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하나. 유리잔 안에 든 뜨겁고 맑은 찻물 속에서 팽그르르 돌아가는 홍차 티백이 한 장면의 중심일 수 있을까. 카페 테이블 위의 소서와 티스푼, 그리고 진한 에스프레소 위에서 서서히 물드는 각설탕 한 조각은? 질문 둘. 창밖을 내다보던 주인공이 거리를 지나가는 노파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일에 시간을 할애해도 괜찮을까. 내친김에 쓰레기를 분리수거 중인 노인의 일과를 도와주기까지 한다면…. 질문 셋. 문득 닥쳐오는 운명적 예감이나 형언하기 힘든 직감을 포획하기에 영화는 적합한 매체일까. 대사나 내레이션이 없는 채로도 관객은 인물이 지닌 심오한 ‘느낌’과 공명할 수 있을까? 세개의 질문은 곧 하나의 연결된 물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는 이 모든 질문에 가능성을 쥐어준다.
전염된 공동의 슬픔, 실체를 알기 힘든 상실감이나 연결감, 무언가 운명적인 것과 조우했다는 기묘한 확신 같은 것.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는 그런 것들을 향해 춤춘다. 지금껏 이를 종합하기에 적합한 것으로 여겨진 이성의 언어는 형이상학적이라는 수식일 테다. 그런데 어떻게? 어느 마스터의 관점을 질문해볼 법하다. 손에 붙잡을 수 없고 말로 형언하기도 힘든 그것을 영화로 어떻게 보여준 것인지를. <데칼로그>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세 가지 색: 트릴로지>가 건넨 대답은 우리의 가방과 주머니 속, 테이블 위, 우편함, 공동주택의 이웃, 낯선 행인들에 있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과 <세 가지 색: 블루>의 두 주인공은 어느 날 자기 가방을 바닥에 쏟아붓고는 그 안에 담긴 잡동사니들을 헤집는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프랑스의 베로니카(이렌 자코브)는 인화한 뒤 잊어버리고 있던 필름 사진 속 폴란드의 베로니카를 우연히 마주하고 분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세 가지 색: 블루>의 줄리(쥘리에트 비노슈)는 어린 딸이 마지막 순간까지 먹고 있던 것과 같은 사탕을 발견한 뒤 처음으로 긴 울음을 토해낸다. 소유한 모든 것을 대뜸 펼쳐놓고 보는 행위가, 그 잡동사니 속에서 진실의 파편이 굴러떨어져 나온다는 사실이 두개의 다른 영화에서 쌍둥이처럼 재생된 점이 흥미롭다. 각자가 짊어진 1인분의 짐 속에 진작 담겨져 있던 것. 혼돈 속에 숨겨져 있었을지는 몰라도 어쨌든 분명히 공생해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그런 걸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삶이 지닌 본래적 의미를 불쑥 깨우치게 하는 것이 계시의 역할이라면,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에 스토리가 희박한 이유는 그 자리에 계시적 순간을 채우기 위함이다. <세 가지 색: 블루>에서 홀로 카페에 앉은 줄리가 커피잔에 각설탕을 갖다대고 상념에 잠긴 모습을 촬영할 때 제작진은 그 한 장면의 완벽한 리듬과 이미지를 위해 한 나절을 썼다. 슬픈 여자와 각설탕이 발생시킨 ‘사이 시간’은 새로운 연결을 불러일으킨다. 맞은편 도로 위의 피리 부는 노숙자가 줄리의 죽은 남편이 남긴 미완성 악곡을 연주하는 미스터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환청일까?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줄리가 이것을 하나의 계시로, 악곡의 완성을 부추기는 목소리로 받아들였다는 사실만큼은 알아차릴 수 있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심장 통증을 느끼고 거리에 주저앉은 폴란드의 베로니카는 텅 빈 거리에서 홀로 저승사자처럼 다가온 바바리맨과 조우한다. 남자가 사라진 뒤 베로니카는 주머니에서 립밤을 꺼내어 입술에 문지르면서 방금 조우한 것의 실체를 곱씹는 사람처럼 미소짓는다. 시간이 흘러 프랑스의 베로니카는 불명의 소포로 배달되어온 긴 끈을 어루만지면서 공동의 운명을 가늠해본다. 베로니카와 줄리가 길을 지나가는 초로의 노파에 이끌려 그들을 돕는 장면도 두 영화에 나란히 놓여 있다. 죽음이 마치 오래전부터 그들의 끈질긴 이웃이었다는 듯이. 때로 시점은 인간 바깥을 향해 투명한 고무공이나 은식기의 표면에도 깃들기도 한다. 우리는 둥그렇게 굴절된 주인공의 초상 앞에 덩달아 초연해진다. 이렇듯 작품 세계 전반에 걸쳐 주제의식과 장면의 코드를 반복하는 가운데 확장해나가는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들은 그 연결의 궤적 자체가 마치 운명의 춤곡, 볼레로 같다.
1994년 폴란드 주간지 <프셰크루이>와 인터뷰에서 감독은 “모든 사람들이 인생에서 사물의 의미에 대한 각자의 질문을 품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영화를 통해 공개적으로 이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사물에 관한 느낌이 그들 내면에 관한 것과 비슷하리란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고도 답했다. 그러고는 실제로 자신을 동요케 한 사물과의 화학작용에 관한 에피소드를 덧붙인다. 트릴로지의 마지막 영화인 <세 가지 색: 레드>를 막 끝낸 직후의 겨울날. 우울감을 떨치기 위해 바르샤바의 한 서점에 들른 키에슬로프스키는 비슬라바 심보르스카에 이끌려 두꺼운 시집의 한 페이지를 무작위로 펼쳤다. 튀어나온 시는 <첫눈에 반한 사랑>. 심보르스카는 갑작스러운 열정에 빠진 두 남녀가 실은 언젠가 “그때 그 거리나 계단, 복도”에서 혹은 “회전문에서 마주쳤던” 때를 노래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우연’이 그들과 유희를 벌였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분명 깜짝 놀랄 것이다. (…) 그렇기에 운명은 다가왔다가 멀어지곤 했다./ 길에서 예고 없이 맞닥뜨리기도 하면서, (…) 누군가가 손대기 전에/ 이미 누군가가 만졌던/ 문고리와 초인종이 있었다. (…) 어느 날 밤, 깨자마자 희미해져버리는/ 똑같은 꿈을 꾸다가 눈을 뜬 적도 있었다.”
그리고 키에슬로프스키는 이렇게 받아친다. “나는 그 페이지를 끝까지 읽었고, 내가 방금 만든 영화가 같은 문제를 말하고 있었음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너무 절묘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지만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어쩌면 이미 알고 있지 않을는지. 이런 일들은 삶에서 제법 순순히 일어난다. 우리가 그것에 열려 있는 한. 그것이 말을 걸어오도록 내 바깥의 사물과 행인에 잠자코 시간을 내어주는 한. 이 모든 것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 그저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를 보는 방법도 가능하다. 초록과 세피아톤, 프랑스 국기의 삼원색으로 물든 일상의 어귀로 걸어들어가면 된다. 고요하고 심상한 조우들 가운데 불현듯 반짝이는 실오라기 하나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느낌이 강렬할수록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운명과 나, 혹은 당신과 나를 연루시키는 투명하고 거대한 거미줄이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