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주(hommage), 사전적으로는 존경, 경배, 헌사의 의미이지만, 내게 그것은 자신의 영화적 상상력의 기원에 대한 ‘고백’의 의미다. ‘표절’이 자신의 탄생 비화를 꽁꽁 숨기려 한다면, 오마주는 자신의 영화 세계가 맞닿은 뿌리가 무엇인지 고백한다. 오마주는 지금의 자신을 존재할 수 있게 한 과거의 영화, 감독, 배우, 장르를 끊임없이 ‘지금 이 자리’로 불러낸다. 그렇기에 오마주는 주술을 부려 죽음과 망각으로 이끄는 시간과 대결하고, 끝내 사(私)적이면서도 사(史)적인 영화 박물관을 짓는다. 기억을 공유하는 사적 박물관. 그러니까 ‘잇기’와 ‘짓기’로서의 오마주.
오마주의 모든 것, 히치콕과 드 팔마
오마주를 이야기할 때, 앨프리드 히치콕이라는 이름이 조건반사처럼 튀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를 넘어서는 오마주의 대상이 나타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실제로 영화사의 거장들, 그러니까 누벨바그 감독들부터, 구스 반 산트, 마틴 스코시즈, 니콜라스 뢰그 같은 감독조차도 그에게 고개 숙이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피아니스트를 쏴라>(1960), <비련의 신부>(1967) 등의 영화로도 모자라 그와의 대화를 책으로 엮어 존경을 표했고, 구스 반 산트는 <싸이코>(1960)의 장면 하나하나를 컬러로 그대로 옮겨 찍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수많은 사례 속에서도 클로드 샤브롤과 브라이언 드 팔마가 히치콕과 맺은 관계는 특별하다. 그들은 히치콕의 땅에 뿌리를 내린 채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했다. 단순한 인용이 아닌 창조적 변용으로서의 오마주. 어쩌면 히치콕의 영화가 더 빛날 수 있는 까닭은 그의 영화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이들 감독 덕분인지도 모른다. 히치콕의 영화 세계를 조망한 저서의 저자이기도 한 클로드 샤브롤은 히치콕 영화에 프랑스적인 감수성과 날카로운 사회적 문제의식을 녹여내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물론 히치콕에게 배운 듯한 줌인 트랙아웃의 엔딩 장면이 압권인 <부정한 여인>(1969)처럼 히치콕의 영화적 표현이 곧잘 발견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질식할 것만 같은 분위기의 샤브롤의 영화는 유머가 곁들여진 히치콕 영화와 질적으로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샤브롤이 히치콕주의자인 까닭은 (히치콕에 관한 저서에서 지적하듯이) ‘죄의 교환’이나 죄의식에 기반한 ‘죄의 전이’ 같은 히치콕 특유의 테마를 자신의 영화적 뿌리로 삼기 때문이다. 스릴러 장르는 히치콕에게서 발견한 이 테마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도살자>(1969)는 히치콕의 테마가 질식할 듯한 샤브롤의 세계와 만났을 때 완성될 수 있는 걸작이다.
히치콕 영화에 뿌리를 두면서 자신만의 영화적 꽃을 피운 또 다른 감독은 브라이언 드 팔마다. <시스터스>(1973)에서부터 <강박관념>(1976), <침실의 표적>(1984)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히치콕의 잔영을 지우기란 불가능하다. 샤브롤이 그렇듯이, 드 팔마의 오마주 대상 역시 히치콕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작이 무엇이든, 드 팔마의 손이 닿으면 그 대상은 ‘드 팔마의 것’으로 변한다. <전함 포템킨>(1925)의 오데사 계단의 처참한 충격이 서스펜스로 충만한 장르적 장면으로 돌변하는 것처럼. 히치콕의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드 팔마의 시작이 히치콕이었다 해도, 그는 분명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한 감독이다. <드레스드 투 킬>(1980)은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가 단순한 인용 이상의 창조적 행위로 도약한 대표적 사례다. 특히 <현기증>(1958)의 박물관 신을 차용한 장면에서, 낯선 두 남녀가 대화 한마디 없이 오직 시선의 힘만으로 ‘감정의 밀당’을 벌이는 장면 연출은 오마주가 원작을 넘어선 영화적 표현일 수 있음을 증명한다.
