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류승완의 <군함도>를 흥미롭게 봤기 때문에 이 영화 개봉 이후 불거진 여러 논란들에 대해 당사자만큼은 아니겠지만 평자로서 당혹감을 느꼈다. 주로 페이스북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링크한 글을 읽어보았는데 역사 왜곡에 관한 몇몇 수준 이하의 글들은 이 영화가 조선인 부역자들을 부각시키는 것과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고 지적하고 있었고 여론몰이에는 나름 이런 글들이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논외로 두어도 될 만큼 가치가 없고 오히려 노이즈 마케팅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소가 나오는 현상이지만, <군함도>에는 피해자가 없다고 단정하는 이 분야의 학자 박유하의 글이 전하는 입장은 경청할 만한 것이었다.
그는 <군함도>가 ‘한번쯤은 일본과 대적해보고 싶었던 조선 남성의 욕망을 구체화한 영화’이며 이 영화에 등장하는 “‘피해자’는 오로지 관념일 뿐이고, 그렇게 형해화된 ‘피해자’는 쉽게 소비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면서 강제 연행, 총살, 위안부 등에 관한 세부설정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하며(그 밖에도 많은 것을 지적하고 있으나 여기 다 옮길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상상하고 이해하는 일이란 과거를 산,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의 내면의 심연에 가 닿는 일이다. 어두운 땅밑 체험을 추체험한들 ‘오늘의 나’를 벗어나지 않는 한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쉽게 설명된 역사일수록 경계되어야 하는 이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지만 영화 <군함도>에는 ‘피해자’가 없다”고 쓴다. 영화평론가 듀나도 좀 다른 각도에서 이 영화를 비판하는데, “허구의 공포와 고통 때문에 군함도 사람들이 겪었던 진짜 공포와 고통이 약화되고 변형되고 날아가버리는 것”의 문제점의 근원은 “천만영화 대작을 만들려는 시도 자체”이며 “모든 사람들을 적당히 만족시키고 위험한 것을 건드리지 않는 오락영화를 만들려는 시도가 위험한 역사와 만날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를 이 영화를 만든 베테랑들이 사전에 읽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영화평론가 조재휘는 이 영화에 좀더 애정을 갖고 비판했는데 그는 이 영화가 “역사의 공간을 재창조하고 그 안에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는 실재감을 부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출가로서 감독의 진일보를 엿볼 수 있”으며 “이 영화의 군중 신이 펼쳐내는 운동 이미지의 활력은 실로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인물과 사건을 창작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역사적 사건의 실재를 비틀어버려선 안 된다는” 역사극의 규칙을 이 영화가 위반함으로써, 특히 광복군 요원 박무영(송중기)과 조선인 지도자 윤학철(이경영)을 축으로 한 플롯의 설정이 이 영화가 피하지 못한 오류의 근원이라고 본다. “가장 큰 문제는 외부자로서 무영의 존재가 극중 등장하는 군함도의 징용 피해자로부터 단결과 탈출의 동기를 빼앗아 서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끊고 있으며, 더 나아가 군함도 하시마의 실상을 재현하는 데 공을 들였던 초·중반의 미덕을 스스로 깨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통을 다른 에너지로 바꾸는 작업으로서의 영화
<군함도>에 대한 상기한 비판들은 그 자체로 반박할 만한 근거가 내겐 없다. 다른 각도에서 얘기를 풀어가고 싶다. 역사적 비극을 재현하는 것에 관한 논쟁은 기왕에 수없이 있어왔으며 그중 가장 유명한 비평은 질로 폰테코르보의 아우슈비츠 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 <카포>에 관한 자크 리베트의 짧은 비평 <천함에 대하여>가 대표적인데, 자크 리베트는 이 영화의 한 장면에서 전기 철조망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여성을 카메라가 트래블링 숏으로 찍어 프레임의 앵글에 정확하게 그 여자의 손을 포착한 감독은 경멸만을 받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 글은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적 비극을 다룰 때 영화에서 절대적 리얼리즘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을 변형하려는 어떤 시도나 스펙터클을 만들고자 하는 어떤 전통적인 접근도 관음증이나 포르노그래피가 되어버린다는 경고로 읽혔다. <쇼아>를 만든 클로드 란츠만이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를 격렬하게 