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아! 너무 일찍 져버린 꽃이여, <로빙화>
2002-06-19

아무도 믿어줄 사람이 없을지 모르지만, 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축구선수였다. 건빵과 우유를 간식으로 먹을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중학교 축구선수 생활은 그런 이유로 시작되었다. 그랬다, 중학교 때 ‘축구선수였다’는 사실은, 실은 가난하고 먹을 것이 부족했던, 남의 집에 고구마라도 몇개 들고 가 마당에서 텔레비전을 훔쳐보아야 했던 내 어린 시절의 슬픈 이력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지금 온 나라는 월드컵 열기에 휩싸여 있고, 난 문득 옛날 생각에 빠지곤 한다.

그런 어린 시절에 대한 강렬한 회상과 지독한 감정이입을 허락한 영화가 있다. 내가 <로빙화>를 본 것은 김종학 프로덕션에서 인형작가인 이승은, 허허선 부부의 <엄마 어렸을 적엔>란 소재로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기획하고 있던 시절이다. 일산 스튜디오에서 자료를 모색하던 중 그만 기획 스탭 앞에서 펑펑 울어버리고 말았다. 원래 눈물이 많은 탓도 있지만 가슴이 저려오는 한폭의 수채화 같은 영화 앞에 감전되고 말았던 것이다.

<로빙화>는 차밭 한구석에서 봄이 되면 피어나는 아주 아름다운 꽃이다. 아름답지만 너무도 생명이 짧은 이 꽃의 생장과 죽음을 은유로 <로빙화>는 천재적인 미술 재능을 지닌 한 소년의 삶을 애달프고도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소작농의 아들이어서인지 영화 속 주인공인 고아명은 나의 어린 시절을 너무도 강렬하게 떠올려준다. 고아명은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이다. 천재적인 미술 재능이 있었지만 부잣집 아들의 농간으로 사생대회 학교대표에서 떨어지게 된 고아명은 “부잣집 애들은 뭐든지 잘해요”라며 울부짖는다. 그런 자기 분노는 나의 슬픈 어린 기억들을 대신 외쳐주는 카타르시스를 던져주었다. 이후, 그림 연습을 위해 황소 얼굴에 진흙 바르기, 생강 훔쳐먹기 등의 영상은 어린 추억이 아직 내 마음속에 일렁거리고 있음을 알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이렇듯 뒤늦은 영화입문에서 만났던 강렬한 기억들을 가지고 난 영화업계에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독립영화 워크숍 6기에 최고령 입학을 필두로 업계 이곳저곳 현장을 열심히 뛰어다닌 지 12년, 마당발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니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형국이 되었다. 이 늦은 시작은 앞으로도 제2기 영화진흥위원으로 남보다 할 일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요절한 천재미술가 ‘고아명’과 누나 ‘고아매’, 하늘나라에 간 엄마 설정이 <로빙화>라면 천진난만한 ‘길손’과 눈이 보이지 않는 ‘감’이 그리고 하늘나라에 있는 엄마가 그려내는 잔잔한 이야기가 <오세암>이다. <오세암>이 정채봉 원작동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기획을 마치고 나서 문득 생각해보면, 두 작품이 이처럼 닮은꼴일 수가 없다.

<로빙화>를 보고 “나도 꼭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지”란 각오를 한 것이 나도 모르게 <오세암>이란 극장용 애니메이션에 참여하게끔 만들어준 것이 아닌가 싶다.

“별들은 말이 없고, 인형은 엄마를 닮았네

하늘의 눈은 반짝이고 엄마의 마음은 로빙화

차밭에 꽃이 피어 엄마는 즐거워 하시네

엄마의 모습 생각하니 눈물은 로빙화네

눈물은 로빙화 됐네”

“난 저 산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서 세계에 보여주고 싶다”던 주인공 아명의 속삼임이 아직도 내 귓전에 맴돌며 나를 영화로 이끈다. 아! 아! 내 로빙화여….

글: 김병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사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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