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만취한 이미지, 숙취의 잔해, <조커: 폴리 아 되>
2024-10-30
글 : 문주화 (영화평론가)

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전작 <조커>(2019)에서 탄생해 <조커: 폴리 아 되>(2024)에서 초라한 죽음을 맞이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요란스럽게 폐기된다. 과연 토드 필립스가 전작에서 뉴 아메리칸 시네마에 진 빚을 변제할 능력을 갖추었을까는 <조커: 폴리 아 되>에서 내가 확인하고 싶었던 단 하나의 의문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러나 역시 예측을 벗어나지 않으며 토드 필립스는 자신이 창조했던 조커의 신체를 이미지의 과잉 속에서 질식사시키고 장황하게 실패한다. 전작에서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표피적으로나마 계승해보고자 애를 썼던 시도를 뒤로한 채, <조커: 폴리 아 되>는 뮤지컬영화를 장르적으로 차용한다. 이를 위해 토드 필립스가 쓴 전략은 레이디 가가라는 동시대의 팝 아이콘을 할리퀸으로 기용한 것이다. ‘오늘은 농담 없나?’라는 교도관들의 반복적인 질문(이것을 하나의 읽어야 할 ‘신호’로 삽입한 부자연스러운 연출도 달갑지 않다)에도 더이상 농담을 하지 못하는 조커,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에게 토드 필립스는 레이디 가가의 목소리를 이식한다. 그러나 영화 내내 감지되는 것은 토드 필립스의 불안이다. 예컨대 <쉘부르의 우산>을 짐짓 떠올리게 하는, 아니 떠올려달라고 억지로 우겨넣은 것 같은 형형색색의 우산 아래 빗속을 걸어가는 신은 미학적으로 그 어떤 효용을 낳지 못한 채 오히려 영화에 대한 노파심만을 유발한다. 아서는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니로)을 죽인 날 기억나는 것은 ‘음악’이라고 들뜬 얼굴로 상담사에게 말한다. 리 퀸젤과의 음악적 만남이 마치 운명적으로 이뤄지리라 예견하는 것 같은 이 노골적인 대사는 토드 필립스의 불안을 드러낼 뿐이다. 그렇다면 이 균열의 기원은 어디일까. 조커라는 캐릭터는 1980년대 고담이라는 가상의 도시가 낳은 지리적 신체이다. 그리고 이 지리적 신체의 모태는 황폐화된 고담의 시공간과 그 안에서 조커의 존재를 부정하는 토머스 웨인 일가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서에게 태생적으로 부여된 패러독스는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는 부성(토머스 웨인)과 코미디의 왕(머레이 프랭클린)의 이미지를 광기 어린 시선으로 가까이에서 목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재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욕망해야만 하는 선천적 불행. 그러나 전편에서 토머스 웨인은 조커의 추종자에게, 머레이 프랭클린은 조커로 분한 아서에게 생방송 중에 총살당한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에게 이식된 분노, 광기와 거리두기에 실패하고 삭제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이미지로서의 죽음을 선고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서는 5명을 살해한 죄로 수감된 것이 아니라, 더이상 하나의 이미지로 자립할 수 없는 불구자로 예견된 사형선고를 기다리며 아캄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토드 필립스의 불안은 조커의 정체성을 형성하던 지리적 신체의 지위가 파기됨으로써 엉성해진 서사를 자각하면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남용과 오용, 이미지의 낭비

1927년 워너브러더스가 제작한 최초의 토키영화 <재즈싱어>에서 가수 역할을 맡았던 알 존슨은 영화에 목소리를 부여한다. 100여년 후, 워너브러더스는 가수의 권능을 복기한다. 더이상 농담을 할 수 없는 광대로 전락한 아서는 리 퀸젤과 만난 이후부터 노래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의 당위성을 증명하기 위해 영화는 기념비적인 뮤지컬영화 <밴드 웨건>의 일부 장면을 추출한다. ‘즐거움이 있는 곳이 바로 극장’이라는 대사는 일종의 선언으로 치환된다. 아서의 쓸쓸한 옥중일기를 화려한 뮤지컬로 치장하려는 감독의 야심 자체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토드 필립스가 숏을 조합하고 연쇄하는 방식에 있다.