비난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고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영화가 찬반 논란에 휩싸인 것도 마찬가지이며 알랭 레네의 고전다큐멘터리 <밤과 안개>나 라슬로 네메시의 근작 <사울의 아들> 같은 영화가 전통적인 재현적 접근 또는 완전을 추구하는 재현을 포기함으로써 거꾸로 고통의 경험에 진실하게 다가서려는 노력으로 평가받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본질적으로 역사적 비극을 재현하려는 영화 창작자들은 그 비극을 재현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자각함으로써 재현할 수 없음을 단호하게 주장하는 미학의 통로를 발견해야 한다. 어떤 수식도 타기하려는 노력 그 자체도 실은 어쩔 수 없이 영화적 수식이 되어버린다는 역설 앞에서 그나마 가장 최소한의 윤리적인 입장은 다큐멘터리적 재현의 위치를 취하되 재현 그 자체의 수식은 최대한 자제하는, 그럼으로써 보는 것을 제한하고 듣는 것의 우위를 가져오거나 상황을 재연하는 대신 증언이나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는 현재의 이미지를 화면에 불러오는 시도를 할 수 있을 뿐이다. <군함도>가 한국 현대사에서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는 재난을 착취하는 대다수 영화들과 비슷한 혐의를 받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이 영화가 다소 초점이 정확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데, 그건 박유하식 표현대로라면 ‘한번쯤은 일본과 대적해보고 싶었던 조선 남성의 욕망을 구체화한 영화’이며 피해자 중심의 서사에서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에 대항해 탈출하는 서사를 꾀한 부분적 변형의 가공물이며 몇몇 주인공들의 영웅 서사라기보다는 민중이 집단 주인공이 되는 프로파간다 액션영화이기 때문이다.
움직임의 어트랙션
이것은 천한 의도로 만들어진 창작의 결과물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남들의 고통을 보는 것은 착취일 뿐 그것에 진실하게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전제는 유효하되 이 고통을 착취한다기보다 다른 에너지로 전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꼭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류승완은 이 영화를 거의 두편의 다른 영화처럼 보이게 하는 구성을 짰는데, 조재휘의 지적대로 영화 중반까지 ‘역사의 공간을 재창조하고 그 안에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는 실재감을 부여하는 데 성공하지만’ 후반부는 대탈출의 클라이맥스로 구성해 전혀 다른 분위기의 긴장을 화면에 불어넣는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전에 군함도 지하 갱도에서 아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탄을 캐는 장면이 주는 위협감은 이 섬에서의 생존의 어려움을 강조하며 이 아이들은 후에 탈출하려다가 죽는다. 조재휘의 논리대로라면 이런 비극의 축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각성한 민중의 집단적인 궐기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류승완은 그렇게 하는 대신 자신과 딸의 생명 보전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강옥(황정민)과 이 섬에서의 탈출을 지휘하는 영웅적인 광복군 요원 무영과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려는 단순한 깡패 최칠성(소지섭)을 플롯의 향도로 삼아 독립군의 존경받는 지도자지만 실은 일본의 부역자 노릇을 한 윤학철의 배신을 계기로 집단 탈출극이 벌어지는 상황을 그린다.
전형적이고 단순한 플롯이지만 나는 빈약한 서사를 풍부하게 해주는 이 영화의 다른 비기가 있으며 그것 때문에 이 영화가 주는 프로파간다로서의 긍정적 미덕이 있다고 본다. 조재휘가 지적한 대로 <군함도>는 시종일관 군중 장면의 운동 이미지가 주는 굉장한 활력으로 넘친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했던 사람으로서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장면들이, 후반부의 탈출 시퀀스를 포함하여 중반까지 거의 대다수 장면들이 집단 이미지의 운동감을 구현하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나는 류승완이 이 영화를 기획한 이유가 돈을 벌기 위한, 천만 관객이 드는 영화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영화의 제작규모에서 가장 멀리 나아갈 수 있는 한계를 시험하면서 집단 이미지의 운동감을 연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전작으로 기록적인 흥행을 거둔 감독으로서 이 시도는 해볼 만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비기가 바로 움직임의 어트랙션이다.
