화를 행동하는 인간들의 몸짓에 관한 유희라고 가정한다면, 화면 속의 행동을 유발하는 가장 직관적인 기제는 이야기나 주제가 아니라 기후와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난다. 이는 논리적인 인과율로 설명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비바람이 몰아치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아니었다면 이상한 집착에 사로잡힌 남자가 여자의 무릎에 손을 대는 신체적 사건(<클레르의 무릎>)은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을 토대로 둔 영화는 한때 기후를 조정하는 거대한 규약의 다른 이름이었다. 고전기 할리우드 시스템은 인위적인 대형 강풍기와 살수차를 동원해 현실의 질감을 극단적으로 변형시키는 역량을 발휘했다. 버스터 키턴의 <스팀보트 빌 주니어>와 빅토르 셰스트룀의 <바람>이 일으키는 압도적인 바람, 존 포드의 <허리케인>이 빚어내는 폭풍과 해일의 물질성은 숏의 고정된 장소를 뒤흔들고 행동하는 인물의 신체를 집어삼켰다. 고전기 영화가 생산하는 재난의 이미지는 서사가 설정하는 규모를 초과하는 추상적인 형상으로 화면에 적힌다. 바람과 폭풍우가 들이닥치면서 집이 무너지고 버스터 키턴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간신히 빠져나온다. 창문을 침범해 들어오는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인해 릴리언 기시의 눈동자는 과도하게 동요하기 시작한다. 물론 대부분의 고전영화는 이 넘쳐나는 형상을 서사의 맥락에서 애써 수습하곤 하지만, 우리의 영화적 경험에 깊이 새겨지는 것은 순식간에 삶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재난의 파괴적인 형상이다. 재난의 이미지는 스튜디오 시스템 내부에서 그것을 붕괴하는 불안정성의 흔적으로 남는다. 변화무쌍한 기후는 영화를 뜻밖의 한계점으로 이끄는 망상이다.

프레임 내부를 완벽한 가상의 기후적 세계로 형성하려는 것은 할리우드만의 꿈은 아니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은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 선착장 시퀀스에서 새벽 바다의 안개 낀 풍경을 순차적으로 비춘다. 자욱한 안개로 가득한 항구의 풍경이 나타나고 사라진 뒤, 동이 트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죽은 선원의 시신 앞에서 슬픔을 표하고 분노를 드러낸다. 선원의 죽음이 집단의 감정과 행동으로 전이되는 과정에 새벽 날씨의 미세한 변화를 포착한 휴지 구간이 삽입되어 있다. 미세하게 변하는 항구의 기후는, 에이젠슈테인의 표현을 따르면 ‘무관심하지 않은 자연’으로 영화에 주어진다. 혁명의 몸짓을 일으키는 공동체의 감정은 내밀하게 움직이는 날씨와 무관하지 않다. 숏에 새겨진 기후의 어스름한 형체는 인간적 정념을 일으키고, 그렇게 공유된 감정이 집단의 행동으로 번진다. 그러므로 변모하는 기후를 묘사하는 영화의 실천은 하나와 다른 하나를 잇는 동반자를 구성하는 일이고, 다수의 인간이 이루는 통합된 세계를 생성하는 작업이 된다.

태풍의 인력

하지만 인물 내면의 의식과 발생하는 행위가 인과적으로 접속하지 않는 모던시네마의 시기를 통과하면서 기후를 매개로 인간 공동체를 포획하는 고전영화의 믿음은 무너지고 만다. 소마이 신지의 걸작 <태풍클럽>은 영화의 믿음이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서 태풍의 또 다른 역량을 실행하는 사례다.

적지 않은 평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소마이는 불운한 시기에 도착한 연출자다. 1980년에 첫 번째 극장용 장편 극영화를 연출한 그는 영화사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로 영화감독이 됐다. 70년대 초반에 닛카쓰 영화사에 입사해 스튜디오의 장인적 규범에 매혹됐던 소마이가 영화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한 시기에 일본영화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시대에 파산 선고를 내리고 있었다. 80년대 일본영화계는 구로사와 아키라에게도 충분한 자본이 허락되지 않았고, 로망포르노나 자주적 아방가르드 같은 우회적 실천도 지속할 수 없던 시기였다. 투명한 계승도 격렬한 저항도 가능하지 않았다. 소마이와 더불어 80년대 일본영화를 대표하는 연출자인 오바야시 노부히코의 표현을 빌리면 “필사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였다. 고전기 영화의 스튜디오 시스템이 토네이도처럼 그 자체로 수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기반이었다면(앞서 언급한 포드와 셰스트룀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영화산업에 흡수된 연출자들이다), 소마이는 반대로 분해돼버린 영화의 조건을 재구성하는 임시적 인력으로 태풍을 활용했다. 태풍은 흩어진 사람들을 한 장소에 불러들이고, 그들에게 동등한 날씨의 경험을 제공하는 마지막 수단이다.

