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미시마 유키오가 살아 있어서 신경숙 작가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 소송을 건다면? 미시마 유키오의 승소를 확신하는 법조인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법무법인 강호의 박찬훈 변호사는 말했다. “표절이다. 그런데 저작권 침해가 아니다”라는 말이 법원에선 종종 성립된다는 것이다. 현행 법은 창작자의 권리만큼이나 창작자의 자유를 최대한 보호하고 있다. 문제는 보호받아야 할 두 가치가 충돌했을 때다. 국내 판례를 보면 저작권 침해 소송에서 원고가 승소한 경우는 드물다. 모방의 정도, 모방의 악의성이 짙지 않다면 법을 피해 타인의 저작물을 표절할 수 있는 방법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아래 3건의 판례를 통해 ‘표절’과 ‘저작권 침해’ 사이의 간극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판례1_영화 <왕의 남자>와 희곡 <키스> 사건
개요_희곡 <키스>의 윤영선 작가가, <왕의 남자>(2005)가 <키스>의 제1막 대사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를 무단으로 사용해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영화의 상영과 배포를 금지하는 가처분을 신청함.
판결_원고 패소. 서울고등법원은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므로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는 창작성 있는 표현이라고 볼 수 없으며, <왕의 남자>에선 시나리오상 극히 일부분에 쓰인 대사인 데다 작품 안에서 그 대사가 수행하는 기능(<키스>에선 소통의 부재라는 주제를 뒷받침하는 표현으로 쓰였고, <왕의 남자>에선 장생과 공길의 장님놀이 장면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요소로 쓰였다) 역시 <키스>와 상이하다는 이유로 기각 결정을 내렸다(2006년 11월14일).
해석_두 저작물 사이에 부분적•문언적 유사성이 있다 하여도 그 유사성의 정도, 즉 빌려쓴 문장의 ‘양’이 적다면 저작권 침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릇 ‘표절의 양’이 중요한 것이다. 참고로 <왕의 남자>의 원작은 희곡 <이>이다. <이>의 저작자 김태웅은 <이>의 2005년 공연 팸플릿에 “극중 등장하는 장님놀이의 일부는 <키스>의 일부분을 허락 없이 오마주한 것이다”라고 밝혀두었다. 하지만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출처가 명시되지 않아 문제가 커졌다.
판례2_드라마 <태왕사신기>와 만화 <바람의 나라> 사건
개요_드라마 <태왕사신기>의 줄거리 및 이야기 패턴, ‘신시’ 개념 및 사신 캐릭터의 사용 등이 만화 <바람의 나라>와 실질적으로 유사하다며 <바람의 나라>의 저작권자인 김진 작가가 손해배상을 청구함.
판결_원고 패소.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태왕사신기>의 시놉시스와 <바람의 나라>는 고구려라는 역사적 배경, 신화적 소재, 영토 확장과 국가적 이상의 추구라는 주제 등 아이디어의 영역에 속하는 요소를 공통으로 할 뿐, 등장인물이나 주변 인물과의 관계 설정 등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는 창작적인 표현 형식은 실질적으로 유사하지 않다며 원고의 항소를 기각했다(2007년 7월).
해석_법원은 고구려 고분벽화인 사신도의 현무, 주작, 청룡, 백호를 소재로 삼아 주요 등장인물을 형상화한 점에서는 유사하나 이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의 지적 자산이며, 사신을 의인화한 것이 원고만의 독창적인 표현으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보기 어렵고, ‘훌륭한 지도자가 충성스러운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이상을 추구한다’는 줄거리는 수많은 영웅담의 일반적인 주제 또는 줄거리라고 판단했다. 이처럼 사상이나 주제, 아이디어 자체는 저작권법의 보호대상이 되지 않는다.
판례3_영화 <관상>과 드라마 <왕의 얼굴> 사건
개요_<관상>(2013)의 제작사인 주피터필름이, 드라마 <왕의 얼굴>이 <관상>의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편성을 확정한 KBS와 제작사인 KBS미디어를 상대로 제작 및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함.
판결_원고 패소.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왕의 얼굴>과 <관상>은 시대적 배경과 등장인물이 다르고, 사건의 구성 및 전개 과정 등에서 유사성이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부정경쟁행위에 해당한다고도 보기 어렵다며 사건을 기각했다(2014년 10월8일).
해석_저작권 침해 소송에선 이례적으로 부정경쟁행위 문제가 중요하게 제기됐다. 주피터 필름은 <관상>의 드라마 제작을 위해 2012년 KBS미디어와 접촉해 <관상>의 시나리오와 드라마 기획안을 넘겼다. 하지만 의견 및 조건이 맞지 않아 협상은 결렬됐다. 그러던 중 KBS가 독자적으로 관상을 소재로 한 드라마 제작을 발표해 사건이 소송으로 번졌다. 원고는, 경쟁업체가 이룬 성과를 KBS 쪽이 무단으로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 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부당경쟁행위로 인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