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팀 버튼의 결혼 이야기, 세계의 규칙을 따르기, <비틀쥬스 비틀쥬스>
2024-10-02
글 : 이우빈

*<비틀쥬스 비틀쥬스>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신비로운 세계는 겉보기에는 혼란스러워 보이나 그 가운데 개개인은 시스템에 아주 잘 적응해 있고 한 시스템은 또 다른 시스템과, 그리고 시스템 전체와 잘 어울려 돌아가고 있어서, 한 인간이 그로부터 잠시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자신의 자리를 영원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위험을 느끼게 된다.” -너새니얼 호손 <웨이크필드>

<영화, 물질적 유령 : 이론과 비평의 경계를 넘어>(질베르토 페레스 지음 | 이후경, 박지수 옮김 | 컬처룩 펴냄)

<비틀쥬스 비틀쥬스>에서 가장 슬픈 이미지는 비틀쥬스(마이클 키턴)가 준비한 리디아(위노나 라이더)와의 결혼 계약서다. 그가 품에서 꺼낸 두루마리엔 몇십년을 고대하며 준비해놓은 결혼 관련 조항이 꼼꼼하게 적혀 있다. 아스트리드(제나 오르테가)를 이용해 부활을 시도하던 살인마 제레미(아서 콘티)를 단숨에 지옥 불에 던져넣어버릴 만큼 맘만 먹으면 웬만한 일이든 다 할 수 있는 유능한 악마가 비틀쥬스다. 그런 그가 왜 리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그렇게 상세한 서약서를 준비해야만 했던 것일까. 전편 <비틀쥬스>에서 비틀쥬스는 “이승 영주권”을 얻기 위해 정략결혼을 해야 하고, 이것은 자기가 정한 규칙이 아니며 이곳이 원래 그런 세계라는 말을 꺼낸 바 있다. 비틀쥬스는 이 구두계약을 제대로 이행하고자 30년을 숨죽이며 그 길고 긴 계약서를 준비한 것이다. 비틀쥬스는 저승에서 이승으로, 피안에서 차안으로 가기 위한 세계의 ‘규칙’을 엄밀히 지키려는 준법자다.

그런데 준법자 비틀쥬스는 ‘저승법 699조’를 어겼다. 생자를 저승에 데려와선 안된다는 법이다. 이조차 리디아와의 결혼을 위한 노력이었지만, 비틀쥬스의 불법성은 끝내 그의 불행한 말로를 초래한다. 되레 리디아와의 결혼 서약이 불공정 계약으로 파기되는 모순을 겪은 것이다. 긴 결혼 계약서가 무용지물이 된 결말이 어떠한 마법이나 판타지의 방법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약 문제라는 점은 <비틀쥬스 비틀쥬스>란 동화적 무대의 가장 아이러니한 웃음이자 팀 버튼적 주제의 중추다. <비틀쥬스 비틀쥬스>의 서사에 굳이 필요한지 싶었던 저승 경찰관 울프 잭슨(윌럼 더포)의 역할은 비틀쥬스가 예외적으로 699조를 어겼다는 말을 반복하기 위한 장치다. 저승이든 이승이든, 인간이든 악마이든 한 사회의 ‘규칙’ 혹은 ‘시스템’은 팀 버튼의 세계를 견고하게 구성하는 필수불가결 요소로서 비틀쥬스 역시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동화의 규칙을 아는 괴인

팀 버튼의 세계는 흔히 동화로 비유되는데 이 동화란 판타지 혹은 상상으로만 채워질 수 없는 구체성의 영역이다. 고딕풍의 기이한 시공간, 이상한 (비)생명체들의 외양, 난데없는 초자연적 현상이 넘실거리는 팀 버튼식 잔혹 동화엔 여러 가지 규칙이 가득하다. 이곳의 인물은 세계에 이미 주어진 시스템, 매뉴얼, 가이드 등에 의해 움직인다. <비틀쥬스> 시리즈에서 메이틀랜드 부부와 제레미의 이후 서사를 추동했던 ‘초보 사망자들을 위한 안내서’는 물론이거니와 <가위손>의 에드워드(조니 뎁)는 킴(위노나 라이더)의 아버지에게 테이블 에티켓부터 배워야 했으며, <슬리피 할로우>의 카트리나(크리스티나 리치)는 계모로부터 크레인(조니 뎁)을 지키기 위해 집안에 내려오던 마도서를 읽어야 했다. <비틀쥬스 비틀쥬스>의 망자들은 389,404,028의 대기 번호를 버텨야만 저승길 수속을 밟을 수 있다. 벽에 분필로 문을 그려 3번 노크하면 저승 문이 열린다는 것은 얼핏 말도 안되는 일처럼 보이지만, <비틀쥬스>라는 세계에서는 이러한 각종 규칙이 영화의 핍진성을 해치지 않는 엄정한 규칙의 일환으로 증명된다.