<태풍클럽>은 벌거벗은 신체에 관한 기록이다. 태풍에 노출된 신체는 고립된 학교 안에서 비일상적이고 충동적인 움직임을 발명하고, 닫혀 있던 몸짓을 폭발시킨다. 비에 젖어 헐벗은 학생들의 몸은 그들의 보호자인 수학 선생 우메미야가 잔뜩 술에 취해 마주하는 약혼자 삼촌의 벌거벗은 상반신과 대비된다. 문신으로 뒤덮인 야쿠자 장르영화의 신체가 십대들의 신체를 다루는 영화에 불쑥 침범한다. 우메미야는 전자의 벗은 몸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후자의 벗은 몸에 굴복해야 한다. 한쪽은 자유롭고 순수하며, 한쪽은 억압적이고 추레하다. 하지만 두 종류의 몸은 모두 충동적이고 폭력적이다. 미카미에게 “15년 뒤엔 너도 나처럼 될 거야”라고 말하는 수학 선생의 예언처럼, 벌거벗은 어른들의 억압과 추함은 아이 같은 자유로움과 순수함에서 온 것이고, 벌거벗은 아이들의 자유와 순수는 언제든지 억압으로 채워질 수 있다. 수학 선생과 미카미가 창문을 바라보며 바깥으로 탈출하려는 몸짓을 공유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개체가 종을 넘어설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고민하던 미카미는 어른이라는 종족에 흡수되지 않기 위해 창밖으로 뛰어내리지만, 그 순간 우메미야와 같은 행위를 공유하며 경멸스러운 종족성에 가까워진다. 닫힌 세계는 외부의 침입에 잠재적으로 열려 있다. 소마이가 실천하는 영화의 의무는 주어진 모순을 간직한 채로 답습을 거부하는 것이다. 아직 한번도 만들어지지 않은, 그리고 결코 반복할 수 없는 저항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다.

교실 밖으로 나온 학생들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노래를 부르는 <태풍클럽>의 롱테이크는 저항의 형식을 증명하는 숏이다. 영화를 지탱하던 기존의 질서가 유효하지 않을 때 소마이는 프레임 안으로 태풍을 침투시킨다. 통제 불가능한 태풍의 물질적 감각이 영화 내부의 질서 정연한 세계를 내파할지도 모르지만,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들은 비바람이 불어닥치는 날씨에 노출됨으로써 외부로 열린 다른 세계와 대면한다. 대면의 과정에서 신체는 변형된다. 소마이는 그것이 기후 장치인 영화를 갱신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형식과 몸짓의 대립, 비극이자 코미디인 것

<태풍클럽>

소마이의 태풍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 조건을 하나의 시공간에 가둔다.닫혀버린 공간의 형식과 통제되지 않는 자유로운 몸짓, 무방비하게 젖은 학생들의 몸과 술에 취한 어른들의 몸, 집으로 되돌아오는 리에의 궤적과 창문 아래로 뛰어내리는 미카미의 선택, 변화를 지나친 삶과 종결된 죽음 사이의 모호한 경험을 한 자리에서 마주보게 하는 일회적 시간이다. 태풍이 몰아치는 밤은, 소마이가 형성한 서로 다른 유형의 감각이 분리불가능하게 혼재되어 있다. <태풍클럽>은 세계의 재난과 인간적 규범이 혼란스럽게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비극이자 코미디이다. 이 영화에서 비극과 코미디는 대비되는 구조로, 그러나 같은 모양으로 평등하게 펼쳐지고 있다. <태풍클럽>에 새겨진 이와 같은 모순은 당대의 영화문화를 둘러싸고 있는 소마이의 투쟁을 가시화한다. 도쿄에서 기차를 놓친 리에는 폭우를 맞으며 갈팡질팡하는 몸짓으로 같은 거리를 오간다. 돌아가야 할까?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할까? 소마이에게 주어져 있던 영화(‘스튜디오의 영화’)는 너무 일찍 끝났고, 그가 추구하던 영화(‘자주적 실천의 영화’)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붕괴 전야에 놓인 영화라는 종족의 시간 앞에 개체의 열망은 무기력하다. 이 장면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과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사이의 격차가 발생시킨 투쟁이 소마이의 필름에 무의식적으로 새겨지는 순간이다. 태풍과 폭우라는 물질에 접촉한 인간의 몸짓은 이처럼 불확실한 것이 된다. 그리고 화면의 외형을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흐트러트리는 이 장면이 지나가면, 영화는 무언가 달라지고 만다.

