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크로스]
[트랜스크로스] ‘여기서 끝나는 게 정중하겠다’ 싶을 때 이야기를 마친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 펴낸 소설가 김애란
2024-09-12
글 : 이다혜
사진 : 최성열

소설가 김애란은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에 대해 쓴 글(<한국 작가가 읽은 세계문학>)에서 “인간은 참 이상해… 그렇지?”라는 질문을 길어올린 적이 있다. 목격하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지어내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이기도 한데, 독자와 창작자를 겹쳐내는 이런 자아상은 신작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의 주인공 중 하나인 지우를 닮아 있다. 만화를 그리는 지우는 엄마가 돌아가신 뒤 돈을 모으기 위해 반려동물인 도마뱀을 소리에게 맡긴다. 지우의 눈에 제법 부러워 보였던 채운은 비극적인 가정사로 인해 반려견 뭉치와 함께 이모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된다. 갑작스레 도마뱀을 키우게 된 소리 역시 지우, 채운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마주해야 할 죽음의 진실을 하나 품고 있다. 꿈과 이야기, 죽음과 이별 사이를 떠돌며 ‘다음’을 향해 가는 <이중 하나는 거짓말>에 대해 김애란 작가에게 들었다.

- 과작하는 편이다. 끝까지 소설이 되는 이야기와 그렇지 못한 이야기 사이의 차이는 어디 있다고 느끼나.

= 소설을 쓸 때는 시작하는 용기랑 끝내는 용기 둘 다 필요하고, 실망할 수도 있는 초고를 위해 책상 앞에 앉는 용기도 필요하다. 이번 장편도 끝내는 용기가 많이 필요했다.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늦어진 건 아니고 내 이야기를 길어올리면 됐던 시기를 지나서 모든 창작자들이 겪는 시기, 더이상 내 얘기만 할 수 없는 시기를 맞았고, 당연히 속도가 더뎌졌다. 내가 남긴 행보 중에서 어떤 게 반복이고 어떤 게 변주인지를 물으면서 쓰다 보니 늦어졌다.

- 어떤 인물이 김애란 소설의 주인공이 되나.

= 내가 가장 잘 아는 한 사람에게서 출발해보자는 마음이 있었고 그게 초기작에서는 대체로 나 자신이었다. 그러다 옆 사람, 앞사람, 뒷사람과 조금 연결이 됐다.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는데 아주 특별하거나 개성적인 인물들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괄호 같은 인물들을 좋아한다. 지나온 세월에 어떤 구멍이나 결락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스스로 이해해보려고 했던 인물들을 많이 썼던 것 같다. 그게 선이야, 희생이야, 용기야 하고 이름 붙이기보다 ‘그런 마음이 뭘까’ 혹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주는 인물들에 대해 쓴 것이다. 답을 내리는 대신, “여러분 이상하지 않나요?” 하고 질문하는 방식으로 인물들을 그려왔다.

- <이중 하나는 거짓말>의 주인공은 청소년이다. <바깥은 여름>에 수록된 <노찬성과 에반>의 주인공도 그랬고. 청소년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는 이유가 있나.

= 바깥 세계를 감각하는 첫 번째 기관이 피부다. 청소년은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그 피부가 얇은 사람들이다. 폭력도 사랑도 부채감도 더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또 청소년은 여백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나는 산문적인 세계를 그릴 때 이야기꾼으로서 재미를 못 느끼는 편이다. 그런데 청소년이나 동물들이 주는 운문성이 있다. 아이들의 사고방식, 간명하고 단순한데 겹이 많은 반응들. 약자인 노인, 어린이, 동물들이 주는 여백과 운문성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 <이중 하나는 거짓말>에는 동물들이 나온다. 말 붙일 사람을 찾기 어려운 어린 주인공들에게 동물은 무엇보다 소중한 친구이지만 때로는 삶의 짐이기도 하다.