드 팔마의 오마주는 때로 ‘대리적 실현’의 형태를 띠는데, 그 순간마다 드 팔마의 영화는 원작을 넘어서는 파괴력을 보여주곤 한다. (그의 영화 가운데 부당할 정도로 저평가된) <미션 투 마스>(2000)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가 끝내 착륙하지 못했던 영화적 표현의 경지에 도달한 작품이다. 우주 공간에서 느끼는 아찔한 현기증(비유가 아니다!)을 연출하는 그의 손놀림은 스탠리 큐브릭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그 어떤 감독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극장에서 이 장면을 보며 어지러움에 구토 증세를 느낀 것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하워드 혹스와 벤 헥트에게 헌정된 <스카페이스>(1983)를 보라. 드 팔마에게 중요한 것은 원작의 스케일을 키우는 일 따위가 아니다. 원작의 토니(폴 무니)에게 은밀히 감춰졌던 근친상간적인 욕망의 폭발, 그것이 드 팔마가 하워드 혹스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방식이다. <스카페이스>는 갱스터 장르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영화 엔딩에서 광기를 폭발시키는 폴 무니(알 파치노)는 <화이트 히트>(1949)에서 “해냈어 엄마. 이 세상의 꼭대기야”라고 외치던 제임스 캐그니의 오마주다. 갱스터 장르의 시작과 끝이었던 제임스 캐그니 말이다.
잇기를 통한 영화의 확장
가장 흔한 오마주 방식은 특정 장면을 인용하며 관객과 영퀴(영화퀴즈의 줄임말) 놀이를 벌이는 것이다. 인용된 영화나 배우, 감독의 이름이나 장면을 맞힐 때 오는 ‘자뻑의 쾌감’. <몽상가들>(2005)의 오마주 방식은 유아기 상태에 빠져 있는 세 인물과 닮았다. 영퀴로서의 오마주. 우리는 <푸른 천사>(1930)의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춤이나 <스카페이스>의 폴 무니의 죽는 연기를 알아맞히는 영퀴 놀이에 참여하거나, 누벨바그와 함께했던 장 피에르 칼폰과 장 피에르 레오를 알아보는 눈썰미를 뽐내면 된다. 그 이상은 없다. <몽상가들>은 영화의 일부를 툭 떼어 페티시적으로 즐기는 도착적 오마주의 사례다(시네필 특유의 깊고 오랜 병이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에 비하면, 오마주로 영화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표출하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방식은 귀엽게 느껴진다. 담배 냄새를 없애기 위해 베개로 온 방을 휘젓는 장면으로 장 비고의 <품행제로>(1933)에 오마주를 바친 <400번의 구타>(1959)를 시작으로, 갑자기 루이스 브뉘엘, 잉마르 베리만, 에른스트 루비치, 앨프리드 히치콕 등에 관한 책들이 소포로 전달되기도 하고(<아메리카의 밤>), 특유의 복장과 제스처로 뜬금없이 지하철역에 등장한 무슈 윌로를 통해 자크 타티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한다(<부부의 거처>). 가지각색의 애정 표현, 트뤼포의 오마주는 끝이 없다.
물론 영화의 일부를 클립으로 삽입하거나 특정 장면을 흉내내는 방식의 오마주가 영퀴 수준에 머무는 것만은 아니다. ‘인용의 오마주’는 영화의 뿌리 잇기이다. <와호장룡>(2000)은 대나무 신으로 <협녀>(1969)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고, <친절한 금자씨>(2005)는 ‘나루세 빵집’을 통해 곤경의 삶을 홀로 헤쳐나가는 강인한 여성을 묘사했던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와 자신을 잇는다. 홍콩 누아르 시절의 오우삼은 장 피에르 멜빌에게서 영화의 길을 찾았고, <걸어도 걸어도>(2008)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오즈 야스지로의 땅에 조용히 발을 들인다. 그리고 <휴고>(2011)의 마틴 스코시즈는 조르주 멜리에스에게 3D영화를 선물한다. 이들의 인용은 단순한 영퀴가 아니라 잇기를 통한 영화의 확장이다. 이러한 오마주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은 장 뤽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1962)에서 만날 수 있다. 고다르는 험프리 보가트의 오마주였던 <네 멋대로 해라>(1960)를 비롯해 수많은 영화에 오마주를 바쳤지만, <비브르 사 비>는 그 어떤 영화보다 특별하다. 극장의 나나(안나 카리나)가 눈물을 흘린다. 그녀의 눈앞에는 잔 다르크(마리아 팔코네티)의 눈물이 있다. 나나가 <잔 다르크의 수난>(1928)을 보며 눈물 흘리는 이 장면은 드레이어에 대한 경배 이상이다. 안나 카리나의 눈물이 마리아 팔코네티의 눈물을 만날 때, 고다르는 상처받은 여인의 슬픈 영혼의 역사를 하나로 잇는다. 자크 오몽의 말을 빌린다면, 나나와 잔 다르크의 만남은 상처받은 한 영혼이 상처받은 다른 영혼에게 말을 건네는 영혼의 교류다. 수많은 영화와 감독, 배우에게 오마주를 바친 고다르지만, 그는 그 이상으로 존경받는 감독이기도 하다. 특히 <국외자들>(1964)에서 안나 카리나가 카페에서 춤추는 장면은 할 하틀리의 <심플맨>(1992),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1994), 정성일의 <카페 느와르>(2010) 등이 뿌리내린 장면이고, 그때마다 영화에 숨구멍이 트인다.
