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함 포템킨 (1925)
15세이상관람가|75분|전쟁
전함 포템킨
1905년, 러시아 민중은 차르 정부에 대항해 혁명을 일으켰다. 발단은 러시아 흑해함대 포템킨호의 선상반란이었다. 포악한 장교들과 불결한 급식이 원인이 돼 수병들은 장교들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배를 점령했다. 포템킨호가 오데사 항구에 도착했을 때 많은 시민들이 환영을 나왔고, 이들은연대해 정부군에 맞섰다. 비록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지만 12년 뒤 볼셰비키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전함 포템킨>은 이 사건의 20주년을 기념해 만든 에이젠슈테인 감독의 영화다. 당시는 소비에트영화를 민중교육과 선동의 기제로 사용하자는 레닌의 문화예술론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전함 포템킨'에서 민중의 적으로 나오는 장교들은 기만적이고 학살자들이다. 이같은 설정은 '파업'에서도 볼 수 있는데, '전함 포템킨'에 나오는 백군기병대와 코사크군대는 '파업'의 군대, 경찰과 같다. 5막으로 구성된 <전함 포템킨>은 무성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미학적 이상의 완결체이다. 기록영화 같은 담백한 구성을 택했지만 정중동의 조화와 구도, 형태, 선, 빛과 그림자, 질감, 리듬 등 영화적 조형요소의 모든 면을 완벽하게 통솔한 불가사의한 영화이다. 영화 사상 가장 뛰어난 장면으로 후대에 칭송받았던 오데사 계단 학살장면은 에이젠슈테인이 "몽타주의 방법론"이란 논문에서 주장한 몽타주의 5가지 유형이 모두 들어 있다. 오데사 계단에서 학살의 강도가 더해질수록 화면길이를 가속도가 붙는 리듬으로 점점 짧게 편집한 것은 "운율의 몽타주"이며, 차르 군대의 직선적인 행진과 공포 속에서 흩어지는 군중의 무질서한 움직임을 대비되도록 편집한 것은 "율동의 몽타주"이다. 빛과 그림자, 밋밋한 평면과 입체감 나는 화면의 대비 등을 보여주는 "음조 몽타주"는 계단에 비친 차르 군대의 그림자와 그 그림자에 묻혀 아들을 안고 절규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좋은 예다. "배음의 몽타주"는 운율, 율동, 음조 몽타주가 합해져 여러 갈등의 울림이 전해지는 효과를 낼 때 발생하는 효과를 가리키는 것이며 끝으로 지적 몽타주의 실례는 잠자고 있다가 표효하며 일어 나는 사자상을 연속적인 세화면으로 편집해 억압에 항거하는 민중의 비유로 삼은 것을 꼽을 수 있다. 몽타주 미학의 교과서. 장 르누아르와 그리피스, 에이젠슈테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서양영화 초창기의 맥락과 영화이론을 이해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 서양영화가 동양영화에 끼친 영향을 생각할 때, 비록 그 영향이 때로 강압적이었다 하더라도, 이 세 감독은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과제이다. 특히 에이젠슈테인이 사회주의 영화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한, 타락한 영화세상에서 사회주의 영화를 통해 어떤 희망적 단서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찾아가곤 했다. 그 대표작이 바로 <전함 포템킨>이다. 포템킨 호의 수병 반란과 오데사 계단에서 벌어진 대학살극이 <전함 포템킨>을 이루고 있는 핵심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화도 무기가 될 수 있으며, 뛰어난 대중교육책이자 선동임을 확인하게 된다. 억누르는 전함의 장교와 억눌리는 수병들, 압살하는 코사크 군대와 피 흘리는 인민들, 이 모든 것이 극단적인 대조를 통하여 표현된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즐겨 그렸고 극장의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던 에이젠슈테인에게 그러한 서술상의 대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정작 에이젠슈테인을 에이젠슈테인으로 만든 것은 몽타주로 알려진 그의 화법이었다. 그의 선배 푸도프킨이 필름의 결합을 통해 서술적 의미의 확대와 강조를 꾀했다면, 에이젠슈테인은 두 개의 대조적인 숏을 통합해 새로운 개념을 창조했다. 코사크 병사가 내리치는 칼, 깨어져 뒹구는 안경, 클로즈업된 피 흘리는 여인의 얼굴……. 이런 편집을 통해 에이젠슈테인은 상황 묘사라든가 감정의 고조를 넘어서서 관객들에게 단호한 정치적 입장을 요구하는 논리로 떨쳐나갔다. 물론 그는 이 오데사 계단 장면만이 아니라 많은 장면에서 여러 대의 카메라를 설치해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크기로 숏들을 찍었다. 그는 찍은 것을 어떻게 편집하느냐가 영화 창작의 처음이자 출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함 포템킨>은 이렇게 포템킨 호의 선상 반란에서 시작하여 오데사 계단을 거쳐 마지막 승리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숏도 낭비하지 않으면서 영화를 끌어간다. 서구 무성영화 특유의 지루하고 나른한 느낌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몽타주론에 대한 비판 역시 만만찮았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1929)을 비롯한 그의 작품에 대한 비판은 끝없이 이어졌고, 그는 자신의 몽타주론을 완성하기 위해 낮에는 소련 영화학교의 강단에서, 밤에는 연구실에서 일했다. 급기야 그는 형식주의자로 매도당했고, 어떤 영화는 정부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물론 그는 ‘위대한 사회주의’를 믿었지만 그것을 온순하게 따르는 멍청한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형식을 연구하는 사람을 형식주의자라고 한다면 매독을 연구하는 사람은 매독주의자다”라고 항변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전함 포템킨>은 소련 영화의 명예로 남아 있을 뿐, 자신의 조국에서는 이어지지 않았다. 또 인물 전형화론 같은 그의 독특한 이론 역시 후학들의 과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역설적으로 그의 몽타주 기법과 사회의식은 1930년대 영국의 사회적 다큐멘터리로 이어졌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제 거의 모든 할리우드 영화가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그의 편집 기법을 써먹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몽타주론은 이 타락한 영화세상만큼이나 통속화되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흥행작들이 영화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다시 <전함 포템킨>을 읽어야 한다. 고전이어서가 아니라 영화를 통해 세상과 아이들의 미래를 다시 생각해 보자는 뜻에서다. - 이효인 영화평론가,<세계 영화 100>(한겨레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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