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인터뷰] ‘빛나지 않는 순간도 중요하다’, <대도시의 사랑법> 이언희 감독
2024-10-03
글 : 이유채
사진 : 최성열

이언희 감독이 <대도시의 사랑법>을 완성하는 데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4편의 중단편을 모은 동명의 원작 소설을 출간된 해에 읽고 그중 단편 <재희>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 제작사(고래와유기농)에 직접 제안했다. 원작자인 박상영 작가와 만나고 판권을 계약, 1년간 시나리오에 참여한 뒤 연출하면서 크레딧에 기획·각색·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10월1일에 개봉하는 <대도시의 사랑법>은 대학교 불문과 동기인 재희(김고은)와 흥수(노상현)가 13년간 쌓은 오색찬란한 우정의 시간을 다룬다. 20살에 처음 만나 서로에게 흐르는 유흥 본능과 아웃사이더 기질을 직감적으로 파악한 둘은 함께 살며 도통 떨어지지 않는 편견과 외로움 그리고 숙취가 뒤엉킨 삶을 살아간다. 서로를 너무 잘 안다는 이유로 때로는 각자의 약점을 정확히 타격하지만,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일 수 있겠냐”며 진실하게 말해주는 유일한 존재로 서서히 거듭난다. 이언희 감독은 숨죽인 영혼들이 복닥대는 이 막막한 대도시에 수호천사를 내려주고자 했다.

- 전체 소설 중 왜 <재희>를 영화화하고 싶었나.

마음껏 표출하는 재희가 멋있고 나와 달라 부럽기도 했는데 남성주인공인 ‘영’의 시점에서 진행되다 보니 숨겨진 면이 많아 보였다. 그만큼 이 캐릭터의 매력을 내가 한번 펼쳐 보고 싶고 그 과정에서 대리만족도 느끼고 싶었다. 최근 원작을 다시 읽으면서 내가 왜 <재희>에 끌렸는지가 뒤늦게 명확해졌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성을 관찰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내게 <재희>는 정확히 그런 이야기였다.

- 영화를 재희 시점으로 바꾸지 않은 이유는.

소설을 즐겁게 읽은 독자로서 큰 변화를 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재밌었던 부분을 최대한 살리면서 균형점을 찾고자 했다. 소설 속 문장들이 흥수의 내레이션으로 꽤 쓰였는데 흥수 역시 영처럼 소설가 지망생이라 멋있는 말이 들어가도 괜찮겠다 싶었다.

-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주의의 재희는 술과 연애에 취해 산다. 동기들 SNS에 구재희 가슴 사진이란 게 떠돈다는 걸 안 뒤에는 강의실에서 상의를 들어 올려 반격하는 ‘구재희의 난’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 재희를 나도 모르게 이상한 여자로 속단하고 있더라. 그때 <대도시의 사랑법>이 조금만 달라도 비정상으로 낙인을 찍는 공동체적 시선에 대해 말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재희를 캐릭터화하는 과정이 정말 어려웠다. 어디까지 과감할 것인지, 적정선은 무엇인지 고민도 내내 했다. 그러던 차에 “재희가 이 영화를 통해 어떻게 보였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을 받았고 즉각 사랑받는 인물이길 바란다고 답했다. 미처 몰랐던 내 진심이 기준이 될 수 있을 듯해서 이 매력적인 여자를 믿어보자고 생각했다. 들여다보면 재희처럼 노력형에 충실한 인간이 또 없다. 밤새 클럽에서 놀고도 시험 치러 학교 나오지, 아르바이트하면서 생활력 있게 살지, 사회에 나와서는 회사에서 꿋꿋이 일한다!

- 흥수의 경우 게이라는 성정체성을 그의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 가져가면서 캐릭터도 영화도 확장성을 얻었다는 인상이다.

흥수가 간절히 꺼내 보이고 싶은 건 성정체성뿐만 아니라 소설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이다. 흥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소설을 쓴다. 정말 잘하고 싶어서 숨기는 심정을 잘 알기에 그의 소설가 정체성이 크게 와닿았고 그것 역시 흥수를 구성하는 핵심이라고 보았다. 사실 흥수는 만드는 동안 조심스러웠다. 나와 젠더가 다르다는 점도 있지만 내 주변에 실제 성소수자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친구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영화에 적극적인 도움을 준 친구들과 보냈던 오랜 시간이 극 중에 녹아 있는 만큼 왜곡한 부분이 없기를 바랐다.

- 원작엔 없는, 흥수의 엄마 명숙(장혜진)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혼자 보고 왔다는 내용이 티켓숏으로 표현됐다. 어떠한 모자 관계를 원했나.

게이 아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엄마와 그 아들 사이의 문제가 퀴어영화를 봤다는 걸로 해결될 수는 없다. 다만 명숙이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 지점을 장혜진 배우가 잘 살려주었다. 자기 방 침대에 누운 흥수가 커밍아웃하는 신에서 말없이 나가는 장혜진 배우의 표정을 특히 좋아한다.

- 김고은 배우의 희로애락의 얼굴도 선명히 담겼다. 특히 후반부에 싱크대 앞에 선 재희가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웃는 신이 인상적이었다.

굉장히 힘준 신이었는데 다행이다. (웃음) 김고은 배우에게도 감사하다. 자연스러운 연기라는 게 배우에게 두려운 것일 수 있는데 산부인과를 나온 재희가 비 맞으며 오열하는 신에서 보여줬듯 고은 배우는 자기가 맞는다고 생각하면 자신감 있게 나아간다. 멋있는 배우다.

- 청춘의 빛나는 순간뿐만 아니라 군대, 취업 준비와 같은 인생이 재미없어지는 시기도 담았다. 공들인 티가 역력하다.

앞에서 신나는 신이 이어지다가 조용한 신이 나오면 영화가 지루하게 느껴질까 걱정했지만 그 신의 감정이 내겐 정말 중요했다. 인생에는 고저가 있고 13년을 다루면서 즐거운 순간만 담을 순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20살, 남들 시선이 자기 기준이 되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청춘들을 보면서 많은 분이 공감하길 바랐다.

- 지하철을 탄 직장인 재희가 자기와 비슷한 개성 없는 트렌치코트를 입고 플랫슈즈를 신은 여자를 씁쓸히 쳐다보는 신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렇게 재희의 슬픔이 드러날 때가 좋았다. 그런데 어제 다시 보면서는 ‘신발이 너무 새것 같은데 스크래치를 좀 냈어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나도 참 나다. (웃음)

- <대도시의 사랑법>을 보면서 이언희 감독의 데뷔작 <ing…> 생각이 많이 났다. 선천성 손 기형인 민아(임수정)와 그의 무한한 응원자인 영재(김래원)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는 편견과 자신을 살게 하는 존재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었다.

사람 참 안 변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1기 시절, 막내였던 나를 다들 소녀 취급하는 게 좀 싫었다. 그 뒤로 몇년 지나 나이 많은 남자 후배에게 <러브레터>를 좋아할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땐 ‘여자니까 예쁜 얘기를 좋아할 거란 뜻인가’ 하는 생각부터 했다. <대도시의 사랑법>까지 만들고 나니 편견과 차별, 그러한 상황 속 인물들이 서로를 보호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다. 준비 중인 차기작도 그것과 연관이 있다. 이 작품은 5년까지는 안 걸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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