오마주, 소생의 힘
1990년대 팀 버튼이 영화 마니아들의 우상으로 자리하던 시절이 있었다. 팀 버튼의 기괴한 상상력이 어느 별나라에서 왔는지 궁금하던 무렵, 그는 <에드 우드>(1994)라는 해답을 내놓는다. <외계로부터의 9번 계획>(1958)의 오마주로 시작하는 <에드 우드>는 에드 우드로 대변되는 B급 문화에 대한 팀 버튼의 애정으로 가득하며, 더 나아가 예술가 특유의 비타협적 자세를 끝까지 견지했던 오슨 웰스와 <드라큐라>(1931)의 주연이었지만 퇴물 배우로 전락한 벨로 루고시까지 껴안는 작품이다. 에드 우드의 최고 걸작(?)인 <외계로부터의 9호 계획>은 최악의 영화제에서 가장 못 만든 영화로 선정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그는 몇년 뒤 ‘최악의 영화감독’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팀 버튼은 세상 모두가 비웃는다 해도, 에드 우드가 없었다면 자신도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남의 꿈이 아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았던 에드 우드는 팀 버튼의 거침없는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팀 버튼이 <에드 우드>를 만든 데 이어 에드 우드의 <외계로부터의 9호 계획>의 리메이크인 <화성침공>(1996)을 택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에드 우드는 팀 버튼을 꿈꾸게 했고, 팀 버튼은 에드 우드의 꿈을 실현한다.
팀 버튼의 오마주가 잊혀진 감독인 에드 우드를 되살렸듯, 로만 폴란스키의 오마주는 사라진 장르를 부활시킨다. <악의 손길>(1958)이 필름누아르의 비명(碑銘)이라면, <차이나타운>(1973)은 무덤 속 필름누아르를 깨우는 부활의 주술을 부린다. 표면적으로 <차이나타운>의 중심 인물은 기티스(잭 니콜슨)와 에블린(페이 더너웨이)이다. 하지만 음모로 가득한 누아르 특유의 세계를 성립시키는 인물은 에블린의 아버지인 노아다. 그가 없다면 누아르적인 세계도 없다. 폴란스키가 노아 역에 캐스팅한 이는 다름 아닌 존 휴스턴이다. 필름누아르의 어둠의 세계를 성립시킨 <말타의 매>, 그리고 그 감독인 존 휴스턴. 그것만으로 캐스팅의 이유는 충분하다. 필름누아르는 존 휴스턴과 시작과 부활을 함께한다.