소마이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러나 절대 회피할 수도 없는 불가피한 통과의례의 시간을 다룬다. 그 시간을 통과하는 <태풍클럽>의 학생들은 억압을 벗어나는 자유로운 몸짓으로 프레임 안팎을 오가지만 역설적으로 프레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닫힌 공간에 가둬진 소마이적 아이들은 미래로 향할 수 없다. 끊임없이 창문의 경계 사이를 오가며 프레임에서 탈출하려던 몸짓의 행렬을,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미카미의 자살이 끝내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소마이에게 성장은 개체의 성숙을 의미하는 긍정적인 변화도, 미성숙한 인간이 새로운 자아를 획득한다는 선형적인 전진도 아니다. 우메미야의 불길한 예언처럼 성장은 단지 프레임을 벗어나는 일탈적 몸짓이 중단되는 것을 의미한다. <태풍클럽>의 마지막 장면은 학교로 걸어가는 두 친구의 뒷모습을 비좁은 틀 안에 가두고 정지시키는 효과로 끝난다. 그러므로 학교/창문/프레임이라는 통제의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변화를 일으키는 학생들의 몸짓도 발견할 수 없다. 태풍을 유효한 사건으로 가시화하는 공간적인 구획도 관측되지 않는다. 영화는 억압된 프레임과 자유로운 신체적 활동이 대립하는 장소에서만이 태풍을 하나의 사건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 아침, <태풍클럽>의 결말이 도착한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태풍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다. 태풍이 사라진 것은 학교에 갇혀 있던 미카미의 자살이나 도쿄에서 무사히 돌아온 리에의 귀환과는 상관없는 사건이다. 소마이의 영화는 무심하게 앞으로 이행하는 시간을 따른다. 태풍은 그들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인간의 시간을 통과한다. 학교 주변 여기저기에 물웅덩이가 생겨 있고, 리에는 등굣길에 만난 아키라에게 키가 자란 것 같다는 말을 건넨다.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지만 모든 것이 달라져 있다. <태풍클럽>은 태풍이 치는 동안 한번도 마주친 적 없는 두 학생을 전과 달라져버린 세계로 불시착시킨다. 태풍이 사라지면 개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래로 향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소마이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허구적인 일회성의 모험에 동참하는 일이고, 그 경험을 몸에 새긴 채로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미래를 살아가는 일이다. 소마이는 텔레비전과 영화의 속성을 비교하면서 텔레비전이 갖는 오락성은 인간 내면에 경험을 축적하지 않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영화는 그것을 공유한 인간 신체에 특정한 흔적을 남긴다. 허구를 매개로 생겨난 그 흔적은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재난의 리얼리즘

영화 속의 태풍은 세계의 질서를 정지하는 무정형의 견고한 형식이다. <태풍클럽>의 태풍은 일상의 환경으로부터 인간을 분리하고 고립시킨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고립된 장소에서 인간은 서로 무관하게 떨어져 있던 다른 인간과 하나의 집단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에서 태풍이 가하는 힘은 실로 가혹한 것이어서 바로 직전까지 끔찍한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위치하던 남학생과 여학생이 어느새 같은 무대 위에서 나란히 옷을 벗고 춤을 추기도 한다. 그 가혹함이란 영화 장치의 비인간적인 실행과 닮아 있는 것으로, 결말에서 미카미는 자살을 앞두고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지만 장면이 바뀌면 갑작스럽게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영화의 편집은 인물의 심리 변화가 설명되는 시간보다 빠르다. 기후는 그렇게 어긋나 있는 영화와 인간의 시간을 조정한다. 태풍이 도착하면 서사의 그럴듯한 논리는 뭉개진다. 하지만 그 순간, 이미지는 서사를 초과하는 변형의 신호로 독립적인 감정을 구현한다. <태풍클럽>은 현실에 귀속되지 않는 허구적 재난의 물질성을 발명함으로써 무엇보다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거짓을 매개로 출현하는 하나의 진실이며 태풍이 부는 시간에 일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재난의 리얼리티다.

앞서 말했듯이, <트위스터스>의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영화관의 부서진 벽을 통해 토네이도가 남긴 잔해를 지켜본다. 그들과 비슷한 자리에 앉아 같은 광경을 바라보던 우리는 이제 깨닫는다. 재난의 물질성은 영화관의 프레임 없이는 지각되지 않는 것이고, 영화 속의 인간은 재난이 발생시키는 기후와 대기의 변형이 아니라면 변화의 이미지를 형성할 수 없다. 여기서 극장의 스크린에 떠오르는 재난의 이미지는 하나의 리얼리즘이 된다. 영화가 재현하는 재난의 이미지가 변모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프레임에 담긴 재난은 현실을 분해하고, 분해된 현실을 매개로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인간이라는 피사체가 직면하는 변화의 시간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파괴될지 모른다는 불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화는 재난의 이미지를 외면할 수 없다. 혹은 같은 의미에서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세계의 외형을 갱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에 영화는 몇번이고 다시 재난을 응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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