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국회를 호령했던 유능한 정치부 기자 상연(김재화)은 발달장애를 지닌 아이 지우(빈주원)를 낳게 되면서 180도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경력은 중단되고 지우의 치료와 학교생활을 뒷바라지하느라 상연 본인의 인생이 완전히 사라질 정도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상연은 지우의 쌍둥이 누나 지수(이하린)의 따스한 말 한마디, 같은 처지인 대학 선배 영화(김채원)의 현실적인 조언, 지우가 가져다주는 작은 행복에 힘입어 삶을 이어간다. 불가항력적인 삶의 혼란 앞에 선 상연은 대개 슬퍼하며 때론 지나치게 섬뜩하고 종종 묘할 정도로 행복해한다. 이처럼 갈피를 잡기 힘든, 한 인간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 김재화 배우의 연기는 평소 인물의 ‘무표정과 심연’을 드러내고 싶었다는 그의 목표에 굉장히 가까이 닿은 듯하다.
- <밀수> 인터뷰 때 양양으로 이사 갔다는 근황을 전했다. 생활은 어떤지.
= 이사 간 지 만으로 딱 2년째인데 아주 만족스럽다. 아예 자리를 잡으려고 양양 안에서 조금 더 시내쪽으로 한번 더 이사도 갔다. 아이들 학교 다니기에 수월하고 나도 촬영은 다녀야 하니까. 그래도 집에서 5분만 나가면 산도 있고 바다도 있다.
- <하모니>(2009) 이후 매체 연기 경력 15년이 지났다. <그녀에게>는 단독 주연이기도 하고, 육아에 힘쓰는 개인사와 겹치기도 하니 꽤 중요한 작품으로 여겨졌을 것 같다.
= 양양에서 살기로 했던 전후로 연년생 아이들을 키우는 동시에 배우로서도 쉼 없이 달렸다. 일할 기회가 많아서 감사한 한편, 배부른 소리일 순 있으나 소위 말하는 번아웃이 왔다. 다작을 좋아하긴 하지만 학부모가 되니 상황이 너무 달라지더라. 워킹맘들은 다들 해봤을 생각일 거다. 가화만사성이 우선이라는데 ‘가화’가 잘되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다 보니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일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더라. 그렇게 심적으로 많이 힘들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느껴졌을 때 <그녀에게> 출연 제안이 왔다.
- 출연 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하모니> 강대규 감독님이 연락해 “대본을 한번만 더 읽어봐라”라고 조언해주시더라. 한번 인연을 맺은 감독님들 말씀을 흘려듣는 편은 아니어서 대본을 다시 읽고 이상철 감독님을 만났다. 솔직하게 연기 활동이 어려운 상태라고 말씀드렸는데 오히려 그런 내 모습을 좋아해주시더라. 결과적으로는 내 연기에서나 개인적으로나 운명 같은 작품이 된 것 같다.
- 연기적으론 어떤 감흥이 있었나.= 누가 내게 “해보고 싶은 연기가 있냐?”라고 물을 때마다 아무 표정도 안 짓는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답해왔다. 그런 면면들이 <그녀에게>에서 특히 잘 보였던 것 같다.
- 지우가 장애 판정을 받은 후 네 가족이 집에 들어올 때 상연의 표정이 정말 그랬다. 어떤 감정인지 가늠이 잘 되지 않는 얼굴과 몸짓이었다. 2012년 인터뷰에서 “캐릭터의 심연을 탐구”하는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했는데 딱 그런 연기처럼 느껴졌다.
= 그러게. 언제나 내가 맡은 배역의 심연을 궁금해한다. 내가 워낙 얕은 사람이어서 나는 그냥 이렇게 살지라도 내가 맡은 인물 혹은 다른 사람들의 속내가 항상 궁금하다.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심연을 완전히 찾아내는 일을 배우로서의 목표나 꿈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 지우가 입원했을 때 의사에게 “우리 지우 정말 깨어나는 것 맞는지” 되묻는 장면도 섬뜩할 정도로 상연의 심연이 드러난 느낌이었다.
= 맞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감독님에게 가장 많은 질문과 논의를 던졌던 장면이다. 그 뒤에 곤히 누워 있는 지우에게 충격적인 말을 건네는 장면에서도 물론 상연의 캐릭터가 잘 드러나긴 했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려웠던 건 그 의사와의 대화 신이었다. 감독님의 디렉션 끝에 상연의 텅 빈 눈이 나오게 된 것 같다.
- 지우, 지수와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키우는 부모로서 연기 중 감정적인 부침도 있었을 것 같은데.
= 감정적으로 힘든 것도 물론 있었지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실제 장애 아동의 부모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보실지에 대한 우려였다.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그린 한편의 영화로 모든 장애 아동 부모의 이야기를 대표하거나 대변할 순 없기 때문에 ‘상연이 이때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 건가?’라는 식의 걱정이 여러모로 생겨났다. 원작자인 류승연 작가님과 자주 교류하며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지만 우려가 계속 부풀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여러 갈래로 뻗치는 생각을 최대한 정리하고 감독님이 시나리오에 쓴 상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너무 큰 이야기로 부담을 가지기보단 상연의 이야기만으로도 괜찮다고 여겼다.
- 류승연 작가에겐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받았나.= 초반부에서 기자 생활 중인 상연이 국회의원과 전화하면서 막 소리치는 장면이 있다. 원래는 그렇게까지 소리 지르는 연기를 하진 않았는데 마침 현장에 오신 작가님이 “대놓고 더 세게 소리치고 워딩도 거칠게 해야 한다”라고 디렉팅을 주시더라. 속된 말로 최대한 재수 없게 하라고. (웃음) 걸을 때도 늘 고개를 15도 치켜들고 걸으라고 하셔서 최대한 그렇게 연기하기도 했다.
- 그렇게 고고한 기자였던 상연이 육아로 인해 인생을 바꾸게 됐다. 육아와 연기 생활을 병행했던 실제 생활과 비교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 이 상황은 말 그대로 혼돈이다. 출산 후 100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애들을 두고 촬영하러 가야 했을 때 왜 그리 죄책감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더라. 그런 죄책감이 없어야 애들을 편한 마음으로 더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단 생각까지 겹치면서 기분이 참 이상했다. 그런데 상연은 그만큼 힘든 와중에도 부모들과 연대하고 캠핑장에 놀러 가고 글도 쓰면서 세상에 나와 본인의 삶을 산다. 앞으로는 더 꿋꿋하고 씩씩하게 헤쳐나가되 도움이 필요할 땐 주변에 도와달라고 해보자고, 그렇게 상연에게 많이 배웠다.
- <그녀에게>는 상연이 익명의 ‘그녀’에게 부치는 연대와 애정의 목소리로 마무리된다. 이것은 상연이 배우 김재화에게 건네는 말이었을 수도 있겠다.
= 그런 생각까진 못해봤는데 되게 뭉클하네. 이 영화가 ‘재화에게’일 수도 있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