= 이 책을 처음 소개하는 자리에서 성장이란 (성장보다는 성숙이라는 말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시점 바꾸기라는 표현을 썼다. 마땅히 보호받아야 하고 또 사랑받아야 하는 아이들이 어떤 대상의 보호자가 되고 책임을 지는 식으로. 어떤 면에서는 어른보다 훨씬 돌봄을 잘하지만 실패도 한다. 여느 보호자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어린이, 청소년들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인생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잔혹함, 비정함을 어른보다 빨리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때문에 어른들이 못하거나 안 했던 걸 동물 친구들에게 해줄 수도 있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능력으로 폭력의 대물림을 끊을 수 있는 모습도 그리고 싶었고. 어떻게 하면 이 친구들을 섣불리 구원의 자리에 놓지 않으면서도 무의미의 자리에 방치하지 않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 소설가가 되려면 거짓말하는 재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애란 작가에게 거짓말이라는 단어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나.

= 내 작업을 말해주는 가장 크고 넓은 단어. 가장 큰 괄호. 거짓말은 소설, 허구, 픽션이라는 말보다 크니까. 거짓말은 소설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도 하고, 소설의 기술적인 이름일 수도 있고, 소설의 본질의 이름이기도 하고, 소설의 역사에 관한 이름이기도 하다. 어렵거나 무거운 말이 아니라 크고 풍부한 말. 희미한 죄책감도 건드리면서 호기심과 유혹이 있는 단어이고, 이번에 제목에 쓰면서도 좋아하게 된 단어다.

- 앤솔러지 <음악소설집>에 실린 단편소설 <안녕이라 그랬어>에는 노래 가사의 영어 단어를 잘못 알아들으면서 생긴 에피소드가 나온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에서 채운이가 영어 공부를 하는 장면도 비슷한 인상이었다. 영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자기 이야기로 방향을 트는.

= 일단, 글을 쓸 때는 언어가 내 직업이고 기본 도구니까 나도 쓰면서 즐겁고 싶다. 한국어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을 잘 전달하고 싶다. 들어서 기쁜 독자님 소감 중 하나가 “한국어 독자로서”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해외에서 책 관련 행사에 참여해서 말을 하다 보면 통역을 거치는데, 내가 말을 깨끗하고 정확하게 하지 않으면 애초에 하고 싶었던 얘기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 한국어가 내게 너무 익숙하고 좋기 때문에 외국어를 통해 이걸 타자화해서 바라봤을 때 생기는 거리감이 상쾌했다. 마지막으로는 외국어 기초 회화를 배울 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나’로 시작된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무엇을 하는지. 나에 대해 말할 일이 많아지는 기회가 외국어 기초 회화라 소설에 쓰게 됐다.

- 김애란 작가의 단편을 읽을 때면 마지막에 주인공이 심리적으로 오갈 데 없어지는 이야기라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불안한 동시에 자유로운.

= 이야기를 어디서 끝낼 것인가. 어떤 때는 직관적으로 알고 어떤 때는 기술적으로 알게 된다. 나의 미적 쾌락을 위해서 쓴 소설이 아니라면, ‘여기서 끝나는 게 정중하겠다’ 그런 느낌을 갖고 쓴다. 이를테면 단편 <입동>에서 부부가 벽지를 들고 끝내는 것. 거기서도 뭔가 해소되거나 해결되진 않는다. 아마 장편보다는 단편이 더 그런 것 같다.

- <이중 하나는 거짓말>에는 꿈과 이야기가 자주 언급된다. 꿈이든 이야기든, 현실의 잔영인 동시에 도피처 역할을 한다.

= 나는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소설들을 많이 썼지만 장편을 쓸 때는 노는 마당을 넓게 쓰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어릴 때 읽었던 이야기들이 줬던 근원적인 매혹과 쾌락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질문들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이야기와 꿈이라는 단어에 좀더 집중해서 썼다. 꿈은 도피이기도 하지만 사람은 환상 없이 살 수 없다. 환상이 주는 기쁨을 엄숙함으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 기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너무 중력으로부터 멀어져서 휘발돼버리진 않았으면 좋겠다. 소설 막바지의 “꿈에서 나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돌아왔다”라는 문장으로 착지하게 하고 싶었는데, 그건 이야기꾼의 운명과도 비슷한 문장이다. 이론서에서 샤먼이든 사냥꾼이든 설명할 때, 어딘가로 가버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돌아와서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는 것처럼. 지우도 이야기꾼이니까 이야기로부터 받은 원초적인 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저 이야기이기만 하지 않을 수 있을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계속 고민했다.

