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도라 버치
2002-06-27
글 : 최수임
모난 슬픔, 판타지에서 자유를 얻다

“나는 이니드 같은 자유를 가져본 적이 없어요. 만약 실제로 이니드 같은 아이를 만난다면 나는 그를 좋아하겠지만 그가 나를 좋아할지는 의문이에요.” 희귀 음반을 모으며 자폐적으로 사는 마을의 괴짜 아저씨에게 연대감을 느끼고, 그에게 여자를 만나게 하곤 그걸 또 질투하고, 독립하려고 아빠의 애인이 소개해준 회사에 들어갔다가 하루 만에 때려치우고, 결국엔 오랜세월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다 버스를 탔던 어느 할아버지마냥 홀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이니드.도라 버치는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냉소적인 고교졸업생 이니드를 ‘이상하다’기보다는 ‘자유롭다’고 느낀다고 고백한다. “이니드를 연기하면서, 조금은 그녀의 자유를 맛볼 수 있어 좋았다”. 그런 그녀는, 어쩌면 이니드보다 조금 더 이상한 소녀일지 모른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믿는 천둥의 신 ‘도르’(Thor)의 여성형인 ‘도라’를 이름으로 가진 도라 버치는, 이제 막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지만 실제로는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중학교 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가정학습(Home Schooling)을 택한 그녀는, “누구나 십대를 거쳐야 한다는 건 비극이다”라고 말할 만큼, 또래와의 연대 형성에 실패한 기억을 갖고 있다.“그 또래에는 전화가 아주 중요하죠. 집에 오면 저에게는 아무런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어요. 다음날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무엇인가 같이 일을 꾸미죠. ‘언제 그걸 하기로 했니?’ 하고 물으면, 다들 ‘어젯밤에’라고 말하곤 했어요.”

실제 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는 대신, 도라 버치가 자유를 느낀 것은 영화라는 ‘판타지’에서였다. 4살 때 캘리포니아 건포도 광고에 출연하면서 연기인생을 시작한 그녀는, 6살 때 아동용 괴기영화 <자주색 식인종>(Purple People Eater)으로 영화에 데뷔했고,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기까지 <멍키 트러블> <알래스카> <여기보다 어딘가에> <아메리칸 뷰티> <더 홀> 등 열여섯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항상 상대방과 시선을 맞추고 그의 말을 정말로 들어라.” “음, 알았어요, 할아버지.” 어릴 적 광고를 찍으며 들었던 충고를 가슴에 새겨두었던 도라 버치는 나이가 들어감과 비례해 점점 더 강한 눈빛과 개성을 연기에 담아왔다. 열네살에서 열여섯살 사이, 그녀는 ‘동물들과 어울리기엔 너무 나이가 많고, 진짜 로리타처럼 보이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평판 속에 한동안 캐스팅 제안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그러던 그녀는, <아메리칸 뷰티>로 필모그래피의 새 챕터를 연다. 케빈 스페이시의 반항적인 딸 제인 번햄이 바로 그녀. 평범하지 않고 어딘가 어두운 그녀의 기이한 소녀 캐릭터에 대해, 어떤 이는 “어른의 감수성으로 한번 걸러진 틴에이저”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시모어(스티브 부세미)에게서 자신의 감성을 확인받는 이니드처럼, 도라 버치에게는 어딘지 어른의 세계를 꿰뚫어보는 아이의 모난 슬픔 같은 게 어려 있다.

이제 딱 스무살. 더이상 소녀의 나이가 아닌 이 판타스틱 소녀는,이미 16년의 경력을 가진, 조숙한 배우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그녀의 조숙함은, <아메리칸 뷰티>가 평단의 관심을 한몸에 받을 무렵에 있었던 한 인터뷰에서도 확인된다. 그녀는 당시 바로 다음 영화 <더 홀>의 촬영에 들어가 있었는데, 그에 대해 “다행이다. 인터뷰와 파티, 그런 것에 피곤해지지 않고 새 캐릭터를 만나게 되어서”라고 말했다.<판타스틱 소녀백서>를 찍으면서 조금 이상한, 그러나 평범한 또래의 시간을 공유한 도라 버치는,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다시 한번 이니드처럼 말한다. “어둡고 기이한 캐릭터요? 그걸 계속할 거냐고요? 연기는 자기랑 다른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걸 계속할 이유가 없잖아요.” 도라 버치가 어디로 떠났는지 아직은 소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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