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자유로>와 <좋은날> 등에서 꾸준히 중년 여성의 삶을 탐구하던 황슬기 감독이 그 끝에서 자신을 발견한 것은 편찮으신 어머니를 잠시 간호하게 되면서다. “돌봄노동과 여성의 삶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나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 플러스엠상을 수상한 장편 데뷔작 <홍이>는 그렇게 타인의 중년을 감당하는 여성이자 자신의 중년을 바라보는 청년의 이야기가 되었다. 중년 여성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비정규직 강사이자 돈 때문에 어머니 서희를 요양원에서 집으로 데려오는 홍이의 오늘에는 그가 직접 보고 겪은 30대 미혼 여성의 애환이 녹아 있다. 동시에 “삶의 원인과 결과로만 홍이를 이해하도록 만들고 싶지 않았”던 황슬기 감독의 의지에 의해 홍이는 별다른 전사가 없는 모호한 인물로 그려졌다. “경제적 곤란이 개인의 잘못과 책임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대신 당면한 상황 속의 개인의 심리를 세밀히 들여다보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홍이가 전 연인에게 채무 변제를 독촉받는 장면은 “통속적인 드라마를 피하고 싶어 건조하고 거리감 있는” 구도에서 촬영했다. 홍이가 견지하는 무표정 또한 지나치게 감정을 극화하지 않은 채 “가장 일상적인 사람들의 표정”을 담으려는 의도에서다.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한 장선 배우의 섬세한 연기는 홍이의 이러한 중립적 표정 사이로 통제 불가의 감정이 스치는 찰나의 순간들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장선 배우는) 의심의 여지 없이 나의 원 픽이었다. 장선 배우의 지난 작품들을 보며 30대 후반의 현실적인 이야기를 온몸으로 감당하는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홍이의 수강생과 서희 등 중년에서 노년으로 이행하는 여성들의 불완전한 삶의 모습 또한 <홍이>가 마음 쓰는 대상으로 남아 있다. 홍이의 입장에서 돌봄노동의 짐으로 인식되는 이들은 영화 속에서 “자기 삶을 주도하지 못하는 서투른” 존재이자 손아래인 홍이보다 더욱 유아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중년 여성들에게는 표면적으로는 연장자의 지위가 씌워져 있지만 분명 나약한 점도 많고 보호가 필요한 사회적 약자이다.” 특히 서희의 경우 병과 노화의 흔적이 보이는 노년의 육체를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이에 “초기 치매 환자도 몸을 잘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에어로빅과 산책 등 활동적인 면모를 강조했다. 노쇠해지는 몸과 달리 강경한 성격과 말투 또한 서희의 “모순점이자 매력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서희에게는 병에 대한 두려움이나 홍이에 대한 모성애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서희는 그것을 강한 성격으로 감추고 있다.” 이들이 따뜻한 모녀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황슬기 감독은 “솔직함”의 부재를 파국의 원인으로 진단한다. “<홍이>의 인물들은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서로가 더욱 고독해지고 고립되는 상황을 겪는다. 서희는 물론이고 사회적 기반이 없는 자신을 숨기려 오픈 채팅의 익명성을 애용하는 홍이도 그렇다.” 하지만 솔직한 소통의 가능성이 제시되는 몇몇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홍이를 끝내 세상 속에 홀로 남긴다. “반짝이는 순간만 기억하기에 세상은 친절하지 않다. 오히려 가혹하더라도 현실을 냉정하게 보는 것이 이들에게 새로운 시작점을 마련해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