이제는 역사적 유물로밖에 취급받지 못하고 있지만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주창한 개념 중에 ‘어트랙션의 몽타주’란 게 있다. 딱히 한국말로 번역하기 힘든 용어인데, 에이젠슈테인은 줄기차게 이 어트랙션의 몽타주 효과에 매달려 자기 영화를 스스로 분석하는 글을 여러 편 썼다. 이를테면 그의 대표작인 <전함 포템킨>의 한 장면, 반란을 일으킨 포템킨호를 환영하기 위해 오데사 계단에 시민들이 모여 갈채를 보내고 시민들이 음식을 포템킨호로 실어나르는 시퀀스를 분석하면서 그는 수직의 이미지와 수평의 이미지가 충돌하고 그걸 한꺼번에 포섭하는 이미지로 원호의 이미지가 있다는 걸 주장한다. 이 세 형태의 이미지들이 화면 내에서, 화면과 화면의 연결을 통해 지속적으로 충돌하며 이런 것들이 어트랙션 효과, 관객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관객의 마음에 트랙터로 밭을 갈 듯이 지울 수 없는 효과를 준다고 봤다. 영화의 역사에서는 이 영화의 이 장면 다음에 나오는 차르 군대의 오데사 계단 학살 시퀀스가 유명하지만 감독 에이젠슈테인이 주력한 것은 그때까지 그런 충돌의 이미지들이 지속적으로 관객의 마음에 밭을 가는 효과를 거두는 어트랙션의 장치들이었다. 그 결과로, 수많은 민중이 차르 군대 병사들에게 학살당했던 오데사 계단의 역사적 비극은 비극 그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니라, 반란을 일으킨 전함 포템킨호의 병사들과 응원하는 오데사 시민들의 이미지를 수직과 수평으로 충돌시키고 병렬시킨 끝에 영화의 끝 장면에서 포템킨호의 깃발로 수렴되는 이미지를 관객에게 각인시킴으로써 민중의 궁극적 승리를 암시하고 찬양하는 프로파간다로 영화의 입장을 재정의할 수 있었다.
이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군함도>에도 수많은 수평적 움직임들, 개미떼를 연상시키는 집단 움직임들이 있다. 카메라는 그들 속에 들어가 동참하는 입장에서 돌아다니거나 아니면 수직적으로 그 개미떼 같은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이것들을 묶는 감정적 키워드가 있다면 생존이며 영화의 인물들은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가해자로 설정된 일본인들이나 그들 편의 조선인들 역시 생존을 위해 필사적인데 그들의 감정적 기조는 광기로 고조된다. 영화의 후반부, 조선인들이 집단적으로 탈출을 결심한 후 그들의 수평적 움직임은 더 큰 단위로 설계되며 대단원의 전투 장면은 물길 가르기와 같은 끊임없는 수평적 움직임들로 넘쳐나고 이윽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수직적으로 점층 변화된다. 영화 초반, 갱도로 내려가 수평적으로 움직이며 꼬물거리는 사람들의 움직임에서 군함도 대지 위에서 갈라진 편 위에서 싸우던 조선인들이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상당수가 탈출하는 광경의 이미지 설계와 구현이 주는 쾌감은 이 영화가 평면적인 서사를 시각적 웅장함으로 극복하는 굉장한 전시효과의 영화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
환영적인 승리, 자긍심의 전시
20세기 초반 이루어진 상업적인 대중영화는 서사 영화작법의 규범 속에 묶이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영화라는 것은 관객에게 이야기를 말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관객에게 일련의 광경을 제시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 제시의 방식이 움직임의 현실적 환영을 통해 이뤄질 때 영화는 매혹을 준다. 류승완은 이 영화를 통해 서사영화의 한 구성요소로서 뮤지컬과 같은 일부 장르영화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어트랙션 효과의 특징을 액션영화의 활기로 재현해낸다. 이 집단 군무와 같은 액션을 통한 어트랙션 효과는 서사의 빈약함이나 전형성에 따라 쇠락하는 게 아니라 서사의 구멍을 상당 부분 대치하는 활기로 나타난다. 이 영화의 플롯 상당수가 추적극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도 어트랙션 효과와 무관하지 않다. 강옥, 무영, 윤학철은 플롯의 전개에 따라 끊임없이 감시를 피해 탐색하고 서로 쫓고 쫓긴다.
집단적 움직임의 활기와 화면 내의 움직임의 상호 충돌이 주는 어트랙션은 관객에게 공격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감각적 혹은 심리적 충격을 안긴다. 역사적 비극을 소재로 한 이 영화에서 이런 활기에 기초한 전시적 특질을 발휘하면 안 되는가. 나는 된다고 본다. 피해자의 고통을 직시하고 공감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에만 머물러서도 안 되며 피해자가 피해자의 입장을 고수하는 한 피해자의 입장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군함도>는 역사적 실재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애도의 형식을 조심스레 취하면서 피해자의 고증 다음 단계를 웅변한다. 영화 내내 이어지는 집단적 움직임의 전시가 서사적 흡인력을 대체하거나 누르면서 수평에서 수직으로 올라서는 대단원의 움직임을 통해 조선인들의 일시적인, 환영적인 승리를 묘사하고 자긍심을 전시하는 이 영화의 활기가 나는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