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때때로 성소수자가 정말 ‘소수’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순진함에 놀라곤 한다.”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혹은 트렌드의 투영일까.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과 국제 더블린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을 각색한 영화와 드라마가 모두 10월에 공개됐다. 2019년 당시 신인배우였던 한소희가 주연을 맡은 <폭설>, 2021년 <오징어 게임>이 공개된 후 이유미가 차기작으로 선택한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도 10월 개봉하는 퀴어영화다. <공작새>의 주인공은 MTF 트랜스젠더이며, 시즌3까지 제작된 게이 연애 프로그램 <남의 연애>에 이어 레즈비언 연애 프로그램 <너의 연애>가 출연자를 모집하는 공지를 냈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한때 금기시했던 성소수자 서사와 구현의 폭을 넓히며 사회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낙관하기에는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하는 현실의 장벽이 존재한다. 원작자이자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의 대본을 쓴 박상영 작가는 SNS에서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이 모 단체에 좌표 찍히고, 관련 부서에 민원 폭탄이 들어간 덕분(?)에 결국 공식 예고편을 모두 내리게 됐다. 드라마 오픈 9일 전인데 아무 홍보도 못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 부아가 치밀어올라 밤새 한숨도 못 잤다”는 글을 남겼다. 실제로 방영 일주일을 앞둔 10월14일에는 전국 119개 시민·학부모 단체가 CJ그룹 본사와 티빙 사옥 앞에서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 방영 계획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이것만 놓고 보면 한국 사회는 14년 전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가 동성애를 학습시켜 에이즈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일간지 신문광고가 실리던 시절에서 조금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바로 지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 미디어에서 퀴어의 재현은 어디까지 왔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미디어가 퀴어를 재현해온 지난 30년
전원근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에 따르면 성소수자 운동이 본격화되기 이전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 한국에서 동성애는 인식의 지평에 등장하면서 동시에 배제된 존재였다. 1985년 한국인 HIV 감염자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이후 <선데이서울>과 같은 대중 주간지는 동성애를 한국 사회와 문화를 오염시키는 오염원이자 에이즈를 통해 국민의 신체를 위협하는 범죄로 연결시키면서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혐오를 재생산했다. 1990년대 초반 대학가를 중심으로 성소수자 운동이 시작되고 해외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미디어가 퀴어성을 묘사하는 사례 역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TV드라마에서는 1995년 MBC <두 여자의 사랑>, SBS <째즈>, 1999년 KBS <슬픈 유혹>이 동성애자를 묘사한 초창기 작품으로 꼽히며, 1995년 개봉한 <내일로 흐르는 강>은 성소수자 주인공과 그의 문화를 재현했다는 지점에서 한국 최초의 퀴어영화로 호명된다.
2000년 방송인 홍석천의 커밍아웃과 방송 출연 금지, 2001년 국내 트랜스젠더 1호 연예인 하리수의 데뷔는 한국 사회 성소수자 담론을 본격적으로 촉발시켰지만 여전히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는 동성애를 가부장제 갈등의 원인, 문란한 성생활과 연결해 조명한다거나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대상으로 규정했다. 2000년대 신인 드라마 PD의 실험적 연출을 지지했던 TV 단막극은 성소수자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은 드문 사례들을 남겼지만 미니시리즈 속 퀴어는 주연 캐릭터를 보조하는 ‘감초’로 등장하거나 성정체성이 드러나는 대목으로 드라마틱한 반전을 꾀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MBC <커피프린스 1호점>, SBS <미남이시네요>, KBS2 <성균관 스캔들> 등은 결국 남성성과 여성성의 고정관념을 재생산하고 이성애 중심의 결말로 귀결되는 ‘유사 동성애’ 코드로 한때의 유행을 만들었다. 김수현 작가의 SBS <인생은 아름다워>는 대가족 안에서 동성애자 커플이 겪는 갈등과 화해를 주요 서사로 다뤘다. tvN <마인>의 정서현(김서형)은 남편 한진호(박혁권)에게 “나는 성소수자”라고 고백하고, 드라마는 누군가의 성정체성이 죄책감의 근거가 되거나 업무 능력과 무관하다는 점을 짚고 넘어간다. JTBC <구경이>는 표면화된 게이 커플 외에도 서브텍스트로 읽어낼 수 있는 퀴어성을 심어둔 작품이다.
