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부산국제영화제]
BIFF #4호 [인터뷰] 완전히 파멸적인 영화를 만들기 어려운 시대다, <클라우드> <뱀의 길>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2024-10-06
글 : 임수연
사진 : 최성열

올해 구로사와 기요시는 <클라우드>와 <뱀의 길>, 두 편의 영화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의 주인공으로 호명된 그가 직접 참석하는 관객과의 대화 회차는 빠른 속도로 표가 동났다. 스다 마사키가 온라인 리셀러로 분해 집단 광기의 보복에 휘말리는 <클라우드>, 죽은 어린 딸의 복수를 하는 1998년 원작의 스토리라인은 그대로이지만 주인공이 여성으로 바뀐 <뱀의 길> 두 편 모두 감독이 천착해 온 테마, 실체화되지 않는 폭력과 공포를 기요시 특유의 필치로 그려낸다. “질문 수준이 무척 높고 내용이 날카로운” 한국 관객을 만나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과 영화제 기간에 만났다.

- <클라우드>는 액션 스릴러 영화이지만 조금 이상한 액션 스릴러다. <큐어> <회로>가 기존의 호러 연출 문법을 따르지 않은 것처럼 이 영화가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상상하게 만드는 방식 역시 전형적이지 않다. 무엇을 보여주고 생략할 것인지 결정할 때 어떤 고민이 있었나.

계획을 세워서 촬영 현장에 가도 다양한 상황이나 변수가 존재한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할지 결정한다. 그렇게 논리적으로 계산하기보다 직관적으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영화를 찍을 때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장소가 있고 배우가 있을 때 흘러가는 상황을 가능한 한 빈틈없이 새지 않게 엄밀하고 균일하고 평등하게 담는 것이다. 흔히 클로즈업할 것이라고 생각한 대목에서 그냥 클로즈업을 하면 장소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너무 멀리서 찍으면 배우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 평균을 찾아야 한다.

- 지금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배우 스다 마사키와의 작업은 어땠나.

스다 마사키와의 작업은 처음이었다. 매우매우 훌륭한 배우였다. 나도 그가 출연한 영화와 TV 드라마를 여러 편 봤다. 유약한 캐릭터도 악역도 잘 소화하고 주연을 할 때도 조연을 할 때도 있다. 자신의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며 어떤 역할이든 두려움 없이 도전한다. 멋진 영웅이 아닌 탁한 캐릭터를 제안했는데 흔쾌히 승낙해줘서 기뻤다. <클라우드>의 주인공은 좋은 인간도 나쁜 인간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 인물이 일본 장르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경우는 무척 희박하다. 이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스다 마사키처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모습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반드시 필요했다. 스다 마사키는 감독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연기를 보여줬다.

- <뱀의 길>은 1998년 직접 연출한 동명의 영화를 프랑스에서 리메이크한 영화다. 1998년 영화가 <링>의 각본가이기도 한 다카하시 히로시의 색깔이 강했다.

셀프 리메이크는 무척 특수한 상황이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프랑스 회사에서 먼저 제안을 줘서 성사됐다. 때문에 이런 방식이 옳은 건지 틀린 건지는 잘 모르겠다. ‘프랑스는 이러이러할 것’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작업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꿔보자는 단순한 발상에서 시작했다. 그러자 여자에겐 남편이 있고 남편에겐 아내가 있다는 부분을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 일본과 프랑스 영화 제작 환경에 차이가 있던가.

프랑스에서 영화를 찍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그런데 실제 로케이션 촬영, 현장 녹음 등 일본과 영화 만드는 방식이 거의 비슷하다. 다만 이런 차이는 있다. 요즘은 디지털로 작업하다 보니 영상이든 소리든 자유자재로 더하거나 빼는 가공이 가능하다. 그래서 흐린 날을 맑은 날로 바꿔보자는 식의 제안이 들어온다. 일본에서는 거의 하지 않는 작업이다. 있는 그대로 두고 현장 분위기를 가능한 한 살리고 싶었다. 내가 필름 시대 감독이라 더 그런 것일 수도 있다.

- 한국영화의 가장 특별한 지점 중 하나는, 세계적으로 예술성을 인정받는 이들이 훌륭한 장르영화 감독이라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봉준호와 박찬욱이 그렇다. 이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당신이 오랫동안 봉준호와 교류한 이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말해주셔서 정말 기쁘다. 명예롭다. 나와 비슷한 스탠스를 취하는 영화감독이 일본에서는 거의 사라졌지만 한국에는 아직 존재한다. 장르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현실에서 시작해 장르가 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봉준호와 박찬욱을 보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똑같이 영화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늘 느낀다. 그리고 그들이 참 잘하고 있어서 부럽기도 하다.

-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기자회견에서 “영화이기에, 영화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찾는다”는 표현을 썼다. <클라우드>와 <뱀의 길>을 만들면서 찾은 ‘영화적인 것’은 무엇이었나.

분명히 무언가를 찾아낸 것 같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 (웃음)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평범한 인간이 장르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모습은 문학에서 표현하기 어렵다. 영화는 관객이 스크린을 보고 몰입할 수 있는 영화적인 작용을 가능케 한다. <뱀의 길>에서 일본인 여성 시바사키 코우가 파리의 변방에 있는 공장에서 또각또각 발소리를 내며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걸어가는 모습은 영화이기에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영화적인 무언 가가 작용하는 순간이다.

- <큐어> <회로>가 버블경제 붕괴 이후 만든 공포영화였다면 <클라우드> <뱀의 길>은 2023년의 일본이 투영돼 있다. 특히 두 편의 <뱀의 길>에는 1990 년대와 2020년대의 일본 사회가 각기 영향을 끼친다.

<큐어> <회로> 그리고 <뱀의 길>(1998)을 만들 때는 20세기가 끝나갈 때였다. 버블경제가 붕괴됐다고 하지만 곧 다가올 21세기는 훨씬 밝고 진보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20세기의 끝에는 좀더 비극적이고 파멸적인 영화를 만들고 즐겨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막상 21세기가 되어 보니 더 행복하고 풍요로울 것이라고 생각한 시대는 오지 않았다. 세기말에 만들었던 비극적 주인공, 사회 밖으로 완전히 튕겨 나가는 망상을 픽션으로 그릴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한다. <뱀의 길>이나 <클라우드>도 끝까지 밀어붙이는 연출을 하고 싶은 바람이 있었지만 과거의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밀어 붙이지 못했다. 결국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은 장르영화다. 처음부터 판타지를 설정하면 전혀 상관없지만 현실을 시작점에 두면 더 멀리 가지 못한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달라졌다.

- 앞으로 호러 영화를 다시 찍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 <도쿄 소나타> <해안가로서의 여행> <산책하는 침략자> 등 멜로드라마적 색깔이 강한 작품을 찍었다.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기자회견에서 “한 작품을 끝내고 나면 ‘이제 다음 영화는 어떻게 찍지?’라고 고민한다”고 했는데, 그래서 다음 작품은 어떻게 찍을 것인가. (웃음)

다시는 안 찍는다고 한 적은 없다. 당분간 안 찍는다고 한 거다. (웃음) 그러니 다시 호러 영화를 찍을 수도 있다. 그리고 질문에 대해서는, 죄송하지만 정말 모르겠다. 영화는 내가 하고 싶다고 혼자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프로듀서부터 배우까지 많은 사람들의 만남에서 태어나는 것이 영화이기에 어떻게 만들고 싶다고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앞으로 현실적인 것, 영화적인 것, 장르적인 것이 서로 부딪혀가며 완성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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