에이젠슈테인은 1923년 광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단편 <글루모프의 일기>를 통해 몽타주를 실험한다. 혁명적 계단에서 완성되었던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전함 포템킨>(1925))는 어쩌면 광대의 얼굴에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커: 폴리 아 되>는 영화사가 부여했던 광대의 지위를 포기한다. 영화는 전편에서 아서가 종종 도달하곤 했던 특권적 순간들, 이를테면 광기 어린 살인을 저지른 후 발견되었던 자아도취적 몸짓과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 특질에서 다른 특질로 전이하는 힘’이 발현된 일그러진 얼굴성을 상실한다. 아서가 누렸던 특권적 순간은 매끈한 라이브 무대로 이양된다. 이 뮤지컬 퍼포먼스들은 환각이라는 이름으로 중요한 시퀀스의 마지막에 주로 위치하고,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가 멸등되는 순간 이야기는 멈춘다. 다급하게 마무리되는 이 허술한 변증법은 스펙터클의 순간을 해체하고 이미지들은 파편화된다. 서로 접합하지 못하고 토막난 이미지들의 무덤 속에서 아서의 회고록은 설득력을 잃게 되고, 흘러넘치다 못해 범람한 것 같은 레이디 가가의 노래 소리는 조커의 권능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남용과 오용, 이미지의 낭비로 점철된 이 괴상한 조합은 몽타주라기보다 장르와 레퍼런스로 뒤범벅된 브리콜라주에 가깝다.

연출가의 야심이 환각이 될 때

장 콕토는 <시인의 피>(1932)에서 시인이 겪는 창작의 고통을 표현한다. 영화에서 시인은 자신이 캔버스에 그려넣은 얼굴이 말을 하는 기이한 경험을 하는가 하면, 거울 안으로 침잠하여 초현실적 광경들을 목격한다. 현실과 무의식이 혼재하는 이 영화에서 시인이 존재를 자각하는 방식은 자신이 그린 그림, 그리고 거울 속 이미지와 끊임없이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었다. 아서 역시 전작에서 광대 분장을 한 거울 속 자신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것은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어가는 과정을 시각적, 촉각적으로 의식과 신체에 아로새기는 과정이었다. 즉, 조커는 아서에게 덧씌워진 새로운 층위로서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영화는 전편의 방식을 뒤엎고 호아킨 피닉스의 앙상한 신체를 아서와 조커, 두개의 인격으로 양분한다. 결과적으로 이 병리학적 접근은 조커의 폐기를 위해 복무한다. 리는 아서로부터 분장술을 찬탈하고, 아서와 자신의 얼굴에 손수 덧칠을 하더니 급기야 법정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조커의 추종자들로부터 환호를 받는다. 조커의 이미지를 강탈당한 아서는 리에게 ‘이제 그만 노래는 멈추고 말을 해달라’고 호소한다. 그렇게 뮤지컬은 중단되고, 아서는 미완으로 끝난 환각의 무대, 법정, 코미디 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만취한 이미지로 추락한다. 조커를 삭제한 토드 필립스는 아서에게 더이상 농담을 꾸며낼 잠재력이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또 다른 조커를 등장시켜 잔인한 농담 속에서 그를 죽음으로 내몬다. 그는 관객으로 하여금 죽어가는 아서를 응시하도록 전경화하여 강제하는 동시에, 후경에는 또 다른 조커 지망생이자 사이코패스를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실패를 교묘히 부인하며 숙취의 흔적을 남긴다. 피를 쏟아내며 죽어가는 아서를 마주해야 하는 것은 관객이 아니라 토드 필립스이다. 그는 대답해야 한다. 환각(혹은 착각)에 휩싸인 것은 아서가 아니라, 계보를 이어오던 영화적 캐릭터를 손쉽게 전횡할 수 있다고 믿었던 자신이 아니었는지. 이미지의 폐기 앞에서 그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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