영화는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시청자층을 고려하는 TV드라마보다 타기팅을 정확히 할 수 있는 매체다. ‘퀴어영화’로 계보화하거나 퀴어성을 읽어낼 수 있는 작품들이 유의미하게 제작되어왔다. 김선아 영화학자는 1990년대 후반 한국영화 신르네상스 시기 레즈비언 섹슈얼리티가 등장한 영화로 <텔미썸딩> <노랑머리>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꼽는다. “<노랑머리>와 <텔미썸딩>은 레즈비언이 등장하기 위한 재현의 조건을 제시한다. 그것은 범죄자로서의 레즈비언, 공범 관계의 두 여성, 여성의 욕망과 범죄의 비례관계, 실패한 이성애 여성의 선택으로서의 레즈비언 섹슈얼리티, 어머니의 부재가 낳은 비정상적인 섹슈얼리티로서의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는 규범적인 정상성보다 우월한 일탈적인 비정상성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법과 언어의 질서에 균열을 내는 감각과 비언어의 소유자이자 저항적 주체로서 10대 레즈비언을 등장시킨다.” 게이들의 성애가 직접 묘사된 최초의 한국영화 <로드무비>는 개봉 당시보다 당대 보여줬던 미학적 성취를 재평가하는 평자들이 이후에 나타났다. 2005년 천만 관객을 동원한 <왕의 남자>는 이준기가 연기한 공길 캐릭터가 ‘여자보다 예쁜 여자’로 대상화되고 있다는 일각의 지적이 있었지만 이후 퀴어 콘텐츠의 제작과 투자, 흥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꼽힌다. 오스카 감독상을 받은 <브로크백 마운틴>이 국내 개봉 당시 화제를 모은 것도 한몫했다. 2006년 <후회하지 않아>는 1970~80년대 호스티스영화의 틀을 가져온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였다. 제작비 1억원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관객수 4만3천명을 동원했다.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는 주요 캐릭터 중 하나가 게이였고, 영화 <쌍화점>은 역사적 사료에 허구의 상상력을 가미해 동성애를 재현했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남성적 시선(Male gaze)으로 레즈비언 성애를 다룬 게 아니냐는 비판이 일부 제기됐지만 분명 한국 퀴어영화와 페미니즘영화 양쪽 모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작품이다.
한편 유튜브와 OTT의 발전으로 유명인이나 허구의 캐릭터가 아닌 일반인의 성정체성을 주제로 한 콘텐츠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고 일상을 공유한다. 개인 방송과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기존 미디어에서 재현되고 확산시켰던 이미지를 넘어 보다 구체화된 퀴어성을 제안한다.
혐오 사회에서 퀴어 콘텐츠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이같은 맥락에서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 예고편이 내려가고 방영 중지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는 풍경은 분열적으로 다가온다. 한국 미디어의 퀴어 재현 양상은 발전해왔지만 모두가 함께한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일부 혐오 세력이나 정치인들에게 국한된 문제도 아니다. <대도시의 사랑법>의 박상영 작가는 “미국이나 영국 퀴어 드라마처럼 못할 게 뭐 있냐, 시청자들의 눈은 이미 거기까지 와 있는데 세상을 한번 뒤집어보자는 마음으로 원래 훨씬 적나라하고 과격한 대본을 썼다”는 비하인드를 들려줬다.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을 만든 박준호 총괄 프로듀서 역시 “유명 감독과 배우가 독립영화에서 주로 봤던 퀴어 로맨스에 참여해 메인스트림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이 작품을 시작”했다. 제작진이 현실의 장벽을 체감한 건 주연급 캐스팅을 시작하고부터다. 오디션에 신인배우는 추천하지만 조금이라도 인지도가 있는 배우일 경우 선을 긋는 회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남윤수 배우가 스스로 고영 역을 하겠다고 선언한 이후에도 투자사들로부터 “아직 한국에서는 시기상조인 것 같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투자자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대본이 여러 번 수정됐고 지금의 버전이 탄생했다. <대도시의 사랑법>만 겪은 난관은 아니다. 성소수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을 준비 중인 드라마 제작자 A씨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투자자들이 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페미니즘이나 LGBT는 혐오 세력으로부터 이른바 ‘좌표’가 찍혀서 부정적인 이슈를 생산할 수 있다는 우려를 촉발할 때가 많다. 심지어 혐오 세력의 사이버불링이 잘못됐다는 비판이 확산되는 풍경도 마케팅 측면에서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고 반응한다. 