- 지우는 학교에서 투명인간처럼 지내지만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으로 옮기는 능력이 있다. 이것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니는 일종의 초능력이다. “한마디로 요약되지 않고, 직접 말했을 때보다 그림으로 그렸을 때 훼손되는 부분이 적은 어떤 마음을” 통해 만들어진 이야기도 있나.

= 이야기의 방식이 아니고는 잘 전달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삶은 가십도 통계도 기사도 아니니까. <침이 고인다>를 냈을 때 88만원 세대라는 담론으로 해석됐었다. 세대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별명을 갖게 되는데 당시 그 해석을 듣고는 희미한 불만족이 있었다. 그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 말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말들도 필요하지만 충분치 않다는 감각. 그래서 이야기가 필요하다라는 결론으로 돌아가게 된다.

- 소설가로서 슬픔을 상상하는 것과 기쁨을 상상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어렵다고 느끼나.

= 창작 시기별로 조금씩 달랐던 것 같다. 20대 초반에는 농담이나 환상 등을 자주 애용했다. 젊어서 그랬을까? 생의 기쁨 같은 게 읽으면 실제로 느껴진다. 그때 내가 사는 환경 자체는 안정적이거나 윤택하지 않았지만, 이야기라는 도구가 나한테 주어졌을 때 이야기의 주도권을 갖고 이제 막 자기 삶을 풀어내는 사람의 기쁨 같은 게 느껴진다. 심지어 20대 여성 청년의 고독을 그린 단편에서도 그런 기쁨이 느껴진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어’라는 기쁨이. 그게 다른 사람 이야기로 넘어오면서는 소재의 까다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다른 사람 마음을 상상하는 게 되게 어렵잖나. 사람들이 ‘이 이야기는 가짜 같아’라고 느낀다면, 대부분 사실적인 디테일이 아니라 마음의 디테일이나 묘사에서 들통나는 것 같다. 그때 어려움을 느꼈고 그때부터 과작의 작가가 되기 시작했다. (웃음) 조심하려고 하는 건 있다. 슬픔을 애호하거나 탐닉하려고 하지 말자. 그것도 퇴폐다. 근데 나는 퇴폐도 좋다. 뭐든지 ‘이건 안돼’, ‘저게 옳아’라는 마음은 없다. 다만 내가 쓸 때는 슬픔을 탐닉하려고는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 “이야기가 가장 무서워질 때는 언제인가?”라는 소설 속 질문에 대해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때”라는 대답이 나온다. 살아간다는 것은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반복해 살아가는 과정이기도 하고, 그 이야기는 반드시 죽음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 직업에 관해 말해보자면 나에 대해 궁금하고 이야기를 많이 했던 시기가 있었다. 초기작들, 심지어 <영원한 화자>라는 단편에선 ‘나는’으로 시작해서 ‘나는’으로 끝난다. 최근 전승민 평론가가 쓴 산문집을 읽었는데 인상 깊은 구절이 있었다. 성장이란 내가 더 작아지는 일이라고. 우리는 보통 반대로 생각하잖나. 내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작품의 변화를 돌이켜보면 내가 더 작아지는 쪽으로 진행되어왔다. 또한 작가는 남보다 더 도덕적인 사람이라기보다 도덕의 맥락을 재검토하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개인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해 있었을 때, 꼭 작품으로 발표하지 않아도 내가 이러한 사건을 해석할 언어와 이야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 덕분에 넘었던 언덕들이 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소설에 헌신하는 느낌도 들지만 반대로 소설이 나를 돕는구나 싶을 때도 있었다. 실제로 나를 구해줬다는 느낌을 받았던 순간들이. 언젠가 직업적 의미를 잃는다 하더라도 나에게 이야기하기, 이야기 듣기는 삶의 방식이라고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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