‘부활의 오마주’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무성영화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미셸 아자나비시우스의 <아티스트>(2011)나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유하>(1999)가 부재하는 무성영화의 미학적 형태를 단발적으로 흉내내는 것에 가깝다면, 성룡은 사라진 무성 코미디 장르를 자신의 영화 세계가 버티고 설 토대로 삼는다. 우리는 1920년대 무성 코미디의 최후를 알고 있다. 영화가 목소리를 만나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을 때, 무성 코미디는 목숨을 잃었다. 버스터 키튼과 해럴드 로이드의 시대도 그렇게 끝났다. 할리우드에서 버림받은 무성 스턴트 코미디는 성룡의 몸과 함께 부활한다. 성룡은 매 영화에서 몸이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시험한다. 버스터 키튼과 헤럴드 로이드가 그랬던 것처럼. 성룡은 <프로젝트A>(1993), <상하이 나이츠>(2003)에서 시계탑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리는 장면을 통해 <마침내 안전>의 해럴드 로이드를 되살리고, <프로젝트A2>(1987)에서 무너지는 거대한 화벽 틈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으로 <스팀보트 빌 주니어>(1928)의 버스터 키튼을 부활시킨다. 할리우드에서 버려진 장르가 아시아의 성룡을 통해 되살아났다면,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 (2003)은 사멸 직전의 아시아영화를 소생시킨다. <사망유희>(1978), <수라설희>(1973),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 <아들을 동반한 검객>(1972)을 비롯해, <킬빌>이 오마주하는 영화는 셀 수 없을 정도다. 브라이드(우마 서먼)의 복장에서부터 애꾸눈으로 등장하는 한나,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남은 오렌 등의 캐릭터에서부터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울려 퍼지던 음향, 갑작스럽게 사용되는 애니메이션, 그리고 청엽정에서 브라이드가 ‘죽음의 88인회’와 벌이는 대결, 그리고 무엇보다 하얀 눈 위에서 벌이는 피의 결투까지, 한마디로 <킬빌>은 오마주의 콜라주다.
배우의 삶을 껴안는 오마주
타란티노는 <킬빌>의 하토리 한조 역에 야쿠자영화의 전설적인 배우이자 무술감독인 소니 지바를 캐스팅한다. 그것은 타란티노가 그의 영화 인생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고백이자 헌사다. <재키 브라운>(1997)의 팸 그리어 역시 마찬가지다. 그 제목에서부터 팸 그리어의 <폭시 브라운>(1974)에 대한 오마주임을 자처하는 <재키 브라운>은 팸 그리어의 영화 인생에 담긴 1970년대 블랙스플로이테이션 무비의 역사를 한꺼번에 끌어온다.
때로 영화는 배우의 영화 인생 전체를 캐스팅하기도 하고, 그 순간 영화는 오로지 영화라는 매체만이 전할 수 있는 감동으로 꽉 차 오르곤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혼은 그대 곁에>(1989)의 감동이 주인공의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천사로 잠깐 등장하는 오드리 헵번의 미소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라임 라이트>(1952)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라임 라이트>는 채플린의 전부지만 이제는 사라진 무성 슬랩스틱 코미디에 대한 레퀴엠이다. 퇴물 코미디 배우를 연기하는 채플린은 영화 말미에 생애 마지막이 될 슬랩스틱 공연을 벌인다. 이때 채플린이 캐스팅한 배우는 그의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버스터 키튼이다. 무성영화의 종말은 버스터 키튼에게는 사형선고였다. 무대에서 넘어지고 구르고 일어서고 또 넘어지는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의 슬랩스틱 공연은 영고성쇠가 겹겹이 쌓인 영화 인생에 대한 위로이자 경배다. 이 엔딩만으로도 <라임 라이트>는 (최고 걸작은 아닐지라도) 채플린의 가장 아름다운 영화로 남는다.
배우의 삶으로 영화의 아름다움이 완성되는 또 다른 사례는 <사냥꾼의 밤>(1955)이다. 사람 사냥꾼을 피해 도망친 남매는 천사 같은 노파를 만난다. 배우 출신의 찰스 로턴은 이 노파 역을 릴리안 기시에게 부탁한다. 릴리안 기시는 <부서진 꽃잎>(1919), <동부 저 멀리>(1920), <폭풍의 고아들>(1921) 등에서 미소마저도 슬픈 비련의 여인을 연기하며 무성영화 최고의 뮤즈로 군림했다. 그리피스의 멜로드라마는 그녀에게 시련 이상의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릴리안 기시가 예순이 넘어 주름진 얼굴로 시련에 떨고 있는 남매를 품에 품는다. 릴리안 기시가 아니었다면, 종교적인 신비로움까지 감도는 <사냥꾼의 밤>의 엔딩을 그 누가 설득할 수 있었을까? 릴리안 기시의 존재감은 영화와 시나리오가 질적으로 다른 창작물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할 정도다. 그리고 시간이 버리고 간 대상을 되살리는 오마주가 지닌 신비한 힘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