나중에 어떤 화를 입을지 모르니 조심하자는 식이다. OTT에서 해외 퀴어 드라마를 접한 시청자들의 안목은 이미 높아져 있는데, 직접적인 스킨십만 들어가도 과격하니까 좀더 소프트하게 가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위협적일까? 민원이나 오프라인 시위에 나선 호모포비아들의 규모나 그들이 실질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따져보는 사람은 없다. <대도시의 사랑법> 하이라이트 상영회 후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주연배우 남윤수는 “자고 일어나면 응원 메시지가 100개씩 와 있다. 내가 올린 영상에 악플을 다는 사람은 100명 중 1명”이라며 혐오 세력의 불링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이 업계는 100명 중 1명의 목소리를 지나치게 크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언제 어디서 집회를 해야 하는지 플랜을 정확하게 짜서 타깃을 명확하게 잡은 후 끈질기게 행동”(박준호 총괄 프로듀서)하는 그들이 정치에 도가 튼(?) 덕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기사화를 통해 그들에게 스피커를 쥐어주는 언론, 분노 혹은 조롱을 연료 삼아 댓글과 ‘좋아요’를 유도하는 헤비 업로더, 혐오를 이용해 지지자를 얻으려는 국회의원, 시청자 반응을 선택적으로 듣고 해석하는 결정권자들은 소수의 반발이 다수의 그것인 것처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내심을 갖고 투자자를 설득해 결과물을 만든 제작진의 성취와 99%의 응원에 먼저 귀 기울이고 싶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실관람자만 매길 수 있는 CGV 에그지수 94%를 기록하며 관객수 66만명(10월23일 기준)을 동원했고 이는 동기간 상영 중인 <조커: 폴리 아 되>의 성적보다 높다.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은 공개 직후 X(옛 트위터) 한국 실시간 트렌드에 올랐고 왓챠피디아 네티즌 평점 3.8을 유지 중이다. ‘여자보다 예쁜’ 게이를 대상화하며 ‘헤테로가 허락한’ 동성애 서사도 아니고 사회의 지탄에 괴로워하며 주인공이 자살하지도 않는다. “순도 100%의 있는 그대로의 2010년대 퀴어의 삶을 박제하듯 보여준다”는 박상영 작가의 의도가 정확히 구현된 수작이다.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와 <폭설>은 각각 이유미와 한소희의 (입술 부딪치는 키스신이 있어서 호모포비아들이 우정이라고 우길 수도 없는) 레즈비언 로맨스이며, <공작새>는 LGBT 영화 중에서도 드문 트랜스젠더 주인공 캐릭터가 나와 국악과 왁킹을 섞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정년이>는 광고 단가가 가장 높은 자리 중 하나인 tvN 토일 드라마 슬롯에서 헤테로 로맨스 없이 여성배우가 남역과 여역을 모두 맡은 여성국극을 20분씩 재현한다. 1950년대 인기를 끈 여성국극단은 가부장적 통제에서 벗어난 여성 유대를 경험하고 이상화된 남성상, 즉 ‘왕자’를 연기함으로써 성역할을 전복했던 공동체였다. 실제 당사자들은 연기를 통해 퀴어적 순간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배우들 사이 그리고 배우와 관객 사이에서 동성애 감정이 존재했다고 증언한다. 이를 소재로 한 드라마는 4회 만에 시청률 12.7%를 달성하고 유튜브 채널들은 여성국극과 당시 스타들을 조명한 각종 콘텐츠를 생산하며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데 한창이다. 이같은 관심이 김혜정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과 정은영 작가의 <여성국극 프로젝트>로까지 가닿기를, 왜 여성국극의 명맥이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한동안 관련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는지 담론이 확장되길 바란다.
한국 미디어에서 퀴어 재현은 개인 창작자의 의식과 창의성에만 의지해 발전하지 않는다. 먼저 방송국이나 감독 주도의 기획에서 외주 스튜디오 체제로 산업이 바뀌어가면서 기획 프로듀서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들은 IP를 발굴하고 창작자와 함께 대본을 개발한 뒤 투자를 받고 플랫폼을 찾는다. 도전적인 기획을 지지하고 이를 이해관계 당사자들에게 설득할 수 있는 프로듀서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나와줘야 한다. 콘텐츠와 플랫폼의 위기가 피부로 느껴진다면 거대 자본과 권력을 쥔 투자자와 채널은 적어도 현 소비자들의 수준에 뒤처진 선택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안전하다고 생각한 그 길은 오히려 요즘 대중에게 진부하다며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역할도 있다. 혐오 세력의 지루하고 뻔한 패악질이 ‘무플’로 흘러갈 만큼 현재와 미래의 긍정적인 연대를 시끄럽게 도모하자. 퀴어는 정치와 무관하지 않고, 성공한 정치는 영리한 전략에서 나오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