팀 버튼은 왜 이토록 세계의 규칙에 집착하는 것일까. <다크 섀도우>의 바나바스(조니 뎁)의 말마따나 팀 버튼에게 “이 시대는 미스터리”다. <비틀쥬스 비틀쥬스>에 나오듯 신이 아닌 나스닥에 기도하는 예술가들의 세계가 되어버린 작금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임을 수십년째 자청하고 있다. 사회의 메커니즘을 그 경계에서 가장 잘 이해하는 이야말로 서문에 언급한 너새니얼 호손의 어구처럼 자신을 언제든 잃을 수 있다는 공포심에 더 깊게 빠지기 마련이다. <비틀쥬스>에서 비틀쥬스는 자신이 왜 여기(메이틀랜드 부부가 만든 마을 윈터 리버의 미니어처)에 있는지 모르는 “불법체류자”라고 소개한다. 이것은 팀 버튼의 자기소개다. 자신이 이미 태어난 미국 혹은 지구라는 현실의 시스템에서 언제고 쫓겨나거나 죽을 수 있는 불법체류자, 무숙자, 비계약자 혹은 쓸쓸한 괴인이란 뜻이다.

환대받지 못하는 비극의 정취

이 괴인의 공포와 불안을 그나마 잠재울 수 있는 길은 세계의 시스템을 어떻게든 잘 이해하고 매뉴얼로 만들어서 지키는 일, 그리고 가장 잘 체계화되어 있고 공동체에 확실히 편입할 수 있는 ‘결혼의 규칙’을 따르는 행위다. 팀 버튼의 영화들을 돌아보면 대개의 괴짜 인물은 <가위손>의 에드워드, <유령 신부>의 빅터(조니 뎁)처럼 결혼이나 가족을 바라며 사회공동체에 들어가고자 하는 목표를 보여왔다. 이는 마치 버스터 키턴이 <우리의 환대>(1923)에서 보여준 방법론과도 같다. 아버지의 살인으로 인해 원수인 캔필드 가문의 아들들에게 살해당해야만 하는 미국의 거대한 규칙에서 윌리 맥케이(버스터 키턴)는 온갖 기행을 거쳐 캔필드 가문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 리디아와 결혼하려는 비틀쥬스처럼 신부와 성경, 즉 미국적인 결혼의 의식을 준비한다. 결국 캔필드가의 일원이 된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는 윌리의 진짜 사랑이기도 했다. 기행을 일삼는 책벌레(<전문학교>), 촬영기사(<카메라맨>)일지라도 키턴은 대개 이 세상에 자신이 환대받길 원하며 결혼이란 공동체의 규칙을 지킨 미국인이었다.

반면에 팀 버튼의 영화는 세계의 안온함을 원하는 괴짜가 결혼을 통해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끝내 실패한다는 비극을 통해 유독 강한 애수를 내뿜는다. 그리고 팀 버튼은 그 비극의 끝을 비극처럼 만들지 않기 위해, 자신의 슬픔을 지킬 수 있는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의도적인 해학이나 공포, 아름다움과 같은 자극적 외피로 영화를 가장한다. 아마 팀 버튼의 모든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결과임이 틀림없는, 킴을 결국 영원히 볼 수 없게 된 <가위손> 에드워드의 눈 조각 신을 떠올려본다. 혹은 또다시 리디아와의 결혼에 실패해 그저 풍선처럼 부풀어 ‘펑’ 터져버린 비틀쥬스의 허망함을 그려본다. 이것들은 아무리 세계의 규칙을 열심히 알고 따르려 한다 해도 결국 자신은 세상에 환대받을 수 없다는 최악이자 최상의 자조를 드러내며, 팀 버튼이란 작